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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가작(2) - 여기서부터 비잔

  • 작성자 : gokmu
  • 작성일 : 2017-06-07 08:55:10

여기서부터 비잔


임선우 (동국대학교•국어국문학•4)

비잔에 긴 비가 내렸다. 경자 씨가 잠들기 전 내리기 시작했는데, 눈을 떠도 빗줄기는 여전했다. 시간은 새벽 세 시 반. 바로 일어날 기운이 없어 경자 씨는 누워 있던 몸을 뒤집어 엎드렸다. 그 상태 그대로 그녀는 손을 뻗어 커튼을 살짝 젖혀보았다. 맞은편의 102동 빌라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 둘. 좀 더 몸을 일으켜 102동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커튼을 열어보았지만, 둘.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경자 씨는 이곳에 이사 온 날부터 지금까지 빠짐없이 매일 잠에서 깨면 102동의 켜진 불빛들을 세어보곤 했다. 대부분 하나에서 셋 사이로 정해진 불빛의 수는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오늘과 어제가 다를 바 없을 거라는 무언의 위로, 경자 씨는 그런 종류의 체념 섞인 위안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경자 씨는 출근 준비조차 잊은 채 한참이나 불빛을 바라보았다.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이내 멋쩍어진 경자 씨는 급한 일이라도 생각난 사람처럼 벌떡 일어섰다. 언제부터 불빛이 저렇게 노란색이었나, 중얼거리며.
  경자 씨가 이토록 일찍 일어나는 이유는 그녀가 가진 직업 때문이다. 그녀는 이 년 전부터 비잔 톨게이트에서 삼 교대 요금징수원 일을 해왔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새벽 여섯 시부터 오후 두 시까지 경자 씨는 비잔으로 들어오는 차량을 마주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일은 처음부터 경자 씨의 적성과 맞지 않았다. 타고난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칠 초에 한 명씩 새로운 사람의 눈을 마주하는 일은 그녀에게 고역처럼 느껴졌다.―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처음 보는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얘기할 수 있는 거지?―그렇지만 새로운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했고, 시간적인 여유를 얻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경자 씨는 이 탄탄한 굴레에서 매번 잠시 고민하다, 그저 묵묵히 하루 여덟 시간 앉아 있는 길을 택했다. 그녀에게도 대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초반 몇 달의 고민과 관리소장의 지적 끝에 그녀가 찾은 돌파구는 다름 아닌 이마였다. 직장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 경자 씨는 손님들의 눈 대신에 이마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자 씨는 사람들에게 이토록 다양한 모습의 이마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전까지 경자 씨에게 이마란 좁고 넓은 정도로만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부위였다면, 그녀는 이제 이마의 높낮음이 불러일으키는 미묘한 차이, 주름이 패는 방향과 길이 등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매일 마주하는 단골손님들을 이마만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평평한 살갗에 집중하다 보면, 그 아래 놓인 시선 따위는 더 문제 되지 않았다. 경자 씨는 사람의 얼굴에 그렇게 안정적인 공간이 있음에 깊이 감사했다.
  경자 씨는 한참을 누워 손을 주무르다가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일어났다. 아침 준비라고 해봤자 며칠 전 해놓은 밥솥에서 밥을 푸고 마트에서 사 온 반찬 몇 가지를 냉장고에서 꺼내는 일이 전부였다. 요금징수원이 된 지 일 년이 지나고 나서부터 생긴 손 저림 탓이었다. 처음에는 뻐근하다고 느껴져 손가락으로 손목을 꾹꾹 누르고 다니던 것이, 어느 날부터는 참을 수 없이 쑤셔와 밤잠을 설치는 일이 잦아졌다. 누군가 세게 움켜쥐었다가 놓은 것처럼 얼얼한 손목을 혼자 어쩌지도 못하여, 왼손으로 오른손을 주물렀다가, 또다시 오른손으로 왼손을 주물렀다가…… 그러다 저도 모르는 새에 잠드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물리치료도 몇 번 받아봤지만 그때뿐이었다. 의사는 혈액순환에 신경 써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반 평짜리 부스에서 꼼짝없이 하루 여덟 시간을 앉아 있는 그녀에게는 그조차도 어려웠다. 경자 씨는 밥을 크게 한술 떠, 가라앉으려는 마음을 밥과 함께 씹어 삼켰다. 나가기 전, 경자 씨는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서 붉은색 립스틱을 발랐다. 진한 색상이 경자 씨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잔고속도로는 민간투자고속도로로, 근무평가 규정에 립스틱 색깔까지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자 씨를 비롯한 징수원들은 아무도 그에 대한 불만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까짓거 립스틱 하나 바르고 말지, 그들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 많았다.
