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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문학상 작품보기

제32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 작성자 : gokmu
  • 작성일 : 2012-05-27 19:12:54

 

 

 

●제32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김세정(조선대학교 / 문예창작학과 / 2012년 2월 졸업)

 

 

 

 

티브이 최초 공개 자막이 상단에 박혀있던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날개가 꺾인 천사였고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영화 속에서도 비가 내렸다. 천사는 아스팔트 바닥에 날개가 꺾인 채 누워 떨리는 목소리로 오, 아버지를 되뇌었다. 팟, 소리를 내며 갑자기 정전이 되는 바람에 영화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모른다.

나는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있었다. 거의 차가 다니지 않는 골목이었지만 위험했다.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좀처럼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저 위에서 밤하늘을 가르는 누군가가 보였다. 옥상 가장자리에서 테니스채를 몸에 끼우고 있는 아버지였다. 얼굴을 집어넣은 테니스채 안으로 조심스레 팔을 넣는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하늘을 향해 팔을 뻗는 슈퍼맨의 느린 재생 같았다. 눈두덩으로 빗방울이 떨어져 자꾸 눈이 감겼다. 부스럭 부스럭. 아버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

 

단추가 뜯어져 교복셔츠의 목 부분이 헐렁했다. 대문 앞에 서서 손가락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빗었다. 혹시 몰라 다시 옷을 털고 휴대폰 액정으로 얼굴을 비추어보았다.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입술이 터지고 눈두덩이 부은 것이 누가 봐도 맞은 얼굴이었다.

 

저번주 목요일이었던 것 같다. 무리지어 있던 아이들에게 불려간 것은. 밤이었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집으로 가려면 점포임대 현수막이 걸린 식육점과 세탁소가 마주보는 길목을 지나 골목 끝 모퉁이를 돌아야했다. 골목 끝에는 녹슨 기구들이 방치된 놀이터가 있었는데 이따금씩 또래의 아이들이 불친절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켰다. 골목 끝에 다다랐을 때 놀이터에 모여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모퉁이를 돌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아이들 중 한명이 거기 더벅머리, 라고 소리 내어 누군가를 불렀다.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뒤따라오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앞서가는 사람도 없었으니 거기 더벅머리는 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아이들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 돌린 새끼, 너 말이야 라고 말했다. 나는 더벅머리가 아니라 스포츠머리인데. 너희들이 부른 건 내가 아닌 게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모퉁이를 돌아 집으로 향했어야 할 걸음은 놀이터로 향했다. 다짜고짜 시비를 거는 아이들에게 달리 할 말이 없어 무턱대고 잘못했다고 했다. 네가 뭘 잘못했냐는 물음에 대답하지 못해 뒤통수를 두어 대 맞았다. 아마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겨루기가 무서워 흰 띠를 허리에 묶은 채 태권도 학원 밖을 전전한 일일 것이다. 겨루기를 조금 더 열심히 했더라면 나는 아이들의 손바닥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뒤통수를 만지며 놀이터를 나섰다. 가지고 있는 돈을 전부 내주고 난 후였다. 그 후로는 늦은 시간의 귀가를 삼가고 놀이터가 있는 골목을 피해 먼 길로 돌아갔다. 짧은 생각으로는 놀이터가 있는 골목만 피해 다니면 마주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음습한 곳에서 자라는 버섯처럼 어둡고 그늘진 곳이면 자주 마주쳤다. 멀리서라도 패거리의 그림자가 보이면 빠르게 뒤돌아 걷거나 무작정 뛰었다. 도망가는 내 모습을 아이들이 봤다 해도 상관없었다. 마주치지만 않으면 됐다. 그러다 방학식이 있던 오늘, 운도 없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어쩐지 안 보이더라. 너 이 새끼 우리 피해 다니지? 라는 말에 아무 대꾸도 못하다가 정강이를 맞고 쓰러졌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고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팔을 올려 머리를 감쌌다. 내가 얼마나 잘 맞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두머리는 그렇게 말했다.

“새끼, 생각보다 맷집이 좋은데? 야, 앞으로 돈은 됐고 넌 KFC다.”

