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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 토끼 굴

  • 작성자 : gokmu
  • 작성일 : 2017-06-07 08:48:03

제37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  토끼 굴

토끼 굴

성해나 (서울예술대학교•문예창작학•2)

  入


  토끼소년은 혼자 시소를 타고 있었다. 소년이 바닥에 발을 붙였다 뗄 때마다 시소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놀이기구라곤 시소 밖에 남지 않은 재개발구역의 놀이터에서 소년은 내내 그 행동을 반복했다. 트위터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토끼소년은 토끼 귀가 달린 머리띠를 쓰고 있었다. 그 머리띠 때문에 구주는 토끼소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구주는 천천히 토끼소년에게 다가갔다. 


  토끼소년 맞죠? 


  토끼소년은 시소에 앉아 구주를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중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앳되어서 구주는 잠시 멈칫했다. 


  아저씨가 구주? 


  소년이 물었다. 구주는 소년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입을 벌릴 때마다 덧니가 얼핏 보였다. 소년은 가상 세계에서 막 튀어나온 사람 같았다. 핑크색 반바지와 금발, 토끼 귀가 달린 머리띠, 그리고 말할 때마다 보이는 덧니가 묘하게 잘 어울렸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어요? 


  토끼소년의 물음에 구주는 주차장에 세워놓은 하얀 카니발을 가리켰다. 토끼소년은 시소에서 내려 별다른 말없이 카니발을 향해 걸어갔다. 소년이 움직일 때마다 머리띠에 달린 토끼 귀가 흔들렸다. 


  카니발의 운전석에는 모자장수가, 뒷좌석에는 하트여왕이 앉아 있었다. 토끼소년의 앳된 얼굴 때문인지 두 사람은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소년은 두 사람에게 눈인사를 한 뒤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 길에서 차로 이십 분정도 가면 홍루동이 나와요. 그 동네에 토끼 굴이라는 이벤트 용품점이 있거든요. 거기가 제가 트위터에서 말한 곳이에요.


  토끼소년이 말했다.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곳인 건 확실한 거지?


  모자장수가 소년에게 물었다.


  아마도요. 거기서 살던 사람들 다 쫓겨났으니까. 


  소년이 말했다. 모자장수는 시동을 걸었다. 차는 골목으로 서서히 이동했다. 


  


  젤리 먹을래?


  차 안을 단단하게 두르고 있던 침묵을 깬 사람은 하트여왕이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초콜릿이며 곰 모양의 젤리를 꺼내 늘어놓으며 말했다. 


  먹을 사람 없어?


  아무도 대답이 없자 그녀는 이로 젤리봉지를 뜯어 단번에 꽤 많은 양의 젤리를 질겅질겅 씹어 먹었다. 질겅질겅질겅질겅. 구주는 하트여왕을 매섭게 쏘아보며 생각했다. 기분 나쁜 여자야. 


  한동안 차 안은 젤리 씹는 소리만 들릴 뿐 고요했다. 침묵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모자장수가 라디오를 틀었다. 오래 전 해체한 밴드의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원더랜드, 원더랜드 같은 가사가 반복되는 브리티시 팝이었는데, 노래가 마음에 안 든다는 하트여왕 때문에 모자장수는 바로 라디오를 껐다. 구주는 침울한 표정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타워크레인과 아직 완공되지 못한 고층빌딩의 골조물이 길을 따라 음산하게 늘어서 있었다.  


  여기 세워주세요. 


  토끼소년의 말에 모자장수는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토끼소년은 차가 멈추자마자 차창을 열고 담배를 피웠다. 연기가 뒷좌석까지 왔다. 하트여왕의 얼굴이 금세 일그러졌다. 


  여기부터 걸어가야 돼요. 저 골목으로 들어가면 금방이에요. 


  소년은 필터를 빨다 주차장 왼편으로 나 있는 골목을 가리켰다.


  그건 가져왔죠?


  소년은 연기를 뱉고 모자장수에게 물었다. 


  모자장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보스턴백에서 청 테이프와 휴대용 버너, 번개탄을 꺼내 보여줬다. 


  창문은 밀폐시켜야 돼. 그래야 실패하지 않으니까.  


  모자장수는 청 테이프를 길게 뜯으며 자살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이렇게 오 분에서 십 분이야. 오 분에서 십 분. 그거면 돼. 단순하지.


  그는 손가락을 쭉 펴 5와 10을 만들어 보인 뒤, 하트여왕을, 토끼소년을, 그리고 구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물론 정확한 건 아냐. 위키피디아에서 찾은 방법이거든. 