*
  경자 씨가 첫차를 타고 톨게이트에 도착했을 때는 여섯 시가 되기 십 분 전이었다. 요금소로 이어지는 지하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경자야, 그녀를 불렀다. 오늘 일 끝나고 잠깐 볼 수 있을까? 할 얘기가 있는데. 비잔톨게이트에서 가장 오래 일했다는 영숙이었다. 경자 씨는 아, 그래요, 짧게 대답하고 돌아섰다. 이 년 가까이 일하면서도 동료들과 사적인 대화를 주고받아본 기억은 별로 없었다. 경자 씨는 무슨 얘기일까 궁금했지만, 칠 초에 한 번씩 새로운 이마들을 마주하며 궁금증은 이내 잊혔다. 따라서 경자 씨가 여덟 시간 근무를 마치고 부스에서 나오자마자 영숙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을 때, 그녀는 아, 소리를 내며 놀라고야 말았다. 영숙은 미안하다는 듯 잠시 웃더니, 숨 고를 틈도 없이 할 말을 쏟아내었다.
  경자야,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내 아들이 사진작가인데, 당장 누드모델이 필요하대. 사오십 대를 대상으로 한 작품을 전시에 싣고 싶나 봐. 경자 네가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집요하게 눈을 맞춰 오는 영숙에게 당황해, 경자 씨는 자칫 알았다고 말해버릴 뻔했다.
  언니, 저는……
  그 사람들은 네 몸을 예술로, 그러니까 작품으로 보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누드는 힘들 것 같아요.
  그럼 혹시 마음 바뀌면 연락 줘, 경자야. 내 번호 알지?
  네. 좀 더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꼭 연락 달라는 영숙을 뒤로 한 채, 경자 씨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생각해 볼 마음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이제 막 정규직으로 전환되려는 시점에, 누구에게도 밉보이거나 눈에 띄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이가 오십이 다 되어 가는데 누드라니. 경자 씨는 저도 모르게 놀란 마음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그치고 날은 이제 개어 있었다. 그러자 눈이 감기고…… 불현듯 하나의 영상이 떠오른 것이다. 여고에 갓 입학했던 삼월 무렵, 체육 시간 직전의 쉬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교실 커튼 뒤나 구석 자리에서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때 경자 씨의 눈에 들어온 몸……. 그녀는 사람 몸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던 허리, 체육복 안으로 집어넣기 위해 허공으로 올라가던 하얀 두 팔……. 그 찰나의 순간, 경자 씨는 그 여자아이를 자신만의 신으로 만들었다.
  경자 씨는 악몽이라도 꾼 듯 눈을 크게 떴다. 지면을 따라 거칠게 흔들리는 버스가 그녀를 서둘러 현실로 데려왔다.
