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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가작(1) - 열시의 안부

  • 작성자 : gokmu
  • 작성일 : 2017-06-07 08:57:44

 ● 제37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가작 -  열시의 안부

열시의 안부

송우언 (한양대학교•응용시스템•4)


따르릉―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가 영감의 아침을 깨웠다. 영감은 그저 낡은 이불 한 귀퉁이 사이로 얼굴을 내밀어 벽 왼쪽 구석에 걸려있는 시계를 노려보았다. ‘또 같은 시간이군.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이냐고, 내 참.’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곗바늘은 오전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문풍지를 덕지덕지 바른 창문 사이로는 어스름 햇살 한 줄기가 비치고 있었다. 그랬다. 이 전화는 생전 울리지 않고 먼지만 쌓여가다 언제부터인지 아침 열 시만 되었다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울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 전화가 처음 울린 것은 아마 삼주 하고도 닷새 전이었을 것이다. (영감의 기억력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몇 년 만에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소리가 낯설어 쉽사리 전화를 받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그에게 도대체 누가 전화를 한단 말인가? 다른 한편으로는 아침 열 시에 불현듯 울려대는 것만으로 무언가 수상쩍었던 것도 있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에게 이 시간에 따로 올만한 연락은 없었다. 행여 있다고 해도 정말 급한 것이라면 두어 번, 아니 적어도 한번쯤은 더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전화벨은 딱 한번 울린 이후 그날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다음날부터 시곗바늘이 열시만 가리켰다하면 전화는 어김없이 걸려왔는데, 이것은 굉장히 의심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영감은 내심 속으로 이것이 꼭 풀어야만 하는 수수께끼인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답을 알기 전에는 쉽게 전화를 받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진 어떻게든 버텨보자는 것이 영감의 생각이었다. ‘이상한 놈들의 수작이 틀림없어.’ 그는 라디오에서 한참을 떠들던 중국인인가, 연변사람들이 한다던 전화로 하는 사기짓거리들을 떠올렸다. 물론 그는 그런 수작에 넘어갈만한 깜냥이 아니라고 자부했지만, 혹여나 그놈들이 지껄이는 것을 듣다 자기도 모르게 휩쓸릴만한 기회조차 만들기 싫었다. 이 이상한 전화는 주말에는 걸려오지 않았는데, 그는 그 수상쩍은 놈들도 주말에는 쉬는 모양이라고 넘겨짚었다. 시끄럽게 울려대던 전화는 이내 곧 잠잠해졌고 적막하고 무거운 고요함만이 실내의 공기를 짓눌렀다. 입춘을 한참이나 넘겼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퍽이나 쌀쌀한 날씨 탓에 영감은 쉽사리 이불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눈만 말똥말똥 떠서는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생각이라고 해봤자 실체 없는 희뿌연 망상에 불과했지만, 그런 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는 정말로 말을 잊어버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긴 시간을 혼자서 지내며 친구하나 없이, 일거리하나 없이 집에서 웅크려있는 것만이 그에게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누워있자니 곧 허기가 밀려왔지만 그나마 집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누렇게 쉬어버린 김치 한 덩이와 딱딱하게 굳어버린 밥 몇 술, 그리고 어제 저녁 다 못 마신 막걸리 반통이 전부였다. 그것을 떠올리니 그나마 남아있던 입맛조차도 이내 가시는 듯했다. 그래도 다행히 날이 찬덕분에 막걸리 반통은 상하지 않고 남아있어, 오늘 저녁엔 비울 수 있을 듯 했다. 영감의 하루는 늘 이런 식이었다. 아침마다 걸려오는 그 괴이한 전화 한통을 제외한다면, 그저 낡아버린 회중시계처럼 간신히 굴러가는 것이 끝이었다. 집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이 초라한 단칸방에는 텔레비전은 물론이거니와 냉장고와 같은 가전기기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점점 줄어드는 생활비 탓에 수년전 고물상에 전부 팔아치웠기 때문이었다. 