  모자장수가 덧붙여 말했다. 그가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하트여왕은 다섯 번째 초콜릿 봉지를 뜯고 있었다. 그녀는 차 안에 단내가 풍길 정도로 계속해서 씹고 삼켰다. 


  이제 갈까요? 


  토끼소년이 담배를 차창 밖으로 던지며 말했다. 그들은 핸드폰을 걷어 콘솔박스에 넣어둔 뒤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상가는 깨끗하고 밝았다. 토끼소년은 본래 슬럼이던 곳을 새롭게 정비해 이렇게 꾸며놓았다고 했다. 광도가 높은 가로등이 상점을 따라 세워져 있었고 점포들이 말끔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몇 번인가 길가에 설치된 인형 뽑기 기계에서 기계음이 들렸는데,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구주는 섬뜩함을 느꼈다.  


  저기예요. 


  선두에서 걷던 토끼소년이 말했다. <토끼 굴>이란 간판을 단 이벤트 용품점은 상가 가장 끝에 자리해 있었다. 굳게 닫힌 셔터 아래 잔뜩 꽂힌 고지서며 전단지가 이곳이 오래전 인적이 끊긴 곳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토끼소년은 익숙한 솜씨로 셔터를 올리고 가게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은 쉽게 열렸다.


  근데 여긴 어떻게 안거야?  


  모자장수가 물었다. 


  형 가게였어요.


  토끼소년이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기가 끊겨서 어두울 거예요. 


  토끼소년이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모자장수와 하트여왕이 그 뒤를 따랐다. 구주는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도어락이 요란한 전자음을 내며 닫혔다. 가게는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구주는 손을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눅눅했다.  


  여기 앉죠.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말했다. 토끼소년 같았다. 그들은 서로의 목소리에 의지해 바닥에 앉았다. 토끼 소년이 주머니에서 지포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주변이 어렴풋이 보일만큼 환해졌다. 구주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가게 내부를 유심히 살폈다. 벽에 걸린 동물 가면과 바람 빠진 풍선 몇 개가 이곳이 이벤트 용품점이었다는 것을 가까스로 알려주고 있었다. 가게 한가운데 놓인 드럼통 하나를 제하면 가게 안은 발에 걸릴만한 가전이나 가구 하나 없이 휑했다. 모자장수가 조심스럽게 어둠 속을 돌아다니며 테이프로 창문을 밀폐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준비가 끝나길 기다리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재미있는 얘기 해줄까요?


  침묵 속에서 토끼소년이 말했다. 누구도 좋다고 하지 않았지만 소년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토끼 이야기예요. 토끼 굴을 짓고 근처에 클로버를 뿌려놓으면 토끼들은 서서히 그 맛에 길들여져요. 나중에는 클로버를 뿌리지 않아도 굴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가서 그걸 찾죠. 그럼 사냥꾼들은 그 멍청함을 비웃으면서 굴을 막고 불을 놓아요.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요? 


  뭔데. 


  하트여왕이 물었다.


  대부분의 토끼들은 질식하기 전에 굴 밖으로 뛰쳐나오는데, 어떤 토끼들은 굴 안으로 계속해서 파고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리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다 그 안에서 질식해 죽어요. 형 토끼든 동생 토끼든. 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하트여왕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더 이상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는 짐승들에 관한 이야기에요.


  그게 뭐야. 이상해. 


  이상해도 어쩔 수 없어요. 일종의 유언이니까. 이젠 고칠 수도 없어요. 


  구주는 토끼소년이 한 그 이야기를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어디서 들었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다 됐어. 


  모자장수가 자리에 앉았다. 다시 긴 정적이 감돌았다. 


  그럼 시작할까?


  모자장수가 물었고, 아무도 답을 하지 않았다. 모자장수는 잠시 망설이다 버너를 켜고, 불 위에 번개탄을 올려놓았다. 번개탄은 하얀 연기를 내며 천천히 타들어갔다. 


  기침 소리, 코를 훌쩍이는 소리, 헛구역질 하는 소리가 들렸다. 후우우, 구주는 열심히 연기를 들이마셨다.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심해로 서서히 가라앉는 납덩이가 된 것 같은 기분. 그런 기분을 느끼며 구주는 유언이랄 게 있다면 어떤 말을 남겨야 할까, 떠올려보았다. 떠올리다 그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치트키.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는 말을 중얼대며 구주는 하아아, 숨을 내쉬었다.     