*
  샤워기에서 찬물이 쏟아졌다. 경자 씨는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몸을 씻었다. 하얗게 보풀이 인 속옷을 겉옷에 감싸 선반 위에 놓고 샤워기 아래 설 때면 바깥일을 마무리 짓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다만 더 바랄 것이 있다면, 경자 씨는 언제나 좀 더 넓은 욕실을 꿈꾸고는 했다. 지금의 욕실은 비좁아서 세면대에 샤워기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샤워할 때마다 세면대 거울에 자신의 몸이 비쳤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경자 씨는 몸을 씻는 자신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부끄러웠다. 처지기 시작한 젖가슴 아래로는 언제나 와이어 브라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고, 살들은 탄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내 몸을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본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기억해보려 해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경자 씨의 몸을 처음 보았던 대학교 선배도, 이십 대 후반 작은 광고회사에서 만났던 팀장도, 경자 씨의 벗은 몸 앞에서 딱히 어떠한 반응을 보인 기억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정해진 순서가 있는 것처럼 옷을 벗고,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할 일을 했을 뿐. 그 순간, 경자 씨는 어떤 예감이 그녀 자신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약속이라도 잡힌 사람처럼 급하게 몸을 씻기 시작했다.
  언니, 저 모델 일 할게요.
  경자 씨가 단체 메시지 방에서 영숙의 이름을 찾아 문자를 보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삼십 초였다. 방금 감고 나온 머리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영숙이 손목을 움켜쥘 때부터 급한 일이라는 것은 짐작했으나, 촬영이 당장 이틀 뒤라는 말은 경자 씨를 당황하게 했다. 금요일 오후 영숙에게 문자를 보냈을 때, 영숙에게서는 답장 대신 전화가 걸려왔다. 경자야, 어차피 평일에는 너도 바쁠 테고 이번 주 일요일에 바로 촬영할 수 있을까? 경자 씨는 안 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저 알겠다고 답했다. 사실 경자 씨는 촬영 전에 좀 더 살을 빼고 싶었고 비싼 제모 크림도 사 오고 싶었다. 그러나 고맙다는 말을 연신 반복하는 영숙 앞에서 경자 씨는 왠지 입을 다물게 되었다. 촬영일은 시월의 첫날이었다.
  무작정 걸음을 옮겨 보았지만, 사진관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경자 씨는 영숙이 적어준 주소대로 움직이려 했으나 골목이 너무 많아 자꾸만 길을 잃었다. 비잔은 원래부터 골목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경자 씨조차도 처음 가는 동네에서는 종종 길을 헤맸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비잔의 길들은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매번 갈라져 있었다. 비잔을 처음 방문한 이들은 해가 지면 돌아다니지 않을 것을 권장할 정도였다. 경자 씨가 찾는 사진관은 하필이면 그중에서도 골목이 가장 밀집된 지역에 있었다.
  오랜만에 위아래 세트로 맞춰 입은 속옷은 땀으로 젖은 지 오래였다. 그냥 돌아갈까, 생각하던 순간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관은 건물 오 층에 있었다. 경자 씨는 건물 입구로 들어서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땀을 식히고 싶었으나 한참 길을 헤맨 탓에 약속 시간은 이미 오 분 정도 지나 있었다.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는 그 흔한 거울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꽉 막힌 철제 벽에 둘러싸이자 경자 씨는 문득 자신이 하려는 일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건물을 찾는 데에만 집중하느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지금 타인, 그것도 동료의 아들 앞에서 나체를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렸다.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 있는 사진관 내부가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훤히 들여다보였다. 경자 씨는 결국 어쩌지도 못하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진관은 밖에서 볼 때보다 안이 훨씬 넓었다. 프런트에 앉은 직원이 땀 흘리는 그녀를 보고 혹시 전시 관련해서 오신 건가요, 물었다. 그리고는 4번 스튜디오로 들어가라고 안내했다. 경자 씨는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긴장한 탓에 침조차 넘어가지 않았다. 4번 스튜디오는 오른쪽 복도 맨 끝에 있었다. 