몇 해 전부터 시작된 지긋지긋한 허리통증을 잠시나마 삭히려면 근처 병원에라도 나가 진통제라도 맞아야했는데, 그 진통제라는 것이 꼭 생수통같이 생겨서는 작은 것 하나에도 가격은 더럽게 비싼 것이었다. 하지만 딱히 이렇다할만한 돈벌이가 없던 영감은 그 약값을 대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집에 남아있던 잡동사니들을 하나하나씩 팔아치워야 했고, 결국 남아있는 것이라곤 큼지막하고 낡은 라디오 하나와 먼지 쌓인 전화기 한대가 전부가 된 것이다. 라디오는 유일하게 그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가족 하나 없이 혈혈단신으로 살아온 것도 이미 몇 십여 년, 그는 이제 외로움과 같은 감정은 느끼지도 못했다. 아니, 어쩌면 혼자 근근이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것이 외로운 것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것 일수도 있었다. 그래도 낡은 라디오에서 세상 돌아가는 소리라도 들릴 때면, 그는 더 이상 쓸쓸하지 않았다. 그리고 먼지가 수북이 내려앉은 이 전화기 한대는 혹시나 하는 염려 때문에 팔지 못한 것이었는데, 그가 행여 갑자기 크게 아프기라도 한다면 (그는 언제든 아픈 것이 이상하지 않을 만큼 머리가 희끗 새고 나이가 들어있었다.) 급하게 119라도 부를 작정이었다. 이렇듯 영감에게는 이 작은 단칸방에 틀어박혀 끼니를 겨우겨우 때우면서 언제 죽을지 걱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루의 전부였다. 허리 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고, 가끔씩은 통증이 꽤나 심해지는 탓에 이제는 폐지를 줍는다던가 하는 소일거리조차 못하게 되었으니 이불 속에 틀어박혀 낡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방송들이나 몇 시간쯤 들으면서 미지근한 전기장판 위에서 잠들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면 이내 하루가 저무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나라에서 적게나마 매월 나오는 돈 몇 푼과 몸뚱이 하나 뉘일 수 있는 방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기 밖에서 신문지나 덮고선 누워있는 부랑자들에 비하면 자기는 꽤나 성공한 편이라고까지 느꼈다. 그는 밖에서 구걸이나 하면서 생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굉장히 멸시했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족속들.’ 그는 그들과 마주칠 때면 늘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어쨌든 자기는 적어도 누군가에게 빌붙어서 살아가고 있진 않지 않은가. 계속해서 이불 속에서 뒤척거리던 영감은 결국 치밀어 오르는 허기를 이기지 못해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추운 날씨와 습기 탓에 곰팡이 냄새가 눅눅히 스며들어 퀴퀴해진 누빔 점퍼를 단단히 걸쳐 입고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이 건조하게 부르튼 피부에 아프게 스치었다. 그는 대문 앞에 뻗어있는 골목을 뺑 돌아서면 있는 자그마한 동네 구멍가게로 향했다. 거기서 두 개들이 이천팔백 원 하는 우유를 살 요량이었다. 안쪽 어금니 두 개와 앞니 하나가 삭아서는 저번에 툭, 하고 빠지고 말아 뭘 씹는 것도 힘에 겨워졌기에 우유를 식사삼아 잘근잘근 씹어 마시며 허기를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가게 주인은 나이가 마흔쯤 들어 보이는 사내였는데, 매일같이 검푸른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말수도 유난히 없어 손님이 들어와도 힐끗, 한번 보고는 돈을 건네받고 바로 고개를 넘겨버리곤 했다. 영감은 차라리 이런 것이 편했다. 괜히 시답잖은 안부나 물어보면서 친한 척 거짓으로 슬슬 웃어재끼는 것보다야 이렇게 할 일만 하는 것이 서로 성가시지 않다고 느꼈다. 그래서 유일하게 밖에 나서면 들르는 곳이 이 곳인지도 몰랐다. 가게에서 들고 나온 우유 두개가 담긴 까만 비닐봉지 하나와 손에 움켜쥔 동전 두어 개는 그의 꼴을 더욱 처량하게 자아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며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친 젊은 새댁 하나는 그에게 악취라도 난다는 듯이 코를 씰룩 거리며 아이의 손을 잡고선 다른 길로 냉큼 돌아섰다. 영감은 그런 여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고 녹슨 대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자신의 방이 있는 구석 모퉁이로 향했다. 싸늘한 바람에 차갑게 식어버린 외투를 구석에 던져 놓고선, 사온 우유는 봉지에서 꺼내 방 귀퉁이에 조심히 세워두었다. 그리고는 우유 한 잔을 컵에 따라선 천천히 씹어 마셨다. 그렇게 겨우 허기를 채운 그는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는 투박하고 큰 라디오에서 긴 안테나를 쭉 뽑아 창가 쪽으로 대 놓으며 이리 저리 주파수를 맞췄다. 그는 이내 잔잔한 음악소리와 쇳소리가 섞여 들리는 선율에 빠져서는 야윈 몸을 이불 속에 감춘 채 잠이 들어버렸다.