  內 


   


  시뮬레이션 게임*에 설정된 내 캐릭터 닉네임은 구주였다. 어떤 닉네임을 붙여줄지 고심하다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내 이름을 붙였다.   


  [재미있는 게임이 있는데 해볼래요?]


  [@rabbit_boy 게임?]


  [마우스랑 스페이스 바만 사용하면 되는 간단한 게임이에요. 집 짓고 그 안에 사는 캐릭터 관찰하면서 노는 게임.]  


  토끼소년이 보낸 멘션 때문에 시작한 게임이었다. 토끼소년은 간단하다고 했지만 캐릭터 닉네임을 정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토끼소년이 일러준 대로 캐릭터의 피부색을 설정하고, 옷을 입히고, 살 집을 꾸미고, 성격과 신분을 정했다. 성능이 좋지 않은 컴퓨터는 캐릭터를 설정하는 와중에도 종종 기능을 멈췄다. 모니터에 노이즈가 떠오를 때마다 나는 자판을 거칠게 두드렸다. 모니터 속 ‘구주’는 지그재그로 일그러지다 천천히 원 상태로 돌아왔다. 


  망했네.  


  오류가 해결되고 원상태로 복구된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구주’는 애초 내가 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죠.]


  사정을 설명하자 토끼소년은 그런 멘션을 보냈다. 


  [그런 상황이라면 새로 캐릭터를 만들어도 소용없을 거예요. 하드웨어의 문제니까.]


  하드웨어의 문제. 


  토끼소년의 멘션을 소리 내 읽으며 나는 잘못 설정된 캐릭터를 그냥 키우기로 했다. 캐릭터는 기본 아이템만 겨우 장착했을 뿐 헐벗은 상태에 가까웠고 재산도 거의 없었다. 거주지도 원룸에 가까울 정도로 좁았고, 신분은 종업원에 머물러 있었다. 게임 내 다른 캐릭터들이 집을 마련해 결혼을 하고, 승진을 거듭하는 동안 ‘구주’는 기본 아이템으로 제공된 티셔츠 몇 장을 돌려 입으며 지루한 출퇴근을 반복하고 쉬는 날에는 인스턴트를 먹으며 하루 종일 테트리스만 했다.


  [치트키가 있어야 돼요.]


  [@rabbit_boy 치트키?]


  [일종의 프리패스권이죠. 그걸 사용해야 레벨 업도 하고, 각 퀘스트도 간단히 클리어 할 수 있거든요.] 


  토끼소년의 멘션처럼 치트키가 있어야 캐릭터에게 결혼도 시키고, 애견도 키울 수 있는데 나는 그걸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랐다. 캐릭터는 내가 조정하지 않아도 카페테리아에서 밤낮없이 일하고 휴일엔 종일 테트리스만 하는 일상을 자동적으로 반복했다. 취미도, 취향도 없었다. 진급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살아냈다. 


∞ 


  주민 센터의 사회복지 담당자는 대화 내내 볼펜 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톡톡톡.


  그러니까, 오 개월 후에 군 입대를 한다는 얘기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기초수급지원을 받겠다는 거고.


  네. 


  그전까지는 국비지원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고.


  네.


  골치 아프네 이거.


  담당자는 자기 앞에 있던 서류를 내게 내민 다음, 볼펜으로 동그라미 친 부분을 가리켰다. 빨간 동그라미 안에 ‘금융정보동의서’ 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김구주 씨. 기초수급지원을 받으려면 보호자의 금융정보동의서가 필요해요. 보호자가 동의서를 작성해주지 않으면 신청이 되지 않거나 자동적으로 취소 돼요. 내 말 알겠어요?


  네.


  하지만 김구주 씨처럼 부모가 오래전 이혼해서 지금까지 혼자 살았고, 부모와 연락도 없고 왕래도 없으면 가족단절 사유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면 돼요. 부모에게 어떠한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받지 않았다면 채택이 되고, 김구주 씨는 기초수급지원을 받을 수 있어요. 근데 그것도 입대 전 오 개월 정도까지만 가능하고, 제대 후엔 삼 개월 유예를 두고 기초수급자에서 탈락될 거예요. 


  왜요?


  법이 그래요. 법이.  


  담당자는 이번에는 볼펜심을 들어 책상을 콕콕 찍었다. 책상 위에 빨갛고 작은 점들이 생겨났다. 


  보호자에게 연락해서 동의서를 받는 방법밖엔 없어요. 