둥근 손잡이를 돌리자 스튜디오 내부가 드러났다. 문 여는 소리가 들렸는지 스튜디오 중앙에 쳐진 암막 커튼이 열리고 그 사이로 젊은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키가 크고 반 곱슬머리인 삼십 대 초반의 남자였다. 남자는 경자 씨를 보더니 허리 굽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제 이름은 이동현입니다. 경자 씨는 저도 모르게 네, 동현 씨 얘기 많이 들었어요, 라고 대답했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그건 영숙의 아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경자 씨는 영숙을 비롯한 동료 중 그 누구와도 오래 말을 섞지 않았다. 근무 시간 중 오 분 십 분씩 짧게 주어지는 쉬는 시간에도 경자 씨는 되도록 직원 휴게실 쪽으로 가지 않았다. 초반에 그녀에게 말을 섞어오던 동료들도 몇 번 시원치 않은 대답이 돌아오자 더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모나지만 않을 정도로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경자 씨는 언제나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동현은 곧 스튜디오 구석 자리에 놓인 테이블로 경자 씨를 안내했다. 그리고는 촬영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번 제 전시의 목표는 중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거예요. 전체 누드 촬영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첫 촬영이시니 세미 누드로 진행하겠습니다. 준비된 천이나 소품으로 몸을 가려주시면 됩니다. 포즈도 자유인데, 혹시 생각해 오신 포즈가 따로 있으신가요? 경자 씨는 대답 대신 고개를 내저었고, 그 행동이 남우세스러워 보이지 않았을까 곧바로 후회했다. 동현은 그저 알겠다는 듯 잠시만요, 하더니 암막 커튼 사이로 다시 들어갔다. 그러더니 금세 파일 하나를 들고 왔다. 이 년 전에 노르웨이에서 Follow My Ruin이라는 제목의 누드 사진전이 열렸어요. 전라의 사오십 대 남녀들이 이십 대들이 할 법한 파티와 분장을 하고 찍은 사진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 사진들이 그 대표작이에요. 포즈들을 한번 훑어보시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동현이 펼친 파일에는 정말로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사람들이 발가벗은 채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크게 웃고 있었다. 경자 씨가 한 번도 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모습이었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다가, 경자 씨는 마지막 장에서 문득 가슴이 내려앉는 듯했다. 파일의 맨 뒷장에는 앞장들처럼 화려한 파티 사진이 아닌 숲속에서 찍은 듯한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 한 중년 여자가 뛰어가며 등 뒤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었다. 실제로 달리고 있는 와중에 찍은 건지 사진은 매우 역동적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녀의 몸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그리고 그 눈빛―그녀의 푸른 두 눈은 그 어떤 빛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사진이 마음에 드세요? 네, 정말 마음에 들어요. 경자 씨는 사진관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떨지 않고 온전한 문장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저 문을 여시면 안에 작은 탈의실이 있어요. 우선은 전부 탈의하신 다음 안에 있는 가운을 입고 나오시면 됩니다. 첫 촬영이시라 긴장이 많이 될 테지만, 최대한 편안한 마음으로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동현의 말대로 스튜디오의 구석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문을 열자 사람 한 명이 겨우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비좁은 공간이 나타났다. 벽면에는 세로로 긴 로커 두 개가 붙어 있었다. 경자 씨는 그중 왼쪽 로커를 열어 안에 걸린 가운을 꺼내고 입고 온 카디건을 걸었다. 회색 긴 소매 옷도, 청바지도 차례대로 벗었다. 경자 씨는 문득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어제저녁부터 굶었는데도 살이 흐물흐물하게 손에 잡혔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걸 찍겠다고 한 걸까. 경자 씨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속옷을 마저 벗었다. 찬 공기가 맨살에 닿으면서 팔뚝과 허벅지에 소름이 돋았다. 경자 씨는 재빨리 가운을 걸쳤다. 실크 재질인지 맨살에 감기는 느낌이 부드러웠다. 훅을 평소보다 한 칸 더 늘려서 채운 덕분에 브라 자국은 남아 있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경자 씨는 생각했다.