 오늘도 같은 시간, 전화벨은 어김없이 요란하게 울리며 영감의 단잠을 깨웠다. 오늘따라 그 소리에 유난히 짜증이 치밀어 오른 그는 잠시 전화를 받아 고함이라도 질러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그것을 관두었다. 문제가 생기면 골치 아파지는 것은 결국 자신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제저녁 남아있던 막걸리 반통을 다 비워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왔다. 예전에는 술이라면 환장을 하고 달려들었지만,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에는 막걸리 반통에도 거하게 취해버리곤 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따라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은 것만 같은 기분이 계속해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뭘 하려고 했던 거지?’ 영감은 속으로 계속해서 되물었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최근 들어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건망증이라는 것이 해가 지날수록 점점 심해지는데다가, 가끔씩은 멍하니 벽 귀퉁이 한곳만 바라보고 앉아있다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린 적도 있었다. ‘행여 치매라도 걸리는 것은 아니겠지.’ 영감은 가슴속에서 스멀스멀 피어나오는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아파도 누구하나 도와줄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것을 떠올리니 불현듯 아주 서러워졌다. 평소에는 전혀 그런 것에 운운하지 않는 그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약해지는 몸과 초라한 방구석에 홀로 앉아있을 때면 자신이 애처롭게 혼자서 겨우겨우 숨만 쉬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곤 했다. 그런 자신이 후에는 누군가 모르는 이들에게 빌붙어서 겨우겨우 생명을 구걸해야만 한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치매 걸린 노인들을 볼 때면 늘 무시하던 사람이 바로 자신 아니었는가. 그는 그들이 아주 우둔하기 때문에 그런 병에도 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떻게 된 사람들이 자기 가족조차 몰라본단 말인가. 그의 상식선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우둔하지 않았다. 지금껏 아등바등 살아온 것도 그랬고, 나이가 들어서 허리 병이 도지기 전까지는 늘 허드렛일이라도 마다않고 해내던 그였다. 생전 누구에게 손 한번 벌린 적 없지 않았는가. 그런 자신은 독하다면 독했지, 우둔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 그런 것은 평소에 아무것도 안하고 멀뚱멀뚱 놀기나 하던 인간들이나 걸리는 것이야.’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걱정이 슬그머니 들어, 결국 구석에 놓여있던 낡은 신문조각을 가지고 왔다. 몇 해가 지난 것이라 누렇게 변색이 되었고, 그마저도 막걸리 몇 방울이 튀어서는 까맣게 마른 흔적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그것이 유일하게 이 방에 있는 읽을거리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거꾸로 읽어보기도 하고, 글자 맞추기도 해보면서 오후까지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소일거리라도 하고나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아침부터 자신을 괴롭혔던 무언가를 잊은 것 같은 찜찜함은 멈추지가 않았다. 그는 결국 천 원짜리 두 어장을 들고선 퀴퀴하게 묵은 외투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이렇게 기분이 울적하거나 답답한 날이면 그는 막걸리 한통을 사다놓곤 나누어 마시곤 했다. 막걸리를 사올 때면 이런 사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것이 우유가 두 개들이 이천팔백 원하는 것에 비하면 막걸리는 한 통에 이천 원이나 가까이해서 턱없이 비싸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이렇게 이틀을 연이어서 마신다니, 다음 주에는 돈을 더욱 아껴야만 이번 달을 버틸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영감은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지체하며 들어가기를 잠시 주저주저했다. 하지만 이내 발걸음을 다시 땐 그는, 오늘은 마음 한편이 계속해서 답답하고 신경이 쓰이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라며 속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늘 가는 골목길 구석 구멍가게에서 막걸리를 사고 나오니 해가 뉘엿뉘엿 검붉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녹슨 대문을 열고 들어서 그의 방으로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는데 옆방에 살고 있는 청년이 황급히 뛰어나갔다. 