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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0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 초식

  • 작성자 : 계명대신문사
  • 작성일 : 2010-06-24 14:21:49

초식(草食)

 

 

 

최종혁(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4)



수백 가지의 국화 중에서도 차가 될 수 있는 것은 몇 안 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샛노란 산국이야. 크기는 아주 작지만 진한 향기를 갖고 있어서 몇 송이만 있어도 금세 가을 향기가 진동을 할 걸.


올림픽대로, 미사리를 지나 강일 IC를 통과해 춘천고속도로에 진입한다. 조수석에 앉은 승훈은 태엽 인형 마냥 한껏 들뜬 마음으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해댄다.
어젯밤 11시. 오피스텔 지하 휘트니스에서 운동을 끝내고 방으로 올라와 원고 마감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하려던 찰라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누가… 검지를 이용해 미끄러지듯 휴대폰의 화면을 한 장씩 넘기며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도어 렌즈로 밖을 내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요즘도 이런 장난을 치나… 생각을 하던 찰라 갑자기 시커먼 물체가 눈앞에 나타나 하마터면 들고 있던, 아직 약정 기간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물건을 대리석이 깔린 현관 바닥에 떨어뜨릴 뻔 했다.
“야, 깜짝 놀랐잖아.”
“너 편하라고 그러지. 내일 우리 집까지 나 데리러 오는 것보다 아예 여기서 자고 같이 출발하는 게 더 좋잖아.”


국화차는 말이야 기침, 해열, 두통 등에 아주 효과적이라고. 그런데 그거 알아? 국화는 약간의 독성을 갖고 있어서 소화불량에는 삼가는 것이 좋아. 그래서 차를 만들 때도 살짝 데쳐서 말리는 거고.


세상 모든 것들은 제각기 독성을 품고 있다. 하지만 강한 자들은 굳이 그것을 드러낼 필요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게 독성은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무기이자 힘이 된다. 인사동에 위치한 승훈의 야생차 카페에서 난생 처음 국화차를 접했던 날. 나무 받침대 위의 찻종 안에서 빙글빙글 피어나던 꽃잎을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심스레 찻잔 끝에 입을 갖다 댔지만 강한 향 때문인지 한 잔을 채 비울 수가 없었다. 만약 그때 한 잔을 다 마셨더라면 아마도 그 속에 은밀히 숨어 있는 국화의 독성에 중독되었을 지도.
“야, 근데 이 길로 가는 거 맞아?”
간만의 장거리 여행이라 며칠 전 차량 점검을 받으면서 내비게이션도 최신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해 놓았다. 승훈은 이런 여행은 지도를 보면서 찾아가는 게 제맛이라며 글로브박스에서 꺼낸 ―삼 년 전 차를 구입할 때부터 있었을 법한―지도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야, 두 달 전에 개통된 도로가 거기에 나와 있겠냐? 그리고 고속도론데 지도는 뭐 하러 보냐.”
승훈은 대충 접은 지도를 제자리에 넣고서는 의자를 젖힌다. 삐죽거리는 얼굴 위로 아버지에게 혼나 혼자 방에서 훌쩍이던 내 어릴 적 모습이 오버랩된다.