“K…FC?"

“열라 공부만 하게 생겨가지고는 영어로 말하니까 못 알아먹네. KFC! 금호동 파이터 클럽.”

 

옷매무새를 고친 뒤 현관문을 열었다. 벌어지는 문틈사이로 새나오는 빛을 보며 아버지의 욕지거리를 상상했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자 마른 행주로 바둑알을 닦고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앞에는 얼굴이 다소 상기된 어머니가 국자를 든 채 앉아있었다. 이상하게도 어머니의 손에 들린 둥근 국자가 매우 위협적으로 보여 바둑알을 닦는 아버지의 덤덤함이 위험해 보였다.

“다녀왔어요.”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묵묵히 바둑알을 닦았고 어머니는 국자를 허공에 휘저으며 빨리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국자에 붙어있던 콩나물이 허공에 휘저어지며 어딘가로 휙 떨어져나갔다.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거실을 가로질렀다. 조심히 방문을 닫고 전등을 켰다. 기다란 전등이 두어 번 깜빡거리다 켜졌다. 익숙한 공간을 보니 불쑥 안심이 되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침대에 앉자 녹슨 스프링이 힘없이 꺼졌다. 교복을 벗으려 손을 들었을 때 아까는 보지 못했던 상처들이 보였다. 손등도 여기저기 긁혀 벌써 작은 딱지가 져있었다.

“내 결정이야. 존중해줬으면 좋겠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물속으로 가라앉는 자갈처럼 묵직했다.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의 목소리는 많이 격양되어 있었다. 듬성듬성 단추가 깨진 셔츠를 벗고 장롱 문을 열었다. 옷걸이를 꺼내다 장롱 문 안쪽에 붙어있는 거울을 보았다. 흉하게 얻어 터져있을 것 같던 얼굴이 생각보다 멀쩡했다. 오른쪽 아랫입술에는 작은 딱지가 져있고 왼쪽 눈두덩은 벌겋게 부어있었다. 거울 속에서 입술이 터진 내가 지질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 속의 둥그런 눈동자 속에서 다른 삶을 갈구하는 누군가의 애절함을 마주친 것 같았다. 문 밖에서는 아버지를 향한 어머니의 원망이 늘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유난히 바지통이 넓고 어깨 뽕이 심한 양복을 더 이상 입지 않았다. 아버지가 일을 나가지 않은 것은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국자에 붙어있던 콩나물이 어딘가로 날아갔던 밤. 밤새 문 너머로 어머니의 원망을 들어야 했던 날. 아버지는 양복 대신 움직일 때마다 부스럭 소리가나는 추리닝을 입고 집안 곳곳을 누볐다. 팔목과 발목부분이 밴드로 조여진 추리닝은 뭔가 아버지의 몸통에 소시지 네 개를 붙여놓은 것처럼 어색하고 우스웠다. 집안을 누비는 아버지의 몸짓이 부산했다. 거실과 안방에 있는 수납장을 모두 열어 수납되어있는 물건을 살폈다. 나는 그것이 숨겨둔 비상금을 찾기 위함이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이마에 난 땀을 훔치며 나를 보았다. 빤히 쳐다보는 아버지의 시선이 느껴졌다. 살짝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의 구레나룻을 타고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 방 좀 구경하마.”

몹시 더워 보이는 아버지가 짤막하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동안 방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는 대체 무엇을 찾고 계신 것일까 궁금했다. 얼마 있다가 방문이 열렸다. 방에서 걸어 나오는 아버지의 얼굴이 매우 붉어져있었다. 아버지 손에는 여행 갈 때나 쓰는 캔버스 가방이 들려있었다. 얼마나 구석에 처박혀있었는지 먼지에 쌓여 색이 거무튀튀하고 구겨진 주름이 선명했다. 듬성듬성 곰팡이가 피어있는 가방을 든 아버지의 걸음이 안방을 향했다.

“아버지, 어디가세요?”