뭐가 그리 바쁜지 갑자기 달려 나와서는, 그 좁은 길에서 영감은 깜짝 놀라 비켜서다 하마터면 하나뿐인 외투가 녹슨 철장에 걸려 찢길 뻔하였다. 그는 아랑곳 않고 달음박질치는 청년의 뒷모습을 잠깐 매섭게 노려보고선 이내 툴툴대며 돌아섰다. 그 청년은 옆방에 살고 있었지만 한 달에 두어 번 볼까말까 했다. 영감 자신도 허기를 때우러 갈 때 말고는 밖에 나서는 일이 통 없었기 때문인데다, 그 사내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꼭두새벽에 나서서는 늦은 밤 들어오곤 했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말이 주택이지, 방마다 세입자들을 받는 통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바뀌어선 요즈음은 서로 간에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감이 옆방에 살건 안 살건 간에 보는 둥 마는 둥 지나치곤 했고, 그 또한 그들에 대하여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방에 들어서니 거뭇거뭇하여 바로 앞도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해가 저물어 있었지만, 영감은 방에 불을 켜지 않았다. 몇 해 전부터 눈이 심히 침침해진 탓에 불을 켜도 그만, 안 켜도 그만이어서, 밤에 구태여 불을 킨다고 해도 딱히 달라지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컴컴한 방에서 막걸리를 천천히 컵에 따라 마시며 라디오 소리를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내 반병을 비워버린 그는 남은 반통의 뚜껑을 단단히 잠근 후 문가 바람 드는 곳에다 세워두고선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취기가 올라서 그런지 이불 속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오늘 하루 종일 괴롭혔던 그 답답함도 잠시나마 가시는 듯했다. 슬며시 올라오는 약간의 알딸딸함에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는 더 이상 잡생각 없이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그사이 곤히 잠들어버린 영감은 다음날 오전 열시에 전화벨이 울리기 전까지는 죽은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 아홉 시가 되자 전력공사는 출근하는 직원들로 붐볐다. 김 씨 또한 그중 하나였다. 그는 사람들 틈에 끼어 간신히 승강기를 타고는 3층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요금관리팀’이라는 팻말이 붙은 사무실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어제 새벽까지 동네 친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인 탓에 여전히 몽롱한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는 책상에 쓰러지듯 앉았다. 어제는 간만에 얼굴을 비친 친구 놈이 한명 있어, 반갑네 뭐네 하며 사내놈들끼리 떠들다가 새벽 두시가 넘어서야 자리가 파했었다. 얼큰하게 취해서 새벽에야 집에 들어온 그는 평소보다 늦은 아침에 겨우 눈을 떠선 씻는 둥 마는 둥 급히 회사로 나서야만 했다. 집에서 아침 내내 여편네의 잔소리가 귓가에 울린 탓에 아직까지도 머리가 아파왔다. ‘그렇게 소리나 질러댈 시간에 시원한 국이나 한 그릇 끓여내 올 것이지.’ 그는 속으로 몇 마디 투덜거렸다. 김 씨는 옆자리 직원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는 책상 위 종이컵에 넣어둔 동전더미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곧장 사무실에서 나와 복도에 세워진 커피자판기 앞에 서서는 동전 서너 개를 집어넣었다. 그는 빨간 불을 아래에 달아놓고 나란히 줄 서있는 커피들 중 프리미엄 커피를 선택했다. 그래봤자 믹스커피일 뿐이지만 그래도 앞에 프리미엄이라는 글자가 붙는다는 것이 그에게는 나름의 만족감을 주었다. 그는 그것을 한잔 뽑아 손에 들고 다시 자리로 들어왔다. 아침에 그가 해야 하는 업무는 딱히 특별하지는 않았는데, 체납자들에게 전화를 건 후 최종 기한을 통지한 후, 그때까지 체납이 지속될 경우 전력을 끊겠다고 통보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들의 체납이유는 하나같이 구구절절했는데, 그것들을 다 들어줄 여유는 없었으므로 그는 그저 마지막 납기기한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 다음, 그들이 이것저것 그럴싸한 이유를 같다 붙이기 전에 최대한 빨리 전화를 끊으려고 애를 쓰곤 했다. ‘그렇게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에 그냥 돈이나 얼른 같다 붙이란 말이야.’ 그는 만약 기회가 된다면 꼭 이렇게 한마디 쏘아붙여보고 싶었다. 책상위에 놓인 체납 명단에 가나다순으로 정렬된 이름들을 무심히 바라보던 그는 아침 열 시가 되자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첫 번째 통화는 역시나 불통이었다. 