신촌로터리가 내려다보이는 오피스텔 12층. 아침 8시, 수영을 다녀올 때까지도 승훈은 한 시간 전에 덮어 준 이불을 발 아래로 걷어차고서는 벽을 향해 모로 누워있었다. 1층 베이커리에서 사 온 갓 구운 바게트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발코니 문을 열었다. 반쯤 열려 있는 바깥 문 사이로 기다렸다는 듯 비집고 들어오는 황소바람이 방 안을 한 바퀴 힘차게 돌고는 승훈의 등에 가서 부딪힌다. 그는 찬기가 느껴지는 지 작은 몸을 더 웅크린다. 숨을 크게 들이 쉬자 라벤더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아라굴라와 소렐을 한 줌씩 뜯고는 난간에 기대어 밖을 내려다보았다. 지하철역 3번과 6번 출구로 수 십 명의 학생들이 밀려나온다. 녹색의 지하철을 타고, 비록 같은 역에 내렸지만 수능 성적이 결정해준 출구 번호에 맞춰 서로 다른 목적지로 걸어가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신선한 상태의 허브를 샐러드로 먹는 것은 향, 맛, 색 등에서 모두가 만족스럽다. 방금 막 뜯어 온 허브를 차가운 물에 담가 두었다가 체로 건져 마른 수건으로 가볍게 물기를 제거하고 양상추와 양파가 담긴 유리그릇에 담는다. 방울토마토 세 개를 반으로 잘라 위에 올리고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 식초를 적당히 뿌린다.
승훈! 이제 그만 일어… 그를 깨우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언제 일어났는지 침대 위에 앉아 반 쯤 풀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서 손 씻고 아침 먹어. 한 달 전 프랑스 문화원 취재 때 선물로 받은 염소유 치즈를 바게트 위에 얹어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잘 먹겠습니다. 잠옷을 입지 않으면 도무지 깊은 잠을 잘 수 없다는 승훈.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입했다는 원숭이 캐릭터가 그려진 잠옷을 입은 채로 맞은 편 의자에 앉아 빠시식, 바게트를 한 입 베어 문다. 아침 식사를 누군가와 함께 한 적이 언제였던가. 지금 이 시간, 이 공간에 나 이외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소렐의 떫은 레몬향이 가득 퍼진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릇 몇 개 안 되니까 깨끗이 헹궈서 마른 수건으로 닦아서 싱크대 선반 위해 올려놔.”
승훈에게 설거지를 부탁하고 저지를 벗어 의자에 걸쳐 놓고 거울 앞에 앉는다. 어릴 적부터 착하게 생겼다는―혹은 그래서 만만하게 보인다는― 말을 많은 들은 나는 항상 눈썹 끝을 각이 지게 정리해서 다닌다. 그래야 조금 더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스킨과 에센스, 수분 크림을 충분히 얼굴에 바르고 흐린 날에도 자외선 차단제는 필수. 태닝으로 적당이 그을린 피부톤에 맞는 비비크림으로 잡티를 가린다. 얼굴과 목의 색이 자연스레 어울리도록 적당량을 덜어 목에도 골고루 펴 바른다. 왼쪽 볼에 볼록 솟아오른 뾰루지가 눈에 거슬려 컨실러를 찾고 있는데 설거지를 끝낸 승훈이 옆으로 와서 앉는다.
“야, 너도 빨리 갈 준비해.”
“뭐 그냥 대충 씻고 나가면 되지 뭐.”
“너 같은 녀석이 게이라니. 신기하단 말이야.”
“왜 그래, 나는 타고난 훈남이잖냐. 너처럼 신경 안 써도 된다고.”
흔히 게이들이 외모에 많은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승훈을 보면 꼭 그렇지마는 않은 것 같다. 옷차림도 항상 청바지에 셔츠지만 남자든 여자든 그 녀석을 한 번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호감을 갖는 걸 보면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닌 듯하다.
“너 몸 완전 좋다. 한 번 만져 돼?”
“인마, 헛소리 그만하고 어서 샤워하고 옷이나 갈아입어.”
아직까지 잠옷을 입고 있던 승훈이 발정 난 원숭이 마냥 농담을 던지며 민소매 차림의 내 팔뚝을 살짝 치고는 욕실로 들어간다.
5년 전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하면서 발코니에 갖가지 허브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의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허브 샐러드다. 게다가 매일 운동을 거르지 않다보니 군살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자연스레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몸이 되었다. 아버지는 멀대 같이 큰 키에 덩치라고는 당신의 몸집에 절반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아들이 남자 구실도 제대로 못할 것 같다고 야단이지만, 요즘은 이런 몸이 대세다.