아버지는 마치 가방을 들고 나오는 자신이 비밀이었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격하게 두 손과 고개를 저으며 내 물음을 부정했다. 아버지가 먼지 묻은 가방을 허공에 휘젓는 바람에 빛줄기 안에서 묵은 먼지들이 떠다녔다.

 

발로 차면 허술하게 열릴 것 같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안방을 가리고 서있는 문 너머의 풍경이 궁금했다. 문 너머로 간간히 아버지의 힘겨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는 무얼 하시는 걸까. 잠시 망설이다 문고리를 돌렸다.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을 때 거무튀튀한 가방에 몸을 쑤셔 넣는 아버지가 보였다. 가방 밖으로 한쪽 다리와 어깨가 나와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사냥을 당한 동물 같기도 하고 몸이 반 토막 잘려나간 좀비 같기도 했다. 뜻대로 되지 않는지 미간이 좁혀진 아버지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아버지의 붉은 얼굴을 보는 것은 그날이 마지막일 줄 알았다. 아버지는 바둑알을 안방으로 가지고 들어가 탑을 쌓았다. 앞뒤가 볼록한 바둑알은 매번 무너져 내렸다. 한동안은 물구나무를 선 채 물을 마셨다. 사레가 들려 눈알이 뻘겋게 돼서는 물을 뿜고 기침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줄이 다 뜯어진 테니스채에 얼굴을 넣기도 했다. 문틈으로 훔쳐보는 아버지의 기괴한 모습은 그간 양복에 있는 패드를 자신의 어깨삼아 근엄함을 유지하던 모습과는 달랐다. 저 추리닝이 아버지를 망쳐놓은 것은 아닐까. 아버지가 길 어디에서 망령이 든 추리닝을 주워 입은 것은 아닐까. 부스럭대는 비닐 소리가 아버지를 홀리고 있는 것일까. 문 너머로 아버지의 신음을 들으며 아버지가 이상해진 이유를 추측했다.

 

어머니는 이른 새벽에 나가 늦은 저녁에 돌아왔다. 어머니가 하는 일이 그러했다.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에 다녔는데 공단이 집에서 멀어 평일에는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없는 시간대에만 기이한 모습으로 안방을 누볐고 어머니가 있는 늦은 밤이나 주말에는 홀로 바둑을 두거나 오랜 시간 난초 잎을 닦았다. 어머니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아버지를 보며 걸레질을 하다 화를 내고 마늘을 찧다 욕을 하고 빨래를 널다 소리를 질렀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분무기에 물을 채워 밖으로 나갔다. 오랜 시간 화분에 물을 주는 아버지에게서 정성보다 근심이 많아 보인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아버지와 함께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우걱우걱, 깍두기 씹는 소리가 적막을 어색하게 파고들었다. 옆집에서는 개가 똥오줌을 못 가렸는지 멍청한 개새끼라며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된장국에 남은 밥을 말았다.

“아버지. 가방 같은데 안 들어가셨으면 좋겠어요.”

젓가락을 나누어 들고서 배추김치를 찢던 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네가 어떻게 그걸. 뭐 이런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우연히 봤어요.”

아버지는 잘 유지해오던 비밀을 들켜 아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반으로 찢은 김치를 자신의 밥그릇 위에 올리며 말했다.

“묘기를 연습하는 중이다. 비밀로 해다오.”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보았다. 고개를 숙인 아버지가 우걱우걱 김치를 씹었다.

“저 프로에 나갈 거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인 채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텔레비전에서는 방청객과 게스트가 일반인이 부리는 묘기에 점수를 주어 기인을 선정하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작년에 체구가 작은 노인이 작은 원통에 들어가 우승을 했다. 가방에 들어가는 것이나 테니스채에 몸을 끼워 넣는 것은 이미 여러 도전자들이 시도했던 묘기였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고개를 든 채 나를 보고 있었다.

“1등하면 5억 준다. 이 집을 살 수 있다.”