이 사람은 어찌나 전화를 안 받는지, 그 많은 이름들 사이에서도 김 씨가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아마 이 사람이 더 이상 그 집에 살지 않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인해 오랜 기간 집을 비워놓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원칙이니 뭐니 하는 이유로 독촉기간동안은 매번 전화한 기록을 남겨야한다는 것이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이 수많은 이름들 중에서 한 번에 전화를 받는 이 또한 드물었지만, 그래도 매번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이 또한 참 드물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의 대다수는 단전 통보가 결국 전달되지 않은 상태로 전력이 끊겨도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고객들은 그냥 바로 단전해버리는 것이 훨씬 깔끔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불필요한 시간낭비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깨알같이 적혀있는 원칙들은 족쇄처럼 단단히 묶여서는 풀릴 기미가 없었고, 그는 그저 그 순리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첫 번째 체납자의 불통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다음 이름, 다음 이름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달력의 날짜를 눈으로 한번 살펴본 후, 마지막기한을 넘긴 체납자들의 비고란에는 [삭제-단전]이라는 글자를 적어 넣었다. ‘도대체가 자기들이 전기를 썼으면 돈을 내야지, 하여튼 세상에는 심보가 고약한 놈들이 많아.’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렇게 단전이라는 글씨를 써넣을 때면 속이 아주 시원해지곤 했다. 더 이상 그 도둑 심보를 가진 놈들의 이름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뜻했으니 말이다. 오늘 명단에 있는 목록에 모두 연락을 끝낸 후, 그는 그것을 컴퓨터로 말끔히 정리해서는 전력공급 팀으로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해장이라도 할 겸 근처 동태찌개를 얼큰하게 끓여 내오는 식당으로 동료 직원과 함께 자리를 나섰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아홉시가 되자 책상 앞에 앉은 김 씨는 흘긋하고 책상 뒤 창문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밖에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것이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달력은 3월을 훨씬 넘겼는데도 불구하고 날씨는 오히려 점점 더 추워만 지고 있었다. 아침에 두툼한 외투를 챙겨 입고선 출근했지만 매섭게 부는 바람은 도저히 이겨낼 재량이 없었다. 거기다 비라니, 분명 이 비가 그친 후면 더 쌀쌀해진 바람이 연신 불어댈 것이었다. 그는 도대체가 요즘 날씨는 가늠을 할 수가 없다고 고개를 절래 저었다. 그가 어릴 적만 해도 이맘때면 꽤나 따듯했었다. ‘이게 다 젊은 놈들 때문이야.’ 그는 항상 자기세대는 늘 맞는 일을 해왔지만 그것을 아래 세대들이 전부 엉클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기세를 체납하는 자들도 그랬다. 그는 만약 자기 세대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무언가를 사용하고선 그 대가를 치르지 않는 법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우리는 적어도 남들한테 피해는 끼치지 않는단 말이야.’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젊은 것들은 무언가를 쓰고선 몰래 내빼버리는 것을 당연해하지 않는가. 신용불량자니 뭐니 하는 것들도 다 그와 같은 족속들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그들을 속으로 욕하면서 잠시 시간을 때웠다. 시계바늘이 열시를 가리키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그는 긴 한숨을 한번 내쉰 뒤 이내 수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몇 번이나 갔을까, 역시나 이번에도 부재중이었다. 그는 눈으로 달력을 훑었다. 그리고는 빨간 펜을 들어 이름 가운데에 선명한 줄을 그어 표시한 뒤 비고란에 잽싸게 [삭제―단전] 이라고 적어 넣었다. ‘이제야.’ 그는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잠시 후련함을 느꼈다. 전화기를 붙들고 신호음이 끊길 때까지 귀에 붙이고 있는 것 같은 지독한 고문은 없었다. 이것은 마치 아주 크고 완만한 동산을 천천히 계속해서 오르는 것처럼 지루하고 지치는 일중 하나였다. 어쨌든 이 끈질기게도 연락이 안 되었던 체납자도 오늘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워냈다. 그는 이어서 다음 체납자의 주소지를 체크하며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연결이 되었는지 한참을 상대와 옥신각신 이야기를 나누고는 비고란에 휘날리는 글씨로 다른 몇 글자를 적어 넣었다. 