  …… 연락처가 없는데요?


  담당자는 내 눈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다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럼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담당자는 보육원에 가보라고 했다. 그곳에서 부모의 연락처를 구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했다.


  개인정보 열람은 본인 동의 없이는 불가해서요. 


  볼펜을 톡톡 두드리며 담당자는 말했다. 보육원은 인천에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열아홉까지 살았다.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이었다. 오후쯤 보육원에 들러도 되겠냐는 내 전화에 원장수녀는 흔쾌히 시간을 비워놓겠다고 했다. 


  오랜만이죠? 미카엘.  


  원장수녀는 말했다. 그녀는 의문형으로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네. 오년 만이에요. 


  나는 대답했다. 내 세례명은 미카엘이 아니라 타대오였지만 굳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도착하기 전에 연락하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빈손으로 갈 수는 없어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대형마트 안은 환하고 넓었다.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카트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을 피해가며 수입식품 코너와 주류 매대를 지나 선물세트 코너에서 멈춰 섰다. 매대에 종이박스로 포장해놓은 홍삼세트며 유기농 아사이베리, 무슨 베리하는 원액주스 세트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어떤 것은 3만 원쯤 했고, 어떤 것은 5만 원이 넘었다. 이런 걸 골라보긴 처음이라 한동안 그곳에 서서 가격을 비교해보았다. 그래도 오년만인데, 하며 아사이베리를 집어 들다 결국에는 가장 싼 오렌지주스 세트를 골랐다.  


  전철이 흔들릴 때마다 주스 병이 서로 부딪히며 찰캉, 하는 소리를 냈다. 차창 밖에서 햇볕이 들어와 전철 안은 밝고 따뜻했다. 시시때때로 바뀌는 빛의 각도와 질감을 관찰하다 나는 통장잔고를 확인했다. 


  37,190원. 


  남아 있는 돈은 이제 그것뿐이었다. 


  삼만 칠천 백구십. 


  잔고를 다시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그것뿐이었다. 마전역에 들어서자 전철은 지하로 빠르게 내려갔다. 주스 병이 흔들리며 찰캉, 하는 소리가 났다.  


  원장수녀의 방에서는 늘 매캐한 냄새가 났다. 미카엘은 그게 담배냄새라고 했다. 네가 그 걸 어떻게 아냐. 물으면 미카엘은 내 머리를 가볍게 쳤다. 그런 게 있어. 새끼야. 


  원장수녀의 방에서는 여전히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나는 원장수녀에게 주스 상자를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소파 옆에 놓은 다음,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앞니는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원장수녀는 내게 이런저런 안부를 물었다. 


  우리 미카엘이 지하철 공사에서 일하게 되었다구요? 


  네. 


  아주 대견해요. 다른 수녀님들께도 알렸더니 다들 제 일처럼 좋아하셨어요. 


  네.  


  미카엘은 지난 봄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 전동열차에 치여 죽었다. 그건 나만 알았다. 보육원을 떠나서도 그 애와 연락하는 건 나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미카엘이 왜 나를 찾아왔을까요? 


  원장수녀가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편하게 말해보세요. 


  …… 연락처가 필요해서요. 


  연락처? 누구의?


  저를 낳아준 사람 연락처요.   


  내 말에 원장수녀는 팔짱을 끼었다. 그녀는 그대로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긴 정적이 흘렀다. 


  미카엘은 갑자기 왜 그런 게 필요할까요? 


  원장수녀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등에 있는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두 달 전 봉합한 상처는 흉이 져 커다란 자벌레처럼 변해버렸다. 흉터를 쓰다듬으며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생각했다. 배달 제한시간을 지켜야 해서 늘 신호를 어기며 차와 차 사이를 위태롭게 지나던 것을, 차와 충돌한 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배달에 늦을까 내내 시간을 확인했던 것을 말한다면 원장수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미카엘이 사고로 죽은 봄에 내가 일하던 패스트푸드점에서는 17분 30초 배달 제라는 것을 처음 도입했다. 사장은 다른 체인점보다 10분이나 단축된 배달 제라는 것을 재차 강조하며 뿌듯해했다.     


  그러니까 우린 남들보다 빠르게 달려야 한다고. 알지? 


  사장은 말했다. 음식이 완전히 조리되어 나오는 시간은 8분. 나는 늘 9분 안에 배달을 완수해야했다. 배달료는 400원이었고, 시간이 조금이라도 초과되면 그걸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거기에 대응하거나 불복한 적은 없었다. 지침이 그랬으니까. 그저 그걸 따랐다. 