  경자 씨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스튜디오가 전보다 환해져 있었다. 암막 커튼이 걷혀서 더욱 넓어 보이기도 했다. 카메라 조정을 막 마친 듯한 동현이 경자 씨에게 다가와 검은 천을 건네주었다. 뒷모습부터 촬영 진행할게요. 천으로 뒤를 가리시고 준비되시면 말씀해주세요. 포즈는 제가 컷마다 말씀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경자 씨는 우선 가운 안으로 천을 집어넣은 다음 허리에 묶었다. 그리고는 단단히 고정된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한 후에야 가운을 벗었다. 막상 상체가 드러나자 뒤를 돌아서 있는데도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매듭을 푸는 손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허리를 곧게 펴시고 벽을 정면으로 바라보세요, 고개를 살짝 위로 들어주세요, 양팔을 벌리시고 천을 조금 더 팽팽하게 잡아당겨 주세요, 다리는 모아주세요. 등 뒤에서 동현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묘하게 사람을 안정시키는 목소리였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절대적이었다. 경자 씨는 최대한 동현의 요구에 맞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시작한 지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셔터 소리는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경자 씨는 동현의 표정을 볼 수 없어서 더욱 불안했다. 한참을 턱, 허리, 어깨, 팔, 다리, 손끝을 움직이고 난 다음, 찰칵 소리가 났을 때 경자 씨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측면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 긴장을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조금 쉬었다가 할까요? 경자 씨는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까 전부터 팔에 쥐가 나려고 했는데 자세가 흐트러질까 봐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제가 잠시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동현이 말을 꺼냈다. 스튜디오를 좀 어둡게 하면 긴장이 덜 되지 않으실까요. 그게 더 좋은 사진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요. 동현이 조명에 하나씩 다가설 때마다 스튜디오 안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동현의 말이 옳았다. 조명을 낮춘 편이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동현의 존재가 어둠 속에서 흐릿해졌다는 점이 좋았다. 측면 촬영은 종이 보드를 들고 찍는 것이라서 노출에 대한 부담 또한 가장 적었다. 하얀 보드 위로는 이동현 누드사진展이라는 검은 글씨가 크게 쓰여 있었다. 겨드랑이 사이에 보드를 끼우시고요, 시선은 이쪽 말고 정면을 바라봐주세요. 긴장이 덜 된 덕분에 측면 촬영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정면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동현의 말에 경자 씨가 몸을 틀었을 때였다. 앞을 바라보자 환한 조명에 갑작스레 경자 씨의 눈이 부셔온 것이다. 조명은 경자 씨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하나씩 켜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조명은 짐승의 두 눈……. 아니다. 경자 씨가 떠올린 것은 그런 짐승 따위가 아니었다. 경자 씨는 그 환한 빛을 본 순간, 하나의 파노라마를 보았다. 조명은 매일 새벽 눈만 뜨면 바라보았던 102동의 불빛이 되었다가, 작년 겨울 야간 근무할 때 마주했던 자동차의 상향등이 되었다가……. 쏟아지는 빛 속에서 경자 씨는 수없이 많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102동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혹은 끝없는 길 위, 부스 안에 갇혀 있던 자신의 모습…….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풀리며 보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경자 씨는 그 순간,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경자 씨는 더는 앞을 볼 수 없어 가만 눈을 감았다. 전생일지도 모르는 아주 오래된 기억, 혹은 바로 어제의 일 같기도 한 무언가를 조용히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경자 씨는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 주저앉은 채 몸을 웅크렸다. 이것은 귀신의 짓이 분명하다, 경자 씨는 다시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경자 씨가 탈의실에서 옷을 입고 나왔을 때, 동현은 오늘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동현은 경자 씨를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세요, 말을 건넸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님을 아는데도, 경자 씨는 동현의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사진이 정말 잘 나온 것 같아요. 전시회는 두 달 뒤인 12월 3일에 열리는데, 주소를 적어주시면 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가족이나 친구분들 모시고 오셔도 좋고요.
  경자 씨는 동현의 얼굴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동현이 내민 메모지에 주소를 적어 내려가며 그래요,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건 오늘 모델료입니다.