그러고도 점심때까지 한참을 자리에 앉아 전화를 다시 걸고 몇 글자를 적는 것을 반복했다. 딱히 특별한 움직임이라고 해봐야 한참 수화기를 들었던 손을 잠시 내려놓고 쉬는 것이 불과했고, 김 씨 주변에 앉은 다른 직원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치 기계처럼 전화기를 오른쪽 목에 슬쩍 걸어놓고선 한숨을 푹푹 쉬어대며 다음목록, 다음목록으로 넘어갔다. 간혹 떠들썩하게 수화기 속 상대방과 실랑이를 하는 직원들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하나 쳐다보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손에 쥐고 있는 명단에만 집중했고,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 다이얼을 빠르게 두드렸다. 그리고선 점심시간이 되자 다들 분주하게 자리에 일어서서는 옹기종기 모여선 밖으로 나섰고, 그제야 겨우 한산해진 사무실은 정적인 고요함으로 가득 찼다.   
  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조용히 아침이 지나갔다. 영감은 창문 사이로 건너온 쨍쨍한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그 수상쩍은 전화가 오늘은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벽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시곗바늘은 이미 아침 열 시를 훌쩍 넘어 열두 시 근처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이 주말이었던가?’ 영감은 근처 은행에서 받아와 걸어놓았던 하얀 바탕의 큼지막한 달력을 눈으로 열심히 훑어봤지만 주말도 아니었다. 매일 울리던 전화가 갑자기 오지 않은 탓에 영감은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아침을 넘겨 늦은 점심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이 잔 탓인지 기운도 없고 눈알을 굴리는 것마저도 뻑뻑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매일 열시마다 걸려오던 전화는 그를 괴롭게 하고 있었지만, 그랬던 전화가 갑자기 울리지 않는 것도 썩 유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매일같이 자신을 찾아주던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이유야 모르지만 어찌됐건 간에 계속해서 아침마다 연락이 왔던 것 아닌가. 그것도 나름 끈질기게. 이 몇 년 여간 그에게 말을 걸거나 연락을 했던 이가 한명도 없었으니, 그는 그것이 일종의 안부라고 생각해왔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전화를 끝내 못 받았는지도 몰랐다. 오늘 안 받으면 내일 또 걸려올 거란 생각 때문에 말이다. ‘쓸데없이,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틀림없이 정신 빠진 놈들이 걸어대는 시답잖은 전화가지고 이게 무슨.’ 그는 잠시나마 감성적인 생각에 빠져버렸던 자신을 속으로 자책했다. 이것이야말로 외롭다고 이마에다 써 붙이고 동네방네 싸질러 돌아다니는 것과 어찌 다르단 말인가. 자신은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혼자서 어떤 일과 마주해도 의연하게 버티는 사람이었지, 이런 괴상한 전화벨소리에 감정 운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이제는 성가시게 생각할거리가 없어졌으니 이것이야말로 좋은 것 아닌가. 그렇게 되뇌며 애써 가라앉은 기분을 훌훌 털어 내보려 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약간의 찜찜한 구석이 가시지가 않았다. ‘그래도 한번 받아볼걸 그랬나.’ 영감은 다시금 잠시 동안 고민했다. 하지만 가족도 이미 연락이 끊긴지 오래에 그 시간에 전화를 걸 사람도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또 그 남의 돈을 등쳐먹고자 전화로 사기를 친다는 족속들도 생각해냈다. ‘받았어도 어차피 귀찮은 일거리만 잔뜩 생겼을 거라고.’ 영감은 마침내 힘들게 내린 결론에 만족해했다. 이 전화라는 것은 모름지기 자신이 아주 필요할 때 사용할 요량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의 시답잖은 부탁이나 들어주려고 장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까지 기억해내고 나니 그동안 아주 처신을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오늘은 이놈의 전기장판이 아주 찬데.’ 그는 손을 요 밑으로 집어넣어 전기장판을 이리저리 까칠한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원래도 겨우 찬기를 막아주는 아주 미지근한 놈이었기에 그는 아마도 날씨가 추워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낡은 이불을 모조리 끌어 모았다. 그래봤자 서너 번 개고나면 접히는 작은 크기의 이불이었지만 그래도 이것이라도 있으니 조금이나마 든든했다. 