민트 향이 나는 것 같아.
며칠 전 승훈의 가게에서 서울로 출장 온 아버지를 만났다. 유난히 향에 민감한 승훈은 아버지가 가게를 들어서자마자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아버지는 유난히 박하사탕을 좋아했다. 식탁 위, 차 안, 사무실 등 아버지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길쭉한 마름모 모양의 새하얀 박하사탕이 담긴 병이 놓여있었다. 유리병 속의 박하사탕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긴급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경계병 마냥 항상 끝을 뾰족하게 세우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모서리가 입천장을 뚫어버릴 것만 같아 행여나 그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사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미심쩍은 맛이다. 어렴풋 단맛이 나는 걸 봐서는 사탕 같기는 한데 맵거나 혹은 쌉사름한 맛 때문에 사탕이라기에는 어딘가가 불편했다.
“너는 밥도 안 먹고 다니냐. 사내 녀석이 살집도 좀 있고 해야지.”
6개월 만난 아버지는 당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아들에 대한 질책을 시작으로 준비해온 이야기를 쏟아내셨다. 마치 군대 시절 사격 훈련이 끝나고 남은 탄알을 모조리 소진하기 위해 조정간 위치를 자동으로 맞춰 놓고 방아쇠를 당긴 M16 소총처럼.
군인인 아버지는 어렸을 적부터 남자다운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당신의 말 한마디면 안 되는 게 없는 사회 속에서, 나 역시 아버지의 말을 법으로 믿으며 시키는 대로 따라야 했다. 공부는 기본이었고, 군대 기상 시간에 맞춰 매일 아침 조깅을 하고 국민체조를 해야했다. 여섯 살 때, 옆 동에 사는 동갑내기 여자아이와 놀이터에서 소꿉놀이를 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집으로 끌고 들어가 회초리를 들고,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비비탄총을 사준 사람이 아버지였다.
“어찌됐든 네 나이도 이제 서른 하고도 둘 아니냐. 결혼할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쩔 생각이냐? 그 좋은 대학 나와서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변변치 않은 직업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냐. 동기생 아들들은 벌써 장가가서 애들도 한 둘씩 있다더라. 지난 번 골프 모임 때도 어찌나 손자 자랑을 하던지. 이 대령 아들, 변변찮은 지방대 나와서 빌빌 대던 놈이 제 아비 말 듣고 사관후보생으로 임관하고서는 지난 달 중위 진급하고 다음 달에 대학교수 딸하고 결혼 한다고 청첩장을 보냈더라. 아무 말 말고 다음 주에 집에 내려오너라. 네 엄마한테 괜찮은 아가씨 봐 놓으라고 했다. 그것도 싫으면 당장 며느릿감을 데리고 오너라.”
준비해온 탄알이 바닥을 보일 때 쯤 아버지는 답답해진 입 한을 시원하게 헹구려는 듯 반짝이는 금빛 안경테를 치켜 올리고는 호주머니 속 작은 상자 안에서 박하사탕을 한개 꺼내 입 안으로 가져간다.
고등학교 입학 후 첫 시험 기간. 관사 친구와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오겠다고 했을 때 친구가 타 대대 부사관 아들이라는 말을 알고 나서 아버지는 그냥 집에서 하거라,하셨다. 언제나 아버지는 자신의 기준에 딱딱 들어맞도록 씨실과 날실로 짠 천 속에 나를 가둬두려 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촘촘히 옭죄어 올수록 나는 한 땀 한 땀 올을 끊어가며 벗어나려고 애썼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아버지는 지금 내가 하는 일도, 살아가는 방식 모두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 역시 그분의 건조함에 말라 죽어 버릴 것만 같아 대학을 입학 한 이후 내 삶의 영역 안으로 아버지를 들이는 것을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다.
아무리 잘 훈련된 사수도 실제 전쟁터에서 수백 수천 발의 총알을 연사해 한 명의 적군을 명중시키기 어려운 법. 더욱이 노병이 들고 온 녹슨 소총과 오래된 탄알은 사방으로 탄피를 튕겨내고 있었지만 과녁을 명중시키기는 어려워 보였다.