  경자 씨는 동현이 내미는 봉투를 받으며 자신에게 놀랐다. 여태껏 돈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경자 씨는 봉투를 받아 손가방 안에 그대로 넣었다.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찍어주시느라 애쓰셨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자 씨는 서둘러 인사를 마무리 짓고 방에서 나왔다. 도망치듯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복도를 걸어 나오니, 맨 처음 프런트에서 보았던 직원이 아직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경자 씨는 이상한 쾌감이 들었다. 경자 씨는 일할 때 내는 하이 톤의 목소리로 수고하세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 뒤 사진관에서 빠져나왔다.
*
  집에 돌아온 경자 씨는 신발장 앞에 가방을 던져놓다시피 하고는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촬영 내내 벗고 있었더니 오히려 벗은 몸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머리 위로 따뜻한 물이 쏟아지자,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현실감이 점점 옅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래전의 일 혹은 지나간 꿈처럼 아득하게…….
  샴푸를 헹궈내고 눈을 뜨자, 여느 때처럼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 같으면 바로 시선을 거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경자 씨는 거울을 통해 샤워타올로 팔을 문지르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팔을 씻을 때는 팔을, 가슴을 씻을 때는 가슴을……. 등을 문지를 때는 고개까지 돌려가며 자신의 몸을 쳐다보았다. 매일같이 씻고, 먹이고, 입힌 몸인데도 생소했다. 옆구리에 난 점, 발등의 옅은 화상 자국, 둔부 아래 패인 주름 같은 것들. 그녀는 그것들을 처음 보는 것처럼 유심히 들여다보고, 비누칠하고, 문질러보았다.
  한참을 씻은 다음 눕자 몸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경자 씨는 눈을 감고 주먹만 한 심장이 뜨거운 피를 규칙적으로 뿜어내는 상상을 해보았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그녀는 잠들기 전 손이 저리지 않았다.
*
  전시회가 열리기까지의 두 달은 경자 씨의 생각보다 금세 흘러갔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정말로 특별한 것이 없었다. 102동의 불빛마저 언제나 하나에서 셋 사이로 일정했다, 생각하려던 순간 경자 씨는 문득 일주일 전 일이 떠올랐다. 경자 씨는 조그맣게 맞다, 중얼거렸다.
  톨게이트에서 일을 하다 보면 진상 손님들을 마주하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돈과 함께 쓰레기를 넘겨주거나―경자 씨는 가래침 섞인 담배꽁초들이 담긴 종이컵까지 받아봤다―일 처리가 늦다며 화를 내는 손님, 하의를 벗은 노출증 환자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그 어떤 부류에도 속하지 않았다. 일주일 전, 출근 시간이 지난 오전 열한 시, 차와 차 사이에 간격이 생기기 시작할 때였다. 경자 씨 앞으로 은색 SM5 한 대가 들어섰다. 그날따라 유난히 가을 햇살이 좋아 경자 씨는 어서 오십시오, 인사하는 목소리가 한 톤 더 높아졌다. 남자는 말없이 만 원을 건넸다. 경자 씨가 잔돈을 거스르는 동안에도 남자는 조용했다. 뒤이어 안녕히 가세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자는 창을 올렸다. 그런데 몇 초만 참으면 되었을 것을, 창이 채 올라가지 않아 남자가 중얼거린 말이 경자 씨 귀에 그대로 들어와 박힌 것이다. 저년이 드디어 눈을 마주치네.
  그 뒤로 일주일 동안 경자 씨는 눕기만 하면 그 말을 반복해서 되뇌었다. 그녀는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어떤 감정이 솟아오름을 가만히 느꼈다. 좋고 나쁨으로 구분할 수 없는, 그런 감정. 저년이 드디어 눈을 마주치네, 저년이 드디어…….