점심때가 다되도록 자고 일어났으니, 작은 소일거리라도 해야겠다 싶어 잠시 몸을 일으켜서는 낡은 신문조각을 가져와 이미 여러 해 지난 뉴스들을 슬쩍 훑어보는 시늉을 했지만 이내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몸을 일으킬 기력조차 없었고, 마치 온 몸에 힘이 전부 빠져버린 듯했다. ‘감기라도 걸린 건가.’ 하지만 병원에 가야할 만큼 눈에 띄는 특별한 통증은 없었기에 그는 아마 잠이나 계속해서 자면 기력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석에는 그저께 사다놓은 우유가 반통 남아있었지만, 그것조차 입에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입맛이 뚝 떨어져서는 허기가 지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마 허리 통증이 또 다시 도진 탓에 온몸이 피로해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억지로 다시 잠을 청했다. 그는 오후 늦게 일어나서 그때나 우유를 한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누워서 두어 번 기침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 말고는 별다른 큰 움직임은 없었다. 어느새 다시 곤히 잠든 영감과 그것을 어설프게 감싼 이불 위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전국이 대체로 맑겠으나, 강원도와 경상남북도는 오후부터 점차 구름이 많아지겠습니다. 기온은 중부지방과 일부 남부 내륙의 최저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곳이 있겠고, 바람도 강하게 불어 체감온도가 낮아지면서 쌀쌀하겠으니 건강관리에 유의하셔야겠습니다. 곳곳에 때 아닌 꽃샘추위가 주말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여―”
하지만 그 말소리 아래서 영감은 잠깐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며 뒤척인 것이 전부였고, 그저 가만히 잠들어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끝으로 영감은 더 이상 미동이 없었고 낡아빠진 이불역시 마찬가지였다. 밖에서 매섭게 불어대는 바람은 문풍지를 계속해서 두드렸고, 창문 중간에 덕지덕지 붙여진 노란 테이프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쁘게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그 사이로 빵빵대며 경적을 울려대는 차들과 버스들. 어지럽고 요란한 아침 출근길 틈새로 뉴스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애초 주말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이던 추위가 이번 주에도 계속해서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연일 이어지는 꽃샘추위 속에서 외로움과 추위에 지쳐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노인들의 고독사가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 서울 강동구 고덕단지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는 강 모 씨가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강 씨를 발견한 것은 같은 주택에 거주하던 세입자 박 모 씨로, 그는 옆집에서 이상한 냄새가 계속해서 나는 것을 이상히 여겨 찾아갔지만 계속해서 인기척이 없자 112에 이를 신고했고, 이에 출동한 경찰이 강 씨의 저택에 들어가면서 알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경찰은 강 씨의 시신 부패 상태로 미뤄보아 이미 숨진 지 수 일이 지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부검을 의뢰한 상태입니다. 최근 들어 독거노인들의 고독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자체의 복지시스템은 아직도 미비한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아나운서는 이어서 다른 소식들을 연달아 전달하기에 바빴고, 사람들은 서둘러 길을 재촉하며 연신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도로를 가득 매운 차들과, 버스에서 내리는 수많은 승객들이 시야를 가로막아버려 이미 지나버린 소식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같은 아침, 김 씨는 버스 문틈사이에 간신히 서있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비켜서야하는 통에 옆에 있는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등으로 밀어야만 했다. 바로 곁에 서있던 아가씨 한명은 그런 김 씨를 짜증난다는 듯이 계속해서 노려보았다. ‘아니, 내가 밀고 싶어서 미는 거냐고. 이렇게 사람이 가득 찼는데 나보고 뭐 어쩌란 건지, 원.’ 그는 이 틈바구니에 껴서는 뭐라고 해명하기도 구차해서 최대한 그 아가씨 쪽을 피해서 창가에 거의 바짝 붙다시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회사 앞 정류장에 도착하자 그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승객들이 내린 후 한결 가벼워진 버스는 빠르게 그들을 앞질러 출발했다. 