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된 사람들이 다 죽어도 끝나지 않는 사건이 있다. 뉴스를 본 사람들의 기억이 다 지워질 만큼 오랜 세월이 흘러도 종결은커녕 사회적 외상으로 남는 참사도 있다. 사건 사고는 때로 ‘순간’ 발생한 듯이 보일지라도 그 고통과 후유증은 피해자와 유가족은 물론 아주 많은 이들에게 평생의 한이 된다. 대부분의 참사가 주는 고통은, 어쩌면 영원하다. 요즘 최고의 화제작인 tvN 금토드라마 <시그널>은 현재 시점의 프로파일러 박해영(이제훈 분)과 과거 시점의 강력계 형사 이재한(조진웅 분)이 구식 무전기를 매개로 무전을 통해 장기미제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다. 베테랑 형사 차수현(김혜수 분)이 둘 사이의 연결고리다. 차수현은 박해영에게 강조한다. “넌 내가 시내 한복판에서 증거랑 씨름하고 있을 때, 나를 내려다 봐야 해. 증거도 사건도 범인도 멀리 하나의 점처럼. 절대 감정 섞지 말고.” 드라마 속의 주요 사건들은 대한민국 전체를 분노와 공포에 떨게 했던 유명한 미제사건들을 연상시킨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못 잡았기에 이유조차 못 밝혀낸 사건도 있다. 신도시 개발과 정권비리의 유착관계가 얽힌 사건도 있다. 공소시효라는 법적 장치까지 만료돼 먼지 쌓인 수사 파일
그녀는 원래 ‘대구 비너스’였다. 그런데 공부에 매진해 변호사가 되고 보니, 살들은 여기저기 있는 대로 붙어 몸무게는 77kg에 이르렀고 미모는 살 속에 파묻혔다고 한다. KBS 2TV <오 마이 비너스>는 ‘고대 비너스’ 몸매로 역변한 왕년의 미인 얘기다. 주인공 강주은(신민아 분) 스스로가 회상하듯 “주변 모든 남자애들의 첫사랑”이었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다. 15년 동안 충직했으며 지금은 헤어져 (하필) 주은의 친구 오수진(유인영 분)과 연애 중인 임우식(정겨운 분)이 이를 누구보다 잘 증명할 수 있다. 드라마 시작 당시 주은은 성질만 고약할 뿐 예쁘지도 자신을 돌보지도 못하는 ‘망가진’ 상태였으나, 우식은 주은 곁을 자기도 모르게 맴돌고 있다. 관성 때문일까, 주은의 매력 탓일까. 그는 재벌가의 유일한 상속자다. ‘존 킴’으로 미국에서 명성을 얻은 비밀 트레이너인 동시에, 재벌 외할머니를 둔 김영호(소지섭 분)는 강주은과 “자꾸 쓰러지고 자꾸 구해주는 사이”다. 두 번이나 응급상황에서 소생시켜주고, 그만의 탁월한 훈련 방법으로 불과 몇 주만에 77kg에서 15kg나 감량시켰다. 방송 5회만에 강주은은 다시 왕년의 분위기를 찾았다. 소지섭은 예
얼마 전 tvN에서 방영을 시작한 ‘응답하라 1988’은 위로의 드라마다. 상상력이 그리움을 불러내고 살을 입힌 그 과거의 세계 속에 잠시나마 푹 잠겨 있고 싶은 기분이다. 어떻게 이리 시청자의 마음을 잘 헤아렸을까. 그간 ‘응답하라’ 시리즈가 워낙 ‘백 투 더 퓨처’ 류의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긴 했지만, 1988년으로 돌아간 세 번째 이야기는 이전 시리즈 보다 더 기특(?)하다. 1997과 1994와는 다른, 뭔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떤 세상을 통째로 재현한 느낌이랄까. 우리가 지금 TV를 통해 뭘 보고 싶어 하는지, 드라마를 보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깨달았다고나 할까. 이제는 곁에 없는 사람들, 사라진 존재들, 되돌릴 수 없는 삶의 양태들에 대한 수많은 상념들이 머릿속을 아니 마음을 뒤흔들었다.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 격인 다섯 아이들은 극중 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나온다. 서울 쌍문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들은 1971년생이다. 1988년에 서울올림픽이라는 감격의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고교시절을 보낸 그들의 이야기다.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모레가 더 희망에 차 있을 거라는 설렘과 기대 속에서 온 나라가 꿈에 부풀어 있던 그 시절. 대