  그날은 비가 왔다. 두 시간동안 쉴 새 없이 주문이 들어왔고, 새로 들어온 파트타이머가 주문을 잘못 받은 탓에 같은 곳을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해야 했다. 나는 유니폼 위에 우비를 걸치고 속도를 내 달렸다. 배달을 완수해야하는 시간까지 5분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빗물에 스쿠터 바퀴가 자꾸 헛돌았다.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에서 나는 속력을 냈다. 아우디는 우측에서 달려와 순식간에 나를 들이받았다.    


  아우디는 내가 타고 있던 스쿠터와 부딪히며 앞 범퍼가 찌그러지고 휠이 파손되었다. 차주는 수리비 1700만원과 부품비 2500만원이 청구된 영수증을 내게 들이밀었다. 일부 비용은 본사에서 배상해주었지만 나의 병원비와 일부 청구금액은 개인의 과실로 처리되어 온전히 내가 부담하게 되었다. 사장은 내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 즈음 해고 통지 문자를 보냈다. 나는 손등에 붙인 습윤 테이프를 떼었다 붙였다하며 사장이 보낸 문자를 읽었다. 어쩔 수 없었다. 문자 말미에는 그런 말이 적혀 있었다. 몇 번 떼었다 붙였다 반복하니 테이프는 접착력을 잃어버리고 금세 너덜거렸다. 그날 밤 나는 열아홉 바늘을 꿰맸다. 손등은 여섯 바늘, 길게 찢어진 이마는 열 세 바늘. 손등의 흉터를 만질 때마다 커다란 자벌레가 꿈틀대는 것 같았다.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지 한참을 생각하다 나는 원장수녀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원장수녀는 팔짱을 푼 다음,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카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일이 미카엘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일은 분명하죠? 


  네.


  알겠어요. 찾아보겠어요. 


  감사합니다. 


  원장수녀는 자신이 인적사항이 적힌 서류를 찾는 동안 잠시 보육원을 산책하고 오면 어떻겠냐고 청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엘.


  원장실을 나가려는 나를 향해 그녀는 소리쳤다.


  미카엘의 본명이 뭐였죠?


  …… 김구주입니다.    


  맞아요. 구주. 미카엘의 본명은 구주였죠. 잠시 생각이 안 났어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내 세례명은 미카엘이 아니라 타대오, 라는 말은 끝까지 할 수 없었다.   


  


  휴게실은 조용했다. 몇몇 애들은 낮잠을 자고, 몇몇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차렵이불 밑으로 빠져나온 아이들의 발 위로 햇빛이 고요하게 흘러갔다. 낮잠을 자는 애들이 낮게 코를 골고 몸을 뒤척이는 소리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애들이 종알대는 소리가 방안을 맴돌았다. 


  원장수녀의 부름을 기다리며 나는 휴게실 의자에 앉아 트위터를 했다. 유명한 정치평론가의 트위터에 분신시도 후 3도 화상을 입고 중태에 빠진 자영업자에 대한 기사가 링크되어 있었다. 많은 트위터리안이 그 글에 하트를 보내고 공유했다. 나는 링크를 열어 기사를 읽었다. 그 남자는 방송을 몇 번 타며 명소로 번성하게 된 동네에서 상점을 운영했는데, 계약만료가 2년이나 남은 시점에서 임대료가 폭등했고 누구에게 따질 새도 없이 쫓겨났다. 그 남자는 전기도, 수도도 끊긴 가게에 몰래 들어가 밥을 지어먹고 잠을 자며 한 달을 버텼다. 그런 식의 기사를 조금 읽다 말았다. 다 읽지 않아도 뻔했다. 그런 일은 흔했고 죽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평론가의 트윗에 달리는 하트는 계속 늘어났다. 한창 트위터를 살피는데 알림이 울렸다. 토끼소년의 트윗이었다. 최근 타임라인에는 유명한 생존 전문가의 유튜브 영상이 링크되어 있었다. 나는 영상을 재생했다. 생존전문가는 토끼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는 좁은 굴에 먹이를 뿌려놓고 그 안으로 토끼들을 몰았다. 대여섯 마리의 토끼가 쏜살같이 굴 안으로 들어갔다. 토끼들이 모두 굴 안으로 사라지자 생존전문가는 부싯길에 불을 붙이고, 그걸 굴 안에 던졌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토끼 네 마리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얀 연기를 일으키며 타들어가는 굴을 잠시 지켜보다 생존전문가가 말했다.       