 

*

 

앞으로 넌 KFC라는 우두머리의 말을 새겨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은 나와 어울려 다니지 않았다. 가끔 놀이터 앞을 지나다 마주치면 나를 불러 이유 없이 옆에 앉혀둘 뿐이었다. 그러면 나는 아이들이 놀이터를 벗어날 때까지 그들의 노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아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법이 없었다. 멕시카나 치킨 같은 새끼, 말레이시아 말벌 같은 새끼, 몽골 산 흑염소 새끼 등 단어의 조합도 다양했다. 패거리에게 돈을 내어주는 학생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 학생들과 내가 비슷한 구석이 있다면 이유 없이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인적이 드물 때 혼자 지나가는 학생에게 불친절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같이 걷거나 사람이 많은 골목만 골라 걸을 걸 그랬다. 그랬다면 아이들에게 불려가지 않았을 것이고 여기에 앉아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벤치 가장 끝자리에 앉아 다리를 떨고 있었다. 불안하면 나오는 습관 같은 거였다.

“어이. 그래 너, 열라 큰 가방 맨 새끼. 와봐.”

주머니에 손을 넣고 춤을 추던 말레이시아 말벌이 지나가는 남자아이를 불렀다. 초등학생으로 보였고 산악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가방을 매고 있었다.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 주춤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너 걸을 수 있어?”

말벌이 내게 물었다. 떨던 다리를 멈추고 눈을 끔벅였다. 말벌의 질문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얼른 답하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남자아이도 나를 보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멀뚱히 고개를 쳐들고 이마를 긁적였다.

“못 걸어? 일 났네.”

말벌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굴에는 네가 너무 걱정돼 정도의 비슷한 표정이 그려져 있었다. 뜬금없는 말벌의 친절이 부담스러웠다. 그간 이들의 불친절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탓이거나 불안한 예감을 동반한 친절이라 그런 것 같았다. 말벌이 남자아이의 가방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내놓으라고 했다. 내 친구가 못 걸어서 넣어가야겠으니 잠깐만 빌리자는 말을 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아니야, 나 걸을 수 있는데?”

남자아이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나를 보았다. 나의 한 마디에 가방을 뺏기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을 갖는 눈빛이었다. 패거리의 시선이 단번에 내게 쏠렸다. 언제고 먼지 나게 때릴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벤치에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남자아이의 확신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남자아이가 조용히 가방을 벗어두고 가기를 바라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채 왜 내게 이런 시련이 닥친 걸까 생각했다. 인적이 드문 골목을 걷는 게 아니었다.

 

더운 밤이었다. 아니, 바람이 잘 불어들지 않는 집이 더웠다. 그러니 집에 있는 내게 있어 오늘 밤은 더울 수밖에 없었다. 더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안방 문이 열려있었다.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아버지는 꽤 능숙해진 솜씨로 묘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물구나무를 선 채로 먹을 갈았고 줄이 뜯어진 테니스채에 얼굴과 한쪽 팔을 넣었다. 바둑알로 쌓은 탑은 꽤 높았다. 처음에는 세알만 쌓아도 무너지던 탑이 열다섯 알 넘게 쌓여도 무너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묘기가 능숙해져갈 때쯤 나의 건들거림도 능숙해지고 있었다. 건들거림이 능숙해진 데에는 연습이 있었다. 말벌이 녹음해준 음성을 들으며 육두문자의 성조를 익혔다. ‘말 좆같이 한다?’ 에서는 ‘좆’에 엄청난 힘을 실어야 하며 첫 음절 ‘말’은 낮은 음조로 읊고 뒤에 ‘한다’는 신경질적으로 내뱉어야 한다. 말벌은 실시간으로 건방져 보일 수 있는 자세들과 표정을 찍어 멀티메일로 보냈다. 아버지의 묘기는 안방에서 이루어졌고 나의 연습은 옥상에서 이루어졌다.

며칠 전이었다. 놀이터에는 우두머리와 몽골 산 흑염소와 홍어가 있었다. 말벌이 숨을 헐떡이며 놀이터로 들어왔고 입술이 터져 있었다. 그런 입술을 본 적이 있다. 나의 교복셔츠 단추가 듬성듬성 깨졌던 밤. 그 밤의 내 입술과 같았다.