이런 이야기를 드라마로 본다는 것은 반갑고도 마음 아픈 일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사실 굉장히 ‘보수적인’ 장르다. 평균치 혹은 보편적 감성에 대해 각별하게 관심을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험적인 이야기를 다루기보다는, 누구나 다 아는 익숙한 것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종편이 지상파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해도, JTBC에서 드라마 <송곳>을 시작했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해고 노동자 이야기’이고 노동조합과 노동쟁의, 노동법 강의로 채워지는 작품이다. 물론 최규석 작가의 동명 웹툰 원작이 인기리에 연재 중이긴 하다. 그러나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다. ‘노동자’라는 단어를 그렇게도 쓰기 불편해하며, 5월1일 메이데이조차 ‘근로자의 날’이라는 오묘한 이름으로 지어 부르는 나라가 아닌가. 해고가 이토록 범상한 단어가 된 것인가. 저임금 비정규직은 이제 아주 흔해빠진 말이 됐다. 시청자들도 잘 안다. 그들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범한 시청자는 곧 ‘평범한’ 해고 노동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정부의 노동유연화 정책은 끝을 모르는 채, 사람을 최대한 짧게 싸게 부려먹을 방법만을 고안해내고 있다. 드라마 &l
이것을 드라마로 즐겨도 되는 것인가. 생각이 많아진다. SBS 월화극 <육룡이 나르샤>는 제목을 듣는 순간 귀를 의심하게 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용비어천가>를 배운 사람이라면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용비어천가 제1장에서 따온 제목이기 때문이다. “해동(海東) 육룡(六龍)이 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한자시니” <용비어천가>에 대한 사전적 풀이는 다음과 같다. “조선 세종 때 선조인 목조(穆祖)에서 태종(太宗)에 이르는 여섯 대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시. 목판본. 모두 10권. 여기서 ‘육룡’은 이성계과 이방원 외에 조선 건국 후 추존된 목조(穆祖) 이안사,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 도조(度祖) 이춘(李椿), 환조(桓祖) 이자춘을 말한다. ‘용비어천가’라는 단어가 현대 국어에서 비유적으로 가지는 속뜻은, 권력에 대한 무비판적인 찬사다. 그렇게 배웠다, 국어시간에. 국정교과서로 국어와 국사를 배우던 그 시간에도 말이다. 그때는 적어도, 비록 시험을 위해 암기는 했지만, 겉뜻과 판이한 속뜻도 들어있음을 함께 배웠던 것 같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말 그대로, 드라마로 풀어낸 용