*
  전시회 개관 당일, 경자 씨는 정확히 세 시 반에 눈을 떴다. 그녀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일어나 커튼을 치고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불빛은 칠 층 왼쪽에 하나. 자주 눈에 띄어 익숙해진 집이었다. 그런데 경자 씨가 안심하고 부엌으로 가려던 찰나, 칠 층의 불빛이 꺼졌다. 그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어둠 속에 흡수된 듯한 102동을 바라보았다. 겨울이라 그런지 더욱 칠흑 같았다. 한참을 가만있던 경자 씨는 커튼을 닫았다.
  그런 다음 경자 씨는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불빛을 환하게 켰다. 자신의 방은 물론이고 부엌, 거실, 심지어는 화장실 불까지 켜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부엌으로 향했다. 경자 씨는 싱크대에서 손을 씻은 후, 다시마와 굵은 멸치를 냄비에 넣고 물을 부었다. 잔치국수를 해 먹을 생각이었다. 여전히 손은 저렸지만, 오늘만큼은 꼭 직접 만든 음식을 먹고 싶었다. 육수가 끓는 동안 경자 씨는 야채실을 열었다. 냉장고에서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어제 퇴근길에 사 온 애호박과 당근이 들어 있었다. 경자 씨는 그것들을 썰기 시작했다. 칼질할 때마다 환하게 드러나는 노랑, 초록, 주황의 색깔들이 어찌나 예쁜지……. 소면을 삶고 계란 지단까지 부쳐 마침내 잔치국수가 완성되었을 때, 경자 씨는 다채로운 고명 색깔들에 마음마저 환해졌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릇을 다 비웠을 때는 다섯 시였다. 전시회는 열 시에 여는데, 딱 맞춰 가는 것은 괜히 낯부끄러워 경자 씨는 좀 더 시간을 끌기로 하였다. 경자 씨는 간만에 집 안을 청소하고, 빨래도 널었다. 그리고는 옷장을 열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전시회니까 격식을 갖춰야겠지. 그러나 경자 씨에게는 그럴만한 세련된 복장이 없었다. 한참을 뒤적거리다가 경자 씨가 겨우 찾아낸 것은 이 년 전 요금징수원 면접을 보러 갈 때 입었던 흰 블라우스와 남색 치마였다. 블라우스 깃의 유행 지난 프릴이 신경 쓰였는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사이즈였다. 마트에서 사 먹은 반찬들 때문인지 경자 씨의 몸은 예전보다 살이 붙어 있었다. 옷을 입어보니 블라우스는 단추 사이사이가 벌어져 보기 흉했고, 치마 지퍼는 끝까지 올라가지도 않았다. 당장 옷을 사러 갈 수도 있었으나 백화점은커녕 아웃렛조차 가본 지가 너무 오래된 경자 씨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경자 씨는 결국 겉옷을 벗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겨울이고 금방 다녀올 것이니 겉옷 벗을 일은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경자 씨는 검은 코트의 단추를 꼼꼼하게 채웠다. 한동안 손대지 않았던 누드 톤의 립스틱을 꺼내 바르기도 했다. 마침내 열 시가 되자, 경자 씨는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섰다.
*
  도착한 전시회는 입구부터 사람으로 북적였다. 누드라는 소재 자체가 사람들의 이목을 끈 듯했다. 경자 씨는 예상하지 못한 인파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표 파는 곳 옆에서 동현이 기자 서너 명에게 질문을 받고 있었다. 경자 씨는 동현을 지나쳐 초대권을 내고 전시관에 입장했다. 전시관은 난방을 지나치게 세게 한 탓인지 매우 덥고 건조했다. 입구에서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겨드랑이가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는 일 또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경자 씨로서는 이런 전시회에 오는 것이 처음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앞서가거나 혹은 자신과 앞사람의 간격이 벌어지는 일이 최대한 없게 하기 위해, 경자 씨는 남모르게 진땀을 흘렸다.
  전시는 초입부터 경자 씨 나이 정도 되는 사람들의 나체 사진들로 가득했다. 경자 씨는 동현이 보여줬던 누드 사진들에 익숙해진 건지, 처음만큼 그것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그들의 몸이 만들어내는 선과 느낌에 집중해보았다.