“애들아, 정남이가… 정남이가……”

매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춤을 추던 말벌이 다리를 절뚝이며 눈물을 훔쳤다. 정남. 그것이 멕시카나 치킨의 이름이었다. 멕시카나, 그러니까 정남과 말벌은 다른 패거리에게 얻어터졌다. 말은 시비가 붙어서 그랬다는데 머릿수에 밀려 그냥 얻어터진 것 같았다. 어쩌다 말벌만 놀이터로 살아 돌아왔는지 몰라도 정남은 응급실에 있었다. 코뼈가 부러졌고 인대가 늘어났다 했다. 밥 먹듯이 남의 주머니나 털던 패거리의 눈빛이 분노로 번뜩였다. 말벌은 우두머리에게 그 새끼들을 그냥 둘 거냐며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벤치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다리를 떨고 있었다. 괜한 불똥이 튈까 불안했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내게 가까워졌다. 떨던 다리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우두머리였다. 우두머리는 내 뺨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너의 맷집을 세상에 보여줄 때가 왔다고. 네가 KFC가 된 건 방패가 되기 위해서라고. 게임할 때 방어가 얼마나 중요한 줄 아냐고. 넌 우리에게 소중하다고. 그날부터 나의 연습은 시작됐다. 정남과 말벌의 복수를 위해. 패거리의 구겨진 자존심을 펴기 위해. 자의가 아닌 타의로. 우두머리의 말 한 마디로.

 

옥상 가운데 무릎을 굽히고 앉아 말벌의 실감나는 욕설을 재생하고 있었다. 내가 뱉은 욕지거리들이 허공 어딘가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한숨이 나왔다. 어쩌다 내게 이런 시련이. 과연 이것은 시련이 맞는 걸까. 습한 바람이 불었다. 하늘을 보며 내가 뱉은 욕지거리의 꼬리를 잡고 허공으로 떠오르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아마도 내 손에는 고딕체로 적은 개새끼라는 글씨가 쥐어져있을 것이다. 수백 미터 상공위로 고딕체의 개새끼를 손에 쥔 내가 보이는 것 같았다. 긴장이 된 나머지 허공에서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 것도 같았다. 어디선가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아니, 어수선한 느낌은 없었으므로 시끄럽다는 게 더 적절한 소리였다. 옥상 가장자리로 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가 분명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덜컹, 현관문이 열렸다. 현관문 밖으로 콩알 같은 바둑알들이 던져졌다. 그리고 바둑알 뒤로 엄청 큰 콩 하나가 등을 떠밀리 듯 걸어 나왔다. 아버지였다. 현관문이 닫혔고 몇 초 후 현관문 위에 있는 센서등이 꺼졌다. 어둠에 잠긴 아버지의 모습이 처참해보였다. 한동안 가만히 서있던 아버지가 무릎을 굽혀 바둑알을 줍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바둑알을 주우려고 움직일 때마다 추리닝 겉면이 서로 맞닿으며 부스럭 소리가 났다. 아버지는 바둑알을 주워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바둑알을 넣은 왼쪽 주머니가 축 늘어져갔다. 아버지는 남은 바둑알들을 반대쪽 주머니에 넣기 시작했다. 바둑알을 다 주워 담지도 못했는데 양쪽 주머니가 축 늘어져있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둑알을 양손에 든 채 난감해했다. 아버지의 추리닝 윗도리에는 주머니가 없구나. 오늘따라 아버지의 싸구려 추리닝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부스럭 소리로 아버지를 홀리던 망령이 사라져버린 걸까. 난감해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싫어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별이 없는 밤하늘에 바둑알을 품에 안은 아버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부스럭, 아버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

 

“쪽팔리게 떨지 마. 새끼야.”

후들후들 다리를 떠는 내 옆구리를 누군가가 툭 쳤다. 몸을 움찔거린 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말벌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내 다리가 맞나 의심이 될 정도로 후들후들 떨리고 있어 더 민망했다. 말벌에게 우는 소리를 내며 집에 가도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말벌의 표정이 살벌했다. 패거리에게 오늘은 곰이 마늘만 먹으며 버텨온 시간과 같았다. 싸움이 시작되려는지 저쪽 패거리와 이쪽 패거리가 욕설을 주고받으며 신경전을 벌였다. 먼저 열 받은 놈이 상대 패거리로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서로를 헐뜯고 있을 때 나는 오줌 쌀 것 같은 걸 참고 있었다. 싸면 몇 방울 나오지도 않을 거면서 엄청 마렵기만 한 그런 오줌이었다.