겨우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정신을 차린 그는 터덜터덜 느린 발걸음으로 회사 로비로 들어섰다. 승강기에서도 한바탕 사람들과 줄다리기 싸움을 하고 3층에서 내린 그는 그제야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출근길은 이렇게 항상 정신이 없고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녹초가 되어버린 그는 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의자에 눕듯이 기대었다. 책상 위에는 체납자명단이 그를 반기듯이 놓여있었다. ‘아, 정말 지긋지긋하네.’ 그는 생각했다. 시계를 힐끗 보고선 그는 인터넷에 접속했다. 딱히 뭘 하려고 켠 것은 아니었고 그저 열 시가 되기 전까지 대충 시간이나 때우잔 속셈이었다. 인터넷 창에 올라온 뉴스에는 얽히고설킨 정치판 기사와 독거노인들이 계속해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기사, 요즘 날씨에 대한 언급 두어 개 그리고 연예인 누구와 누군가 사귀는 것으로 보인다는 카더라 기사들이 줄줄이 줄을 서있었다. 그는 그것들 중 아무거나 눈에 보이는 대로 클릭해서 대충 읽어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열 시가 되자 주변이 약속이라도 한 듯 분주해졌고, 그 또한 그제야 마우스를 손에서 마지못해 내려놓고 명단을 훑으며 수화기를 들었다. 명단에 적힌 첫 번째 체납자의 전화번호를 누른 후 수화기를 귀에 같다댄 그는 상대가 받을 때까지 신호음을 들으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산한 바람에 나뭇잎들이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기운 없는 나뭇잎 몇 잎은 결국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져서는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었다. ‘여보세요?’ 상대가 전화를 받자 그는 황급히 창밖에 흘려둔 눈길을 거두고 업무를 시작했고, 길가에 흐트러진 나뭇잎들은 데굴데굴 굴러가고 밟히다가 결국엔 뭉개져 땅에 스며들고 있었다.
 영감의 쉬어버린 김치 한 덩이는 아직도 그 자리에 너저분히 앉아 있었다. 누렇게 변색되어버린 신문 한 조각도 그대로 놓여있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밥 몇 술은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멈추어 있었고, 아직 채 마시지 못한 우유 반통도 방구석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낡은 이불 한 조각은 덮을 것을 찾지 못한 듯 엉거주춤 눕다 말았다. 무엇이 잠시 다녀갔었는지, 방문은 밖이 보일 듯 말 듯 살그머니 열려있었고, 창문에 악착같이 붙어있던 노란 테이프는 거센 바람을 이겨내지 못한 듯 결국 창가 아래 떨어져 있었다. 늦은 아침을 알리는 참새들의 지저귐이 전깃줄 위에서 울려 퍼져 골목길을 가득 매웠고, 그 가운데 방 왼쪽에 걸린 시계바늘은 열 시를 천천히 지나고 있었다.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 제36회 계명문화상 소설 부문 가작(1) - 수상소감

“어려웠지만 참 즐거운 작업”

‘열 시의 안부’는 내 첫 단편소설이다. 그래서 더욱 수상의 의미가 깊다. 그동안 줄곧 시를 써왔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도 내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용기를 내 펜을 들었고, 소설만이 가진 특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과 전달과정의 판이함을 이 기회로 많이 배웠다. 내용의 본질만큼은 표현 방식이 어떻든 늘 같겠지만, 그래도 명백하게 차이가 있었다. 어려웠지만 참 즐거운 작업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언제부턴가 아픈 이야기를 담백하게 전달하는 것이 참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의미 없는 살을 붙여 억지로 눈물을 쥐어짜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열 시의 안부’를 통해 한 인간의 고독한 죽음과 그 쓸쓸함, 그리고 그것을 방관하는 사회에 대하여 최대한 덤덤하게 풀어내보고 싶었다. 나름의 단편적으로 대치되는 사실만을 던지면서, 마지막에는 지독한 씁쓸함이 남는 작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감상이야 온전히 읽는 분들의 몫이겠지만,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들이 조금이나마 전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다.
부족한 작품을 읽어주시고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늘 곁에서 내 글의 첫 독자가 되어주고 응원해주는 친구들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이렇게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기분,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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