여자 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절친한 친구는 동성보다 이성 친구들이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지금까지 몇 번의 연애 경험 동안 만나온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이나 만나는 사람에게 많은 질투심을 가졌다. 그리고 누구나 할 것 없이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꺼낸 사람은 상대방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매달리지 않았다. 내가 갈 길은 뚜렷한데 그 길을 돌아가면서까지 붙잡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연애라는 것을 하면서 상대방 때문에 나를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기사 작성을 위한 스케줄이 있는 날이면 연락이 와도 받지 않고, 원고 마감을 앞둔 날에는 하루 종일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은 적도 많다. 주말에는 주중에 밤새 글을 쓰기라도 하면 모자란 잠을 보충하느라 여느 연인들처럼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아니었다. 나에게 연애는 필수적인 것도 절실한 것도 아닌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아직까지 나는 내가 하는 일이나 나 자신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우리 이번 주에 설악산 가자!”
“응? 단풍놀이? 강원도 단풍은 아직 한참 멀었을 텐데…”
아버지를 관용차가 있는 주차장까지 배웅해 드리고 가게로 돌아왔을 때, 승훈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휴가도 제대로 챙기지 않는 녀석이 갑자기 설악산이라니.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오세암알아?”
“응. 가보진 않았는데, 들어는 봤지.”
“여정(旅情)이 시간 되면 한 번 오래. 법당 주변에 산국이 만발했는데 차로 쓰면 좋을 것 같다며 내 생각이 나더라는 거야.”
여정은 승훈의 오랜 단골손님인 비구니다. 승훈의 가게에서 처음 본 여정은 풀을 먹여 적당히 빳빳하면서도 선이 살아있는 법복을 입고 있었다. 합장을 하는 순간 바라본 여정은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마치 가지취 내음새가 나는 듯 했고 낯빛은 쓸쓸해 보였었다. 지난 달 승훈의 가게에 들른 여정이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하자 승훈이 올 봄에 채취해서 말려 놓은 얼마 남지 않은 제비꽃차를 모두 여정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며칠 전 여정으로부터 불면증이 말끔히 없어졌다고 고맙다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었다.


어느 새 차는 춘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중앙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감아놓은 태엽이 다 풀려 버렸는지 승훈은 언제부턴가 잠들어 있었다.
승훈을 처음 만난 건 1년 전 모 여성 주간지에 야생차를 소개하는 기사를 쓰면서였다. 예전만큼 웰빙 열풍이 거세지는 않았지만 어디든 웰빙이란 단어만 갖다 붙이면 기본은 하고 보는 시대인 만큼 야생차는 그럭저럭 무난한 소재였다. 더욱이 맛있고 예쁜 먹을거리를 좋아하는 미혼 여성, 혹은 집안의 식탁을 책임지는 주부가 주 독자인 잡지에서는 말이다. 내가 사는 오피스텔에만 해도 커피 전문점이 세 개나 있을 정도로 카페인에 길들여져 있는 여성들에게 야생차는 적절히 신선한 소재였다. 더욱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차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에서.
추운 겨울에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화는 피부미용에, 생리불순이나 자궁출혈 등 여성을 위한 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쑥, 매일 아침 변기에 앉아 땀을 흘려대는 사람에게는 민들레, 현대인들의 난치병인 우울증엔 자귀나무잎, 수험생 자녀들이 있다면 머리를 맑게 해주는 댓잎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몇 가지 야생초를 소개하고 이를 이용해 차를 만드는 방법을 인사동에서 직접 야생차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승훈의 입을 빌려 간단하게 소개하는 기사였다.
기사가 나가고 난 후 다음 기사는 언제 나오냐,며 많은 독자들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하지만 그들이 원한 것은 더 다양한 야생차의 종류가 아니라 기사 한 쪽에 작게 실린 사진 속 야생차 카페 주인 승훈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나이가 몇이냐, 젊은 청년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게 되었냐, 그가 운영하는 카페가 정확히 어디에 있냐. 훈훈한 외모의 남자가 직접 야생초를 채취하고 만드는 것이 젊은 여성들에게는 야생초보다 더 큰 관심거리였던 것이다.
호의적인 승훈 덕분에 두 번째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푹신한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아서 우리는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 중 간혹 차를 구입하러 오는 손님이 있었지만 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준비해온 모든 질문에 대해서 다양한 에피소드까지 덧붙여가며 성실하게 대합해 주었다. 사진을 찍을 때도 처음에는 쑥스러운 듯 카메라를 의식하더니 이내 여성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매력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늦은 오후에 시작된 인터뷰는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세 명의 여자 손님이 들어와 차를 주문하면서 자연스레 인터뷰는 끝이 났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해요. 다음 호 나오면 갖다 드릴게요.”
“기자님, 괜찮으시면 차 한 잔 더 하고 가세요.”
가방을 정리하려고 일어서자 승훈은 나를 카페 안쪽 바로 잡아 끌었다. 그의 손이 팔 깊숙이 들어오는 순간 묘한 짜릿함에 잠시 당황했지만 나는 카메라며 가방을 자리에 둔 채 승훈의 손에 이끌려 의자에 앉았다. 그는 여자 손님들이 주문한 차를 투명한 유리 주전자에 담아 자리로 갖다 주고 곧 돌아와 내게 줄 차를 준비했다. 선반위에는 말리거나 설탕에 절인 차가 담긴 수십 개의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승훈은 가장 자리의 선반에 놓인 작은 유리병 하나를 가져와 녹색으로 된 이파리 서 너 장을 꺼내 내 앞에 놓인 찻종에 넣고는 사기 주전자에서 적당히 식힌 끓인 물을 따른다. 토끼풀 차에요.
마치 봄날 들녘 한 편을 고스란히 찻잔으로 옮겨 놓은 듯 진한 초록빛의 차였다.
“토끼가 된 것 같네요.”
“와아― 손님들 열에 열은 놀라며 토끼풀도 먹느냐고 묻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기자님이 처음이에요.”
하지만 무엇보다 찻잔 위에 활짝 펼쳐져 있던 네잎클로버를 보는 순간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기사가 나간 후 승훈은 방송에도 출연했고, 덕분에 가게를 찾는 손님들은 부쩍 늘었다. 방송의 후광으로 반짝 손님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단골도 꽤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 둘은 두 번의 만남 이후 동갑에 서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급속도로 친해졌다. 집 혹은 근처 커피숍에서 주로 글을 써 왔었지만 지난 1년 여 동안은 승훈의 가게가 내 작업실이었다. 그동안 몇몇 잡지사에서 정규직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지만 나는 모두 거절하고 여전히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으며, 두 편의 소설을 완성해 신춘문예에 투고해 최종심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서로의 행운아가 된 것이다.