“시발, 연습했잖아 새끼야. 자꾸 그렇게 쫄은 표정 할래?”

연습은 그냥 연습이었다. 흰 띠를 허리에 묶고 승급심사를 볼 때도 그랬다. 도장에서 매일 연습했고 관장님도 잘 한다 칭찬해주었다. 승급심사에서 손등을 위 아래로 뒤집으며 내밀어야 할 주먹을 수직으로 세워 아무렇게나 내밀었다. 연습. 아마 나의 연습은 그때부터 처절한 실패의 길을 걸었던 건지도 모른다. 말벌이 알려줬던 상대 제압하기를 떠올렸다. 미간을 좁히고 혀로 한쪽 볼을 쓸며 속으로 뭘 봐? 를 생각한다. 망했다.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 욕설을 퍼붓는 저들의 눈을 도저히 마주볼 수가 없어 미간을 좁히고 혀로 한쪽 볼을 쓸며 저들 뒤에 있는 나무를 보았다. 그때 상대 패거리의 한 놈이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나를 향해 있었다.

“좆나 웃겨! 저 새끼 눈 병신이냐? 어디서 애꾸를 데려왔어 새끼들아.”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옥상에서 연습했던 욕지거리가 뒤죽박죽 섞여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떨리던 다리가 곧게 펴졌다. 안에서 이상한 것이 끓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모두에게 멸시를 받고 있다는 데서 오는 치욕스러움 이었던 것 같다. 순간 시간이 멈추고 나만 어둠에 잠긴 것 같았다. 불 꺼진 센서등 아래에 서있던 아버지처럼.

“말.”

낮게 읊조렸다.

“족같이 한다?”

옥상에서 연습했던 대로 ‘말’은 낮은 음조로 읊고 ‘좆’에 엄청난 힘을 실은 뒤에 신경질적으로 ‘한다’를 뱉어야 했는데 긴장한 나머지 족이 튀어나왔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걱정이 밀려들었다. 주위의 소리에 집중했을 때 패거리들은 아직도 서로를 헐뜯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누구도 내 연습의 결과물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잔뜩 긴장했던 순간이 왠지 모르게 허탈했다.

“닭처럼 생긴 새끼 병신은 안 됐냐?”

아까 나를 가리키며 웃었던 녀석이 정남이 이야기를 했다. 순간이었다. 우두머리가 상대 패거리로 뛰어든 것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 패거리가 한데 섞였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우주를 떠돌다 급하게 섞인 먼지처럼 보였다. 뒤엉켜 싸우는 그들 뒤에 나는 서있었다. 주머니에 바둑알을 쑤셔 넣은 것처럼 다리가 무거웠다. 한 번도 넣어본 적은 없지만 바둑알을 가득 넣은 바지는 그런 느낌일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내게 애꾸라며 웃었던 녀석이 달려들었다. 녀석의 주먹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몸의 중심이 흐트러지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한 번도 사람을 때려본 적 없는 나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일어서기 위해 다리를 뻗었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갑자기 무서워지면서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덜덜 다리가 떨렸다. 허공에 떠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두웠다. 허공을 휘젓는 내 팔이 보였다. 암전이 된 것은 아닌데. 어디선가 읏차! 읏차! 하는 신음이 들렸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혹시나 싶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버지가 노를 저으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소리 내어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가 고개를 올려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웃었다. 아버지가 노를 놓고 이마에 난 땀을 닦는 순간 빠르게 떨어져 내려갔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가 잽싸게 노를 잡고는 빠른 속도로 휘저었다. 추락하던 아버지가 다시 날아올랐다. 저 아래에서 아득히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라. 금방 올라간다.”

“아버지, 제가 내려갈게요.”

“아니다. 금방 올라간다.”