  보통 사냥꾼들은 토끼 사냥을 할 때 굴을 만들고, 토끼들을 그 안에 몬 다음 불을 놓습니다. 대부분의 토끼들은 이 놈들처럼 연기에 질식해 굴을 뛰쳐나오죠. 그런데 그렇지 않은 놈들이 있습니다. 그런 놈들은 굴 깊숙이 점점 파고들다가 그 안에서 죽습니다. 


  그는 굴을 무너트려 불을 끄고, 흙더미 안에서 까맣게 탄 토끼 두 마리를 꺼냈다. 죽은 토끼의 귀를 붙든 채 그는 카메라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알 수 없는 놈들이죠. 


  영상은 그렇게 끝났다.


  한창 그렇게 트위터를 보는데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애 중 한 명이 난데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싸움이 있었던 모양인지 발밑엔 장난감이 부서져 있었고, 왼쪽 이마와 뺨이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한 명이 엄마를 부르며 울자 나머지 애들도 따라 울었다. 엄마, 엄마. 조금 있으니 낮잠을 자던 아이들도 깨어나 엄마, 엄마 부르며 울었다. 나는 애들을 달랠 생각도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이런 상황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슬프지 않았으니까. 미카엘과 친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모두가 엄마 소리를 하며 울 때마다 우리 둘은 울지 않았으니까.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미카엘은 웃었다. 보란 듯이 웃었다. 엄마가 어디 있냐고. 웃기지 말라고. 미카엘은 소리쳤다. 같은 음을 내며 우는 아이들 틈에서 나와 미카엘은 다른 음을 내 합창을 망친 애들처럼 웃고 소리 질렀다. 휴게실에 있는 아이 중에도 울지 않는 애가 있었다. 눈이 크고 이마가 넓은, 원숭이를 닮은 남자애였다. 그 애만 빼놓고 나머지는 엄마, 엄마 부르며 울었다. 남자애는 우는 애들 틈에 혼자 멀거니 앉아 있다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바닥에 앉아 있는 남자애를 내려다보았다. 남자애도 나를 보고 있었다. 나와 그 애는 잠시 그렇게 서로 마주보았다. 남자애의 눈이 흔들렸다. 깊고 검은 눈. 그 눈을 빤히 보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야, 엄마 같은 게 어디 있냐.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남자애는 우는 애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웃었다. 남자애가 웃을 때마다 하얀 덧니가 드러났다 사라졌다.


  원장실에 들어가자 원장수녀는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건넸다. 052로 시작되는 번호였다. 052로 시작되는 곳은 어딜까. 어딘지는 몰라도 내가 가보지 못한 곳임은 분명했다. 두 번의 수학여행을 제하곤 서울과 인천 외곽으로 나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통화는 이곳에서. 


  원장수녀는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나는 원장수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다이얼을 눌렀다. 


  어떤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전화를 받을까. 여자일까. 남자일까. 그들에게 나를 누구라고 설명해야할까. 무엇보다 동의서에 대해서 어떤 말부터 꺼내야할까. 원장수녀에게도 못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할 수 있을까. 그들은 나를 이해해줄까. 잠시 생각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발신음이 두어 번 울리더니 곧 없는 번호라는 안내음성이 들렸다. 연이어 세 번 더 전화를 걸어봤지만 똑같은 안내음성만 반복될 뿐이었다. 


  다른 번호는 없나요?


  찾아봐도 그것뿐이었어요.


  원장수녀가 말했다.


  …… 정말 없어요? 주소는요?


  원장수녀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다 팔짱을 끼었다. 


  미카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어요.  


  원장수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복도는 길고 어두웠다. 북향으로 붙박이창이 나 있었지만. 개폐장치 없이 틀에 고정되어 있어 여닫을 수가 없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음식냄새와 화장실의 악취가 섞인 불결한 냄새가 났다. 


  미카엘. 


  원장실을 나서는 내게 원장수녀는 말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어둡고 긴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다 나는 몸을 틀어 다시 원장실로 향했다. 


  미카엘? 두고 간 게 있나요? 


  원장수녀는 당황한 듯 물었다. 원장수녀의 손에 타다 만 담배가 들려 있었다. 나는 원장수녀를 빤히 바라보다 소파 옆에 놓인 오렌지주스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걸 집어 들고 도망치듯 그 방을 나왔다. 복도는 어둡고 길었다. 유리병이 부딪힐 때마다 찰캉 찰캉, 하는 소리가 났다.     