승훈이 발산하는 수면 바이러스가 차 안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는 듯 했다. 내비게이션을 DMB방송으로 전환했다. 자녀들을 학교에 보낸 주부들이 집안일을 마치고 거실에 앉아 전화로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을 정도의 시간. 얼마 전 남편의 폭력으로 이혼 한 중견 여자 탤런트가 나와 그동안의 심경을 토로하는 연예 교양 프로그램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텔레비전 앞에 앉은 주부들은 모두가 자신의 일인 양 감정이입을 하며 혀를 차고 있을 것이다.
훗, 얼마 후면 재혼 소식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겠지. 버튼을 눌러 뉴스로 채널을 바꾼다. 세계적인 금융 위기 속에서 한국의 경제 성장률이 세계 주요국 가운데서 비교적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내용의 경제 뉴스가 차 안에 있던 수면 바이러스들을 하나 둘씩 잠식해 나갔다.
― 최근 경제 회복세에 힘입어 백화점 화장품 매출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검은색 정장에 커트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한 기자가 백화점을 배경으로 카메라 앞에 서 있다. 화면이 백화점 내부로 바뀌고 북적거리는 손님들과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진열된 화장품들이 나타난다.
― 또한 외모에 많은 투자를 하는 남성의 증가로 남성화장품 매출 비율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30초의 뉴스 중 얼굴이 나오는 건 고작 오프닝 멘트 5초 동안에 불과한 기자는 카메라 뒤에서 마이크에 대고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것이다. 대신 백화점 일층 매장 곳곳에 보이는 남자들, 화장품을 구입하기 위해 점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검은색 수트가 잘 어울리는 잘생긴 남자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홍천IC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이고 내비게이션으로 화면을 전환한다. 우회전하세요. 고속도로를 빠져나오자 친절한 목소리로 방향을 알려준다. 두 시간, 오랜만의 장거리 운전에 뻐근해진 목을 스트레칭 하고 화장실도 들를 겸 국도 변에 있는 작은 휴게실에 차를 세운다. 잠자는 승훈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차에서 내린다. 생수 한 병을 사 돌아오니 선글라스를 낀 승훈이 어느새 운전석에 앉아 있다.
“자, 이제 베스트 드라이버의 운전 실력을 보여줄 차례라고.”
항상 저렇게 싱거운 녀석을 보고 있으면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다. 순간 자동차의 시동이 꺼지고 멈춘다.
“야, 사이드도 안 내리고 엑셀을 밟는 녀석한테 운전대 맡겨도 되겠냐?”
“아 차차, 실수라고 실수. 그건 그렇고 이곳을 다시 오게 될 줄이야.”
불안하긴 하지만 승훈이 운전하는 차는 서서히 도로 위로 진입한다.
“다시 오다니…? 무슨 말이야?”
“내가 얘기 안 했던가?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양구 보며 살지… 스물 한 살 내 청춘을 꿀꺽 삼켜버린 곳이 바로 양구잖아. 평생 살면서 보게 될 눈을 두 해 겨울 동안 다 본 것 같다니까. 참 끔찍했는데 이제 예비군도 끝나고 지금 생각하면 다 추억이지 뭐.”
“야, 누구 군대 안 갔다 온 사람 있냐. 여기 30년 동안 군인 아버지 밑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거든요. 운전에나 집중하세요. 난 잠깐 눈 좀 붙일테니 괜히 엉뚱한 길로 가지 말고, 내비가 가르쳐주는 대로 잘 따라가.”