“아버지, 비가 내려요.”

“거뜬하다. 금방 올라가마.”

“아버지,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어요.”

“무엇이냐?”

“더운데 왜 긴 추리닝을 입으세요?”

“더운 것쯤이야. 거뜬하다.”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일어서려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팔을 움직이자 어깨가 빠진 것처럼 미친 듯이 아파왔다. 신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갓 태어난 동물의 새끼처럼 더디게 움직이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손끝에서 느껴질 정도로 눈이 심하게 부어있었다. 빗방울이 얼굴에 떨어질 때마다 상처 난 곳이 쓰렸다. 해는 언제 졌는지 어두워져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은 어디로 간 걸까. 문득 이곳에 나 혼자 남아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다. 먼지처럼 한데 섞여있던 두 패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맞지 않기 위해 주먹 쥔 손을 허공에 휘젓던 내 모습도 생각났다. 나를 바닥에 내버려둔 채 서로를 부축하며 사라졌을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하자 괜한 억울함이 치밀었다. 난 왜 그렇게도 필사적으로 방어했던 것일까. 젖은 몸이 불쾌했다. 콧구멍이 커지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운 없이 내가 걸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운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다리를 절며 골목을 걸었다.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똑같이 생긴 주택이 줄줄이 서있었다.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그 집이 그 집이었다. 빗물이 자꾸 눈에 들어가 눈뜨기가 힘들었다. 어디선가 경적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자 둥그런 빛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오토바이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지나쳐갔다. 다리를 지탱하고 있던 힘이 어긋나며 뒤로 넘어졌다. 넘어졌다는 말보다는 고꾸라졌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등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팔을 저으며 몸을 비틀었다. 빗방울이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부스럭 부스럭. 아버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민식이냐?”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저 위에서 줄이 없는 테니스채에 얼굴과 한쪽 팔을 집어넣은 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빨대로 힘을 빨아내는 것처럼 기운이 빠져 일어설 수가 없었다. 바닥에 누운 채로 아버지를 보며 눈을 끔벅였다.

“민식아.”

이제야 나라는 확신이 든 것 같았다. 쿵쿵거리며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보였다. 달리는 아버지에게서 추리닝 겉면이 맞닿으며 부스럭 소리가 났다. 추리닝이 비에 젖어서 그런지 더 흐리터분한 소리를 냈다. 아버지는 테니스채에 몸을 반만 집어넣은 기이한 모습으로 내 몸을 흔들었다. 입술이 터지고 턱이 아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말을 더듬었다.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입술이 찢어졌는지 알알하면서 혀끝에 비린 맛이 감돌았다. 호들갑을 떨며 내 몸을 흔드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었다. 원래 이렇게 유난스런 분이셨던가. 시선을 돌려 하늘을 보았다. 유난히 어두운 밤, 뿌연 달빛을 받으며 허공에서 노를 젓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노를 쥐고 있지 않던 내가 날아오르지 못하고 추락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이렇게나 빨리 나를 따라 내려온 것일까. 아버지가 퍼렇게 멍이든 몸을 마구 흔들며 괜찮은 거냐고 물었다. 아버지에게 이쯤이야 거뜬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 입을 벌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소나기였는지 빗방울이 차츰 멎으며 더디게 떨어졌다. 빛을 등지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꺼풀이 무거웠는지 저절로 감겼다. 아버지가 몸을 흔들 때마다 맞은 곳이 욱신거렸다. 아버지, 저는 괜찮아요. 멀쩡해요. 그러니 그만 흔드세요. 거기 멍든 것 같아요. 퍼렇게 멍든 팔뚝을 잡고 있던 아버지의 손이 멀어졌다. 빗물이 눈두덩 위로 타닥, 타닥 떨어졌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꺼지는 몸을 바닥에 맡긴 채 멀어지는 아버지의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는 국자를 손에 쥐고 있을 어머니를 부르러 간 것일까. 아니면 구급차를 부르러 간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묘기를 마저 연습하러 간 것일까. 달빛 하나 새어들지 않는 밤을 그리며 아버지를 상상했다. 아버지가 아직 곁에 있는지 부스럭, 부스럭 추리닝 겉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눈꺼풀이 쉽게 떠지지 않았다. 한참동안 비닐섬유로 된 추리닝의 소음과 힘겨운 아버지의 신음이 빗소리에 섞였다. 부어오른 눈두덩을 힘겹게 들어 올려 눈동자를 굴렸다. 담벼락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아버지가 보였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몸을 뒤틀고 있었다. 테니스채에 끼워 넣은 한쪽 팔과 얼굴을 빼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겨드랑이 밑에 걸쳐진 손잡이가 부산한 몸짓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버지는 마음이 급한지 막무가내로 테니스채를 밀어냈다. 얼굴과 팔이 뒤엉켜 모양은 기괴하고 테니스채에 살이 밀려 얼굴은 우스웠다. 걸린 어깨가 잘 빠지지 않은지 오만상을 찌푸리고 힘겨운 신음을 되뇌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벌떡 일어나 아버지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육체는 무겁게 가라앉고 정신만 가볍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외면했다.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버지도 나도 되는 일이 없는 밤이었다. 다시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턱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추리닝을 사주겠다고. 통풍이 잘 되는 추리닝을 사주겠다고. 윗도리에도 주머니가 달린 추리닝을 사주겠다고. 아버지가 아무리 요란하게 뒹굴어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 고급 추리닝을 사주겠다고. 그러면 붉어진 얼굴로 땀을 닦지 않아도 된다고. 윗도리에도 바둑알을 채워 넣을 수 있다고. 안방 문을 닫고 아버지가 가방에 들어가셔도 나는 절대 눈치 챌 수 없다고. 모든 것이 거뜬해질 거라고. 그렇게 되면 1등은 아버지의 것이라고. 미리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5억을 받으면 단추가 깨진 교복을 바꿔 달라 말하고 싶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을 헐떡였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울음이 몸체를 불리고 있었다. 울음을 참자 어깨가 들썩였다.