예뻤던 그녀가, 못생겼던 어린 시절의 첫사랑 그를 만나러 간다. 그녀는 현재 폭탄, 그는 아주 준수한 외모의 미국 유학파 엘리트가 됐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약속장소에서 통화 중에 남자는 자신의 앞을 스쳐 지나가 모르는 여자의 등을 치며 “혜진아!”라고 부른다. 아주 확신에 찬 태도로! 그 순간, 진짜 김혜진(황정음 분)은 결심한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두기로. 그래서 예쁜 단짝친구 민하리(고준희 분)에게 잠시 ‘혜진 대역’을 시켜 지성준(박서준 분)을 만나게 한다. 영국으로 떠난다는 거짓말까지 해둔다. MBC 수목극 <그녀는 예뻤다>는 이렇게 시작된다. 외모 역변에 집안의 몰락이 겹치며 콤플렉스 덩어리가 된 혜진. 돈도 스펙도 없어 심각한 취직난이 거듭되다 이력서 100번 쓰고 겨우겨우 인턴으로 합격한다. 채용된 부서도 아닌 패션잡지 <모스트> 한국판의 편집부에서 온갖 잡무를 하게 됐는데, 성준이 미국 본사에서 부편집장으로 부임해 온다. 웬 날벼락인가. 일이 서툰 혜진에게 모욕적인 지적과 독설을 날리는 성준. 이보다 더 못된 상사는 없다. 그저 동명이인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다 ‘영국’에 있는 줄 알던 ‘혜진’(실제론 하리)을 길에
주요 설정이 대학이고 대학생의 현실이 간간이 등장하기는 한다. 하지만 우리 젊은이들이 처한 학자금 대출과 저임금 알바의 ‘리얼함’을 담아내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의 대학은 그야말로 ‘꿈’이자 꿈 속이다. tvN 금토극 <두번째 스무살>은 한 마디로 주인공들의 청춘을 다시 돌리는 일종의 역할극 같은 작품이다. 온통 만 19세의 풋풋한 청춘들 속에서, 38세의 하노라(최지우 분)는 대학 새내기가 되어 캠퍼스 생활을 시작한다. 19세에 아들을 낳고 주부로만 살아온 그녀는, 아들 민수(김민재 분)가 대학생이 되자 자기도 오랜 꿈에 도전한다. 20여년 간 자신을 포기하고 속없이 살아왔다고는 하나, 남편 김우철(최원영 분)은 독일 유학파 교수이고 고교동창인 첫사랑 차현석(이상윤 분)도 교수로 강의실에서 만난다. 차현석은 심지어 ‘첫사랑 하노라 트라우마’에 연애 불구로 살아온 독신인데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모든 게 하노라의 오늘을 위한 맞춤식 현실처럼 꾸며져 있다. 캠퍼스가 무대지만, 만학도의 못 이룬 로맨스 멜로. 이제 TV드라마 속의 캠퍼스 물은 이렇게 ‘동안(童顔) 중년’을 위한 ‘연장전’이 돼버렸다. 20대는 들러리이자 배경일 뿐이다. 이것은 대체 어떤
절대 권력의 상속녀는 숨만 쉬는 상태로 누워있었다. 재벌의 딸이 자기네 병원 특실에 갇히게 된 사연이야 기구하지만, 돈과 의술과 하수인들의 헌신적 보살핌(혹은 치밀한 음모)으로 ‘3년간 누워 지냈는데도 욕창 하나 없는’ 상태였다. 이런 한여진(김태희 분)의 특실에 외과의 김태현(주원 분)이 배정 받는다. 동생 치료비 때문에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 ‘용한 돌팔이’다. 왕진에 장소불문, 환자불문이다. 돈만 많이 준다면 조폭도 몰래 수술해 주는데, 비밀도 잘 지키고 실력은 최고다. 과연 공주는 깨어날 것인가. 상처투성이의 ‘용팔이’는 잠자는 공주와 어떤 ‘멜로’를 펼칠 것인가. SBS 수목극 <용팔이>는 이런 기대감을 주었다. 결과는 시청률 대박이었다. 초반에는 김태희가 주인공인데 대사도 없이 누워만 있다고 핀잔을 들었다. 하지만 누워있는 자태만으로도 어찌나 아름다운지 시청률을 올리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주원의 활약으로 드라마는 시청률을 계속 올려갔고, 5회에서 드디어 상속녀는 일어난다. 순간 시청률은 정점을 찍었다. 눈을 뜬 그녀는 그저 눈을 맞추고 대꾸를 하고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정말 기발하고 아름다운 ‘스펙