  어느덧 전시 중반에 이르렀는데, 경자 씨의 사진은 아직 단 한 장도 나오지 않았다. 경자 씨는 혹시 내 사진이 실리지 않은 것은 아닐까, 속으로 생각했다. 더위 탓에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전시관 내부로 들어갈수록 히터 바람은 더욱 세졌고, 경자 씨는 이제 주변에서 유일하게 겉옷을 입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남은 걸까, 앞을 내다보는 순간 경자 씨는 숨이 멎는 듯했다. 전시관 중앙에는 앞서 봤던 그 어느 사진보다도 압도적인 크기의 경자 씨 사진이 걸려 있었다. 많은 사람이 걸음을 멈춘 채 사진 속의 경자 씨를 보고 있었다. 경자 씨는 사람들을 비집고 사진 앞으로 다가갔다. 짧은 거리였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사진을 통해 자신의 벗은 몸을 보는 것도 새로웠지만, 뜻밖에 경자 씨가 가장 놀랐던 것은 자신의 표정이었다. 사진 속의 경자 씨는 울면서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경자 씨는 자신의 얼굴 위로 저런 표정이 나타났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앞에 있던 여자가 남자친구에게 이 사진 좋다,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자 씨는 안 그래도 붉어져 있던 얼굴에 더욱 열이 올랐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있다. 내 몸의 구석구석, 가장 비밀스러운 곳까지……. 경자 씨는 문득 크게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지금의 감정을 감당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자 앞에 있던 사람들이 천천히 이동했다. 그러자 거대한 사진 옆에 적힌 글씨가 경자 씨의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벽에는 검은 글씨로 그녀 사진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작게 쓰여 있어서, 경자 씨는 가까이 다가서고 나서야 겨우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경자 씨는 그 글씨를 읽은 다음에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다시 읽었다. 거기에는 분명하게 [출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떠도 두 글자는 여전했다. 코트 아래로는 블라우스와 치마가 터질 듯이 그녀 몸을 조여 오고 있었다.
*
  버스 안은 놀러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경자 씨는 창가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잠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진 제목을 본 경자 씨는 그 자리에서 전시관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동현까지 무시한 채. 한참을 달리던 버스는 톨게이트 앞에서 급정거했다. 주말 오후라 그런지 차량이 많이 밀려 있었다. 차의 반동에 경자 씨가 눈을 떴다. 그리고는 천천히 코트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블라우스와 팽팽해진 치마가 밖으로 드러났다. 내친김에 블라우스 단추도 두 개나 풀었다. 경자 씨는 다시 눈을 감았다. 땀이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내 좁혀져 있던 그녀의 미간이 서서히 펴졌다. 버스는 이제 막 톨게이트를 지나고 있었다.

● 제37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가작(2) - 수상소감

“혐오와 폭력이 편재한 시대에 
문학만이 건넬 수 있는 위로가 있다 ”

임선우 (동국대학교 · 국어국문학 · 4)

당선 전화를 받고,누군가에게는 제 글이 위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한동안 가슴이 뛰었습니다.
혐오와 폭력이 편재한 시대에 문학만이 건넬 수 있는 위로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끝까지 남아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문학적 지평을 넓혀주신 황종연 교수님, 부족한 글에 대한 조언을 아낌없이 해주신 이장욱 교수님, 함께 소설 쓰고 있는 친구들에게 가장 먼저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를 사랑으로 키워주신 할아버지, 엄마,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양재욱, 감사합니다. 동생 성민아, 네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주어서, 그 믿음이 너무도 순수하고 견고해서, 나는 조금씩이나마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소설을 쓰면서 비로소 저에 대해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이 때로는 피하고 싶을 만큼 부끄럽습니다. 그렇지만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게 무엇인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전해드리고 싶은 얘기가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작년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를 저와 함께 보낸 경자 씨. 여기서부터 비잔을 완성한 다음에도 당신을 떠올릴 만한 일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부디 자유롭고, 행복하고,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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