“안되겠다. 업혀라. 몸 좀 일으켜봐라.”

한쪽 겨드랑이와 어깨위로 비스듬히 테니스채를 끼운 아버지가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보듬어 끌어 당겼다. 몸을 일으켜 앉은 나를 업고자 아버지가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아버지 겨드랑이 밑에 뻗어있는 테니스채 손잡이가 턱을 치고 지나갔다. 두 팔로 아버지의 목을 감았다. 두 손으로 내 엉덩이를 받친 아버지가 허리를 숙인 채 힘에 겨워했다. 채에 가슴이 눌린 나 또한 힘이 들었다. 아버지는 몇 걸음이면 들어설 대문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아버지. 내여두세요.”

턱이 잘 벌이지지 않아 어눌한 말이 새어나왔다. 가늘게 목소리가 떨려왔다. 아버지는 힘에 부치는지 고개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버지에게 괜찮으니 내려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다시 입을 벌렸다.

“괜찮아요.”

“나도, 나도 괜찮다.” 아버지가 힘겨운 신음을 뱉었다. 아버지의 어깨를 두른 팔위로 빗물이 떨어져 내렸다. 머리카락 끝에 맺혔다 떨어져 내리고 턱에 맺혔다 떨어져 내렸다. 더운 땀을 흘리고 있을 아버지를 떠올렸다. 어두운 밤, 붉어져 있을 아버지의 얼굴을 상상했다. 아버지의 어깨를 두른 팔을 핥으면 짠맛이 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아버지. 노를 저어요, 우리.”

아버지가 힘에 겨운 목소리로 답했다.

“무슨 미친 소리냐.”

“노는 제가 저을게요. 아버지는 땀을 닦으세요.”

아버지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정신 놓지 말라는 말을 힘겹게 뱉었다. 아버지의 몸통에 끼워져 있는 테니스채가 가슴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여전히 대문을 넘지 못한 채였다. 지붕 너머로 펼쳐져있는 밤하늘을 보았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하늘에 바둑알처럼 듬성듬성 별이 떠있었다. 무거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빗물에 젖은 아버지와 나에게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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