MBC 뱀파이어 사극 ‘밤을 걷는 선비’의 주인공 김성열(이준기 분)은 120년째 사악한 흡혈귀 귀(이수혁 분)에 맞설 수호귀의 임무를 지고 있다. 스스로 금수만도 못한 삶이라고 진저리를 치면서 말이다. 사랑하는 명희(김소은 분)와의 혼례를 앞두고 그가 모시던 정현세자와 부모님 그리고 명희, 모두가 귀에게 몰살당했다. 귀는 극중 ‘조선’을 건국시킨 일등 공신이다. 그 대가로 수백 년간 마음껏 (인간의) 피를 공급 받으며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다. 대신들은 귀에게 정사를 보고하고 왕은 누대로 허수아비다. 드라마 시작 당시 현조(이순재 분)는 아들 사동세자를 십년 전 귀에게 잃고 세손(심창민 분)을 지키기 위해 굴복했다. 320년째 귀의 세상이다. 세손은 ‘음란서생’이라는 필명으로 흡혈귀가 등장하는 염정소설을 써 세간에 퍼뜨리며 ‘귀 사냥’의 그날을 준비한다. 성열은 애타게 정현세자가 남긴 비망록을 찾는다. 귀를 없앨 비책이 담긴 비망록을 찾아, 세손 등등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뭉쳐야 한다. 그래서 책쾌이자 남장 여인인 양선(이유비 분)이 중요한 열쇠로 떠오른다. “사람이 희망이고 사람이 곧 비책”이라는 게 풀어야 할 비밀이다. 이 드라마는 웹툰 원작과 완전히 다
다 궁금하다. 호기심은 곧 기대감이 된다. 어설픈 재료와 더 어설픈 주문이, 유명 요리사들의 손끝에서 ‘작품’으로 탈바꿈하고 마침내 게스트와 시청자의 허기는 기분 좋게 충족된다. 월요일 밤의 요리쇼 JTBC <냉장고를 부탁해> 얘기다. 어떤 한 사람의 냉장고가 방송국 스튜디오에 배달된다. 모든 것은 그 냉장고가 결정한다. 거기 들어있는 것만으로 해결해야 한다. 잘생기고 입담이나 리액션, 허세까지도 매력적인 남성 요리사들이 오직 한 사람의 게스트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요리한다. ‘셰프’들이 제아무리 솜씨 좋은 요리사라도 뾰족한 수는 없다. 재료는 턱없이 모자라고, 요리할 시간은 부족하다. 15분은 살인적인 노동을 요구한다. 가장 큰 제약은 바로 냉장고 속인데 매회 무 대책에 예측불허다. 현대인에게 있어 가장 은밀한 곳은 개인용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와 냉장고 속이라는 말도 있다. 스마트폰도 마찬가지겠다. 누구나 열어 볼 수 있는 곳에 있지만, 허락 없이 열 수는 없다. 둘 다 ‘주인’ 혹은 사용자의 가장 개인적인 욕망이 들어 있는 일종의 보관소이기 때문이다. 그런 냉장고를 이 프로그램에서는 낱낱이 뒤진다. 5월 11일 방송된 26회에서는 “냉장고 재
이 나라에 정치는 없다. 궐 안에 음모와 암투만 판친다. 불길한 ‘신탁’과 넘치는 비밀들과 귓속말, 그 속에서 정작 백성을 위하는 정치는 실종됐다. 그토록 무시무시한 왜란의 세월마저 견뎌냈으나, 백성의 삶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기다리는 것은 가혹한 세금과 징발뿐이다. 정치가 없는데 무슨 ‘화정(華政)’ 따위가 있을 수 있으랴. 광해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MBC <화정> 얘기다. 지금 이 드라마에는 ‘적통 논란’만 보인다. 광해군의 ‘개혁정치’ 혹은 잿더미를 딛고 새 시대를 열고자 했던 최소한의 열정만이라도 그릴 줄 알았던 애초의 기대는 깨졌다. 현재 극 속에서 그의 즉위와 재위는 모두 음모론 자체가 돼버렸다. 그렇다. 드라마 <화정>의 주인공은 광해군(차승원 분)이 아니다. 정명공주(이연희 분)다. 선조가 51세에 19세의 인목대비와의 가례로 얻은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은, 어머니가 ‘정실부인’인 관계로 ‘적통’이 되었고 13년 동안 세자였으며 임진왜란 내내 실질적 군왕 역할을 맡아야 했던 ‘서자’ 광해군을 위협한다. 드라마는 그런 설정에만 집착한다. 그리고 광해군은 왕이 되어서도 기반이 한없이 취약하고, 어린 정명공주는 늘 당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