형, 같이 가. 하루 종일 밖에서 놀았는지 꾀죄죄한 얼굴을 한 아이는 멀찌감치 앞서 있는 형의 뒤를 좇기 위해 있는 힘껏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형의 자전거 속도만큼 달리지 못하는 아이는 뒷바퀴 옆에서 굴러가는 두개의 작은 바퀴가 원망스럽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형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다. 형, 형. 고함을 질러 봐도 형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아이는 금세 울음이 터지고 만다. 혀…엉 같이 가.
동생의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형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자전거 안장 위에서 고개를 돌려 뒤를 본다. 관성의 법칙에 충실하던 자전거는 속력을 멈출 줄 몰랐고 그 순간 형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것은 지금까지 아이가 자주 보아온 것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검고 거친 털로 뒤덮인 괴물 형체로 변해버렸다. 순식간에 형을 집어 삼켜 버린 커다란 괴물의 이빨 사이에 낀 붉은 피가 흐르는 고깃덩어리가 아이의 눈에 비친다.


오른쪽 관자놀이가 차가운 창문을 스치면서 흠칫, 놀라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일어났어? 안 그래도 깨우려고 했는데… 흐음― 공기 좋다. 거의 다 온 것 같아.”
오른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승훈이 창문을 내리며 크게 숨을 들이쉰다.


형이 죽은 후 아버지는 나에게 더욱 더 많은 것을 원했다. 아버지는 내가 사관학교에 입학해 자신이 미처 이루지 못한 조종사의 꿈을 대신 이뤄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군용 트럭에 치여 죽은 형을 눈앞에서 목격한 이후, 절대로 군인은 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이미 그때부터 아버지와 나 사이의 경계선이 매년 내 키가 자라는 만큼 조금씩 그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대학교 입학하는 해에 대령으로 진급한 아버지는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조국의 영공을 수호하는 것이 꿈이었다. 아버지는 모든 학과 성적뿐만 아니라 훈련 성적도 우수했고 투철한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촉망받는 사관생도였다. 하지만 4학년 하계 훈련 기간 중 고공낙하훈련 때 낙하산이 제대로 펴 지지 않아 나무 위로 추락하면서 크게 다쳤다. 때문에 조종 교육은 받아 보지도 못한 채 그 꿈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이 한번 삐걱 거린 것을 제외하고는 아버지의 군 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조종 특기인 동기들도 1차 진급 심사에서 떨어진 경우가 허다했지만 비(非)조종특기임에도 단번에 대령으로 진급한 아버지.
대령 진급 심사가 이루어지던 해, 엄마는 고3인 아들의 대학 입시보다 아버지에게 더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매주 아버지가 집으로 모시고 오는 손님들의 접대를 치러야 했고, 사모님들의 비위를 맞추며 억지웃음을 지어야 했다. 그리고 매일 새벽 부대 법당으로 가 부처님 전에 불공을 드렸다. 수능을 백일 전, 엄마의 손에 이끌려 법당으로 가 함께 삼 천배를 하고 나서 며칠을 제대로 앉지도 못해 뻘뻘 대기도 했었다. 아버지의 진급 발표가 나던 날 어머니는 내가 대학에 합격했던 때 보다 더 기뻐하셨고, 이제 당신도 사모님의 반열에 올라섰게 되었다는 감격 때문이었을까 눈물을 보이셨다.