  ∞


  주스 상자에는 오렌지주스 병이 열두 개 들어 있었다. 나는 유리병에 든 주스를 하나하나 따 마시며 게임을 했다.


  ‘구주’는 여전했다. 진급도 하지 않았고, 돈이 들어갈 만한 취미를 가지지도, 연애도 하지 않았다. 월급을 받아도 청구액을 지불하면 남는 게 없었다. 캐릭터는 여전히 퇴근 후 집에 돌아가면 인스턴트를 먹으며 테트리스를 했다.


  [@rabbit_boy 조리대를 더블클릭하면 캐릭터가 직접 요리도 해요.]


  토끼소년의 멘션에 따라 조리대를 더블클릭해보았다. 


  [스크램블드에그 $3] [달걀 토스트 $4] 


  하는 파란 말풍선이 조리대 위에 나타났다. 조금 고민하다 스크램블드에그를 선택했다. 화면에 프라이팬이 나타나고 ‘구주’는 천천히 요리를 시작했다. ‘구주’가 달걀을 집어 들자 느닷없이 조리대가 불타기 시작했다. 불은 삽시간에 프라이팬에서 조리대에 옮겨 붙었다. 나는 자판을 거칠게 두드렸다. 화면에 노이즈가 나타나더니 ‘구주’의 얼굴이 지그재그로 비틀렸다. 더 세게 자판을 두드렸다. 노이즈가 사라지고 원상 복구된 화면을 보며 나는 잠시 흠칫했다. 캐릭터는 그세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불에 타버린 조리대 앞에 서 있는 늙은 ‘구주’를 보며 나는 무얼 잘못 눌렀는지 생각했다. 생각해보고 생각해보다 그만두었다.


  지겨워. 


  여전한 건 지겹다고, 나는 생각했다. 게임 설정에 들어갔다. Delete 폴더는 설정 맨 하단에 있었다. 게임을 처음 다운로드할 때는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삭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진행되었다. 게임을 완전히 지우겠냐는 팝업창을 바라보며 나는 주스를 들이켰다. 주스는 이제 네 병밖엔 남아 있지 않았다. 주스를 삼킬 때마다 오렌지의 시고 쓴 맛이 침과 함께 고였다 사라졌다.  


  囚 


  토끼소년은 하아아, 깊은 숨을 내쉬며 깨어났다. 가게 안을 떠도는 매캐한 연기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바싹 마른 입술을 핥으며 소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번개탄은 반쯤 타다 만 채 가스버너 위에 놓여 있었다. 토끼소년은 버너의 커버를 열고 부탄가스를 꺼내 흔들어보았다. 가스가 빠진 부탄은 가볍게 흔들렸다. 소년은 부탄을 집어던졌다. 부탄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소음이 났지만 하트여왕과 모자장수, 구주는 움직이지 않았다. 소년은 그들을 차례로 흔들어보았지만 그들은 미동도 없었다.   


  목말라. 


  말을 할 때마다 토끼소년의 입에서 구취가 풍겼다. 소년은 가게 안을 뒤지고, 이어서 누워 있는 사람들의 짐을 뒤졌다. 모자장수의 보스턴백에 먹다 남은 생수가 들어 있었다. 물은 미지근했고, 소년의 입술을 겨우 축일 정도로 양이 적었다. 소년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가게 안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와 세면대에는 구정물이 말라 불그스름하게 착색된 흔적이 있었고, 거울은 깨져 있었다. 깨진 거울에 비친 소년의 얼굴은 일그러져 보였다. 따뜻한 물로 입을 헹구고, 몸 이곳저곳을 씻고 싶었지만 수도꼭지를 끝까지 돌려도 물은 나오지 않았다. 파이프로 물이 넘어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단수가 된지 두 달째였다. 소년은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기다리며 형을 떠올렸다.  


  죽기 며칠 전까지 형은 소년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소년은 의사에게 물을 줘도 되는지 물었지만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돼요. 기도가 막혀서 죽을 수도 있어요. 


  전신화상을 입은 형의 몸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유일하게 붕대를 감지 않은 곳이 입이었다. 각질이 덮인 입술을 달싹이며 형은 목말라. 목말라. 반복해서 말했다. 형이 입을 뗄 때마다 탄내가 났다.