백담사에 도착해 여정을 기다리면서 맨 먼저 발걸음이 향한 곳은 대웅전도, 불상의 복장에서 나왔다던 유물도 아니었다.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완성된 곳이라는 것보다 전직 대통령이 유배 생활을 한 곳으로 더 잘 알려진 방이었다. 별 두개의 장군에서 유배자가 된 전직 대통령의 유품과 사진 몇 점이 전시된 방안을 둘러본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여정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급히 고개를 돌려보지만 오후 두시의 강렬한 태양에 눈이 부셔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다. 여정의 단아한 미소는 가을 햇살에 비치어 밝게 빛이 났다.
“오세암은, 한 시간 정도 더 걸어 올라가셔야 되요. 천천히 오르시면서 얘기 나누세요. 저는 백담사 주지 스님 좀 뵙고 천천히 뒤따르겠습니다.”
어차피 산 속에서는 무용지물일 테고 여유분의 배터리도 갖고 오지 않아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서는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여정의 편지처럼 법당 앞에 샛노란 산국이 만발해 있었다. 승훈은 도착하자마자 짐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는 꽃을 따느라 정신이 없다.
“더운데 저녁 때 하지 그래.”
“여기처럼 산에서 자라는 산국은 벌레가 많아서 해가 쨍쨍한 낮에 따야지 벌레들도 꽃 밖으로 나오고 햇빛에 꽃잎이 말라서 벌레를 제거하기도 쉬워.”
“그래? 그럼 나도 도와줄게,하며 꽃잎을 훑어 내렸다.”
“야, 야, 그냥 둬 그러면 안 돼. 그렇게 해버리면 꽃에 줄기나 잎이 달라붙어서 나중에 차로 마실 때 모양이 깔끔하지가 못하거든. 손이 많이 가더라도 한 송이 한 송이 채취해야 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다지만, 찻잔 속의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저렇게도 많은 정성이 들어가야 하나보다.


“흐―음. 공기 정말 좋다.”
서울에선 운동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캄캄한 산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기에 우리는 일찍 이불을 덥고 누웠다.
“승훈, 자? 나 있잖아… 아버지가 결혼하래.”
“하면 되잖아. 너는 게이도 아니잖아 뭐. 아니, 혹시 너… 나 좋아하는 건 아니지? 예전부터 조금 의심스럽긴 했는데. 뭐… 너 정도면 만나 볼 의향은 있어.”
승훈은 농담으로 분위기를 전환시켜 보려는 듯했다.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닌데, 게이는 아닌 것 같아. 남자든 여자든 그게 중요한 게 아냐. 결혼이 싫은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해야겠지.”


깊이 잠든 승훈 옆에서 한참을 뒤척이다 마감 기사 때문에 온 연락이 없을까 해서 가방 속에 넣어둔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전원 스위치를 누르고 액정을 확인하자 한 두 개의 안테나가 깜빡였고 곧 기다렸다는 듯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다. 한 밤중 산 속에서 울려 퍼지는 벨소리는 영화관에서 마냥 타인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을 필요는 없었지만 무척이나 부자연스럽다.
“여보세요.”
“핸드폰은 왜 꺼 뒀냐? 다른 게 아니고 다음 주에 내려 와라.”
“아니, 엄마. 다음 주는 바쁠 것…”
“서울서 여기가 뭐 천릿길이라도 되냐? 다음 주 네 아버지 전역식 아니냐. 지난 번 서울에서 만났을 때 말씀 안 하시던?”
전역이라니. 아버지가… 쉰…일곱, 여덟… 한참을 생각해 봤지만 아버지의 정확한 나이가 얼만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양반 평생을 군대에 바쳤는데 많이 서운한가 보더라. 요즘에는 매일 밤 서재에서 임관해서부터 모아둔 사진첩을 찬찬히 훑어보고 계시는구나. 네 아버진들 군대가 뭐 그리 좋았겠느냐. 네 형 사고로 그렇게 되고 나서, 누구보다도 당신이 군인이라는 것을 원망하고 슬퍼했던 사람이다. 그래도 30년 넘도록 다른 사람들 앞에 내색 한 번 안하고 가슴 깊이 묻어두고 너 하나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온 것 아니냐…”
엄마의 말이 끝을 맺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핸드폰은 통화권 이탈 신호음을 내며 끊겼다. 손에 쥔 전화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법당 앞을 안 바퀴 돌며 경고 메시지가 사라지길 기다렸지만 기지국과 간신히 신호를 주고받던 안테나는 기력을 다했는지 더 이상 신호를 잡아내지 못했다.
핸드폰 전원을 끄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라 어디선가 쌉싸름한 향기가 콧속 깊이 파고들었다. 깊은 숨을 들이 마시자 설악산의 차가운 밤공기가 폐 안에 고여 따끔따끔한 통증을 남겼다. 향이 점점 진해지는 곳으로 따라가다 도착한 곳은 대웅전 뒤뜰, 한 쪽 귀퉁이. 짙은 녹색의 잎사귀가 가득하고 차가운 가을바람 속에서 군데군데 흰색 꽃들이 피어있었다. 야생 허브인가 해서 잎을 살짝 뜯어 입 속으로 가져간다. 혀끝이 얼얼하다. 어릴 적 맛보았던 박하사탕 바로 그 맛이다. 하지만 잘근잘근 오래 씹으니 쓰거나 매운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입 한 가득 시원함이 코를 통해 빠져 나왔다. 크게 숨을 들이 쉬어 보지만 더 이상 따끔거림은 없었다.


“편히 주무셨어요?”
“덕분에 좋은 곳에서 편하게 쉬다 갑니다. 국화차 만들면 스님께 제일 먼저 보내드릴게요.”
승훈은 샛노란 국화가 가득 담긴 봉투를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는다.
“내려가기 전에 대웅전에 들러 부처님께 삼배 드리고 갈게요.”
“거사님, 여긴 부처님이 없어요. 그래서 대웅전도 없죠.”
“네? 대웅전이 없다뇨? 저기 있는 게 대웅전 아닌가요?”
승훈이 앞쪽에 있는 큰 건물을 가리킨다.
“저 법당은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있는 천진관음보전이에요. 혹시 오세암 설화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없으신가요?”
여정은, 폭설로 겨울 내내 혼자서 법당에 있어야 했던 다섯 살의 동자가 관세음보살을 어머니로 생각하면서 겨울을 보냈는데, 관음보살의 신력으로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을 기리기 위해 본래 관음암이었던 암자를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설화를 들려준다.
“역시 어머니는 위대한 존재네요.”
나는 흡사 여정의 얼굴에서 천수천안을 한 관음보살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감탄했다.
“거사님, 혹시 그거 아세요? 관세음보살이 원래는 남자였다는 것을.”
보살은 여성이 아닌가? 어렸을 적 법당에서 만나 뵙는 보살님들은 모두 아주머니들이었고 부처님 옆에는 항상 온화한 미소를 가진 관음보살이 앉아 있었는데…
“관세음보살은 부처님의 자비심을 나타내는 보살이죠. 인도, 티베트 등에서는 남성의 모습이지만 중국을 거치면서 점차 여성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겪게 되고 한국에서는 온전히 여성의 모습으로만 나타나고 있어요. 그렇게 변화하게 된 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관음보살의 자비와 선한 특성이 여성의 형상에서 더 잘 구현 될 수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중국에 성모마리아가 전파되면서 그 영향으로 여성으로 변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어떠했든 간에, 관세음보살이 남자든 여자든, 항상 우리 곁에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죠.”


주차장까지 함께 내려와 준 여정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갖고 온 짐을 뒷좌석에 싣고 운전석에 앉았다.
“야, 무슨 냄새 안나? 민트 같은데… 너 차에 방향제 뿌렸어?”
“나 그런 거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출발하게 얼른 안전벨트나 메도록 해.”
승훈이 고개를 갸우뚱 하며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사이 뒷좌석을 힐끗 돌아보았다. 노란 국화가 수북이 담긴 종이 가방 옆에 놓여있는 가방 속 깊은 곳에서 짙은 녹색 빛깔의 향기가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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