  토끼소년은 수도꼭지에 대고 있던 입을 뗐다. 기다려도 물은 나오지 않았다. 빗물이라도 고여 있을까싶어 소년은 화장실 구석구석을 살폈다. 화장실 문 뒤편에 잎이 검게 시든 행운목이 방치되어 있었다. 이 가게를 개업했을 때 소년의 형이 사온 식물이었다.


  웬 화분이야? 


  소년이 물었을 때 형은 말했다. 


  그냥. 티비에서 보니까 다들 이런 거 하나씩은 놓고 살더라. 좋아보여서. 


  소년은 몸을 숙이고 행운목을 바라보았다. 다섯 개의 잎은 모두 끝이 갈라져 있었다. 물을 흠뻑 주고 싶었지만, 그곳엔 소년이 마실 물조차 없었다. 소년은 오래간 침을 모은 뒤, 행운목에 뱉었다. 맑은 타액이 부엽토 안으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소년은 화장실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여전히 미동 없이 누워 있었다. 소년은 누워 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건너뛰었다. 체육시간에 했던 놀이와 닮아 있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킥킥 웃었다. 


  생각해보면 체육시간은 괜찮았어. 


  하트여왕의 머리를 건너뛰며 소년은 중얼거렸다. 


  음악시간도. 


  소년이 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탁,탁 하는 둔탁한 소리가 실내에 맴돌았다. 구주의 머리를 건너뛰는 순간, 소년은 잠시 휘청댔다. 단단하고 작은 그 머리를 밟고 넘어질 뻔 하다 소년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그래도…… 어른 같은 건 되지 않을 거야. 


  누워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소년은 중얼댔다. 소년은 유리문으로 다가갔다. 문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바람이 불때마다 모자장수가 허술하게 붙인 청 테이프가 너덜거렸다. 소년은 문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거리는 밝고 깨끗했다. 스타벅스, 아메리칸 어페럴, 맥도날드……. 같은 건물들이 포장이 잘 된 선물처럼 늘어서 있었다. 다만 거리 곳곳에 남아 있는 토끼 굴 때문에 완벽하다는 느낌은 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아직은 완벽하지 못한 거리에 클로버를 뿌렸다. 그들이 클로버를 뿌릴 때마다 여기저기 숨어 있던 토끼들이 튀어나왔다. 토끼들은 클로버를 두 볼 가득 오물거리며 토끼 굴 안으로 들어갔다. 


  한 사람이 <토끼 굴> 문에 서 있는 토끼소년을 가리키자 다른 사람들도 그쪽을 돌아보았다. 토끼소년과 눈이 마주치자 사람들은 웃었다. 그들은 불을 붙인 부싯길을 들고 소년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이 웃을 때마다 날카로운 덧니가 얼핏 보였다.  


  토끼소년은 문 앞에 서 있다가 여러 개의 머리를 건너뛰어 자신이 조금 전까지 누워 있었던 그 자리로 천천히 돌아왔다. 소년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 가게 안은 어둡고 고요했다. 이제는 딱딱하게 굳은 하트여왕, 모자장수, 구주의 옆에서 토끼소년은 후우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고, 소년이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 제37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 당선소감


지난여름, 군입대를 앞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잠시 시간을 내어 구의역에 들렀다. 


1-1부터 10-4까지. 역내 스크린도어 앞을 내내 왔다 갔다 했다. 그곳은 너무나 깨끗했다. 아직 사고가 일어난 지 반년도 안됐는데 사람들이 붙여놓았던 포스트잇도 다 떼어버리고, 마치 사고현장이 아닌 것처럼, 그곳에서 누구도 죽지 않은 것처럼 말끔했다. 허탈하면서도 슬펐다. 그런 감정밖에는 느낄 수가 없었는데 날은 정말 좋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름답고 평온해서 이상했다. 


겨울에 「토끼 굴」을 쓰고 여태 두세 번 고쳤다. 루이스캐럴의 ‘앨리스’는 이상한 세계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토끼소년은 어두운 토끼 굴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했다. 


소설을 쓰고 고치는 시간 내내 죄스러웠다. 행복하길 바랐는데 나는 또 소설 속 인물들을 아프게 만들었다. 


당선소식을 듣기 몇 주 전, 꿈에 할머니가 나왔다. 꿈에서 우리는 오래도록 대화를 주고받았다. 얕은 잠을 자다 깨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할머니가 내게 하고, 내가 할머니에게 했던 말은 확연하게 기억난다. 


잊지 않을게요. 우리는 같이 그런 말을 주고받았다. 


잊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을 기억하며 오래오래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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