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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가작(1) - 레인 댄스를 추는 매기의 모험

  • 작성자 : gokmu
  • 작성일 : 2014-05-20 19:56:46

 

 

 

●제34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가작(1)


레인 댄스를 추는 매기의 모험

김도우(계명대학교·문예창작학·4학년)

 

 

0

  나는 언제나 비를 바랐다. 갈라진 곳을 빈틈없이 채워주는 그런 비를. 하지만 그런 비는 어느 세계에도 없었다. 일기예보는 가뭄이 한 달쯤은 더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 최악의 여름이었다. 수분이 부족하다. 이대로 가면 온 지구가 메말라서 박살이 나 우주의 먼지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허공에서 레인 댄스라도 춰야 하는 것일까?

1

  세상은 무서울 정도로 후덥지근했다.

  어쩌면,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앨런 구스의 이론이 광파 오븐의 발명에 일조했다는 주장은 허황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모두들 알다시피 앨런 구스는 빅뱅 이론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평행우주론을 주장한 사람이다. 뭐, 한 가지 이론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나머지 이론은 공상과학 소설 취급을 받긴 하지만. 앨런 구스는 삶을 마감하기 전, 평행 우주로 가는 174가지 방법을 발표하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네 가지만 읊어보자면.
  · 자살하기
  · 버뮤다 삼각지 위에서 낙하하며 정확히 삼각지의 정중앙으로 들어가기
  · 뇌진탕이 올 정도로 강력하게 때리기
  · 블랙홀로 뛰어들기
  이것들만 보면, 말년에 왜 그가 정신 나간 코미디언 취급을 받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10000피트 상공에서 뛰어내려 버뮤다 삼각지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정신 나간 ‘물리학자’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물리학자나 코미디언은 뜻이나 어감이나 그 차이가 매우 큰 것이니까.
  믿거나 말거나, 처음에 우주는 한 점에서 시작됐다. 그 점이 끓어오르며 점점 팽창이 일어나 결국 대폭발을 일으켜 지금의 우주가 됐다고 한다. 앨런 구스는 자신이 주장한 이 이론에서 ‘끓어오르다’라는 부분을 주목했다. 추측이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뇌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럼, 허공에다가 무지막지한 온도를 발생시키면, 새로운 우주가 나타나는 것인가?
  며칠 후, 그 생각은 평행 우주로 가는 112번째 방법이 됐다.
  · 어떤 공간을 섭씨 무한대에 가깝게 가열하기.
  나는 메구미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그럼 지금이 평행 세계로 갈 절호의 기회인가, 라고 중얼거렸다. 세상은 엄청나게 후덥지근했으니까. 메구미는 나를 바보 취급하며, 넌 숫자도 모르냐고 핀잔을 줬다. 머리가 후덥지근해졌다.
 
  내가 프로레슬링과 전혀 상관이 없는 앨런 구스를 알게 된 건 순전히 메구미 덕분이었다. 메구미는 새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찼던 중—그녀는 무슨 평행 세계인지 뭔지 하는 것에 대해 계속 조사를 했다—앨런 구스를 알게 된 것 같은데,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한 아이마냥 내게 그 사람에 대해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딱딱한 바닥 위를 구르는 내가 물리학자와 그의 이론을 알 필요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 지구가 태양을 잡아당기든, 태양이 지구를 잡아당기든 간에 그게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지금 그녀가 프로레슬링 도장 한가운데에서 앨런 구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나는 한 귀로 흘려들으며 링 위로 낙법을 하고 있었다. 메구미는 이런 나의 태도를 못마땅해했다. 그녀는 로프 밑으로 머리를 집어넣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건 상식이라고.
  그녀는 내게 훈계하듯이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우리는 늘 이런 식이었기에, 나는 귀찮아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링 위에서 뒹구르며 대답했다.
  —그래, 그래. 점이 폭발해서 우주가 됐어.
  메구미는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내가 그렇게 답을 해야 안심을 한다. 그녀를 기분 좋게 하는 일은 정말로 별일이 아니다. 나는 낙법을 하면서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그 점은 어떤 점이지?
  —응? 무슨 점이냐니?
  —사람 얼굴에 있는 점은 아닐 거 아니야? 그럼 신의 엉덩짝에 붙어 있던 점인가?
  메구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녀는 발목에 힘을 과하게 준 채, 도장에서 나갔다. 아마 한동안 메구미는 내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기분 나쁘게 하는 일도 정말 별 일이 아니다.

  이따금, 메구미는 글을 쓸 때 Red Hot Chilli Peppers의 The Advenutres of rain dance maggie를 흥얼거렸다.
  —오, 매기가 구름을 만들고 있구나.
  그것은 메구미의 소설만큼이나 몰이해한 노래였다. 도대체 저것은 누구를 위한 노래인가 말인가. 내가 그녀에게 그런 불평을 할 때마다 메구미는 더 들어보라는 듯 오히려 노래를 더 크게 불렀다.
  —우리는 어떻게든 비를 만들어야 해.
  대관절 마른하늘에 비를 어떻게 내린단 말인가. 적어도 방법이라도 가르쳐줘야 할 텐데, 저 4인조 밴드는 계속 매기인지 메기인지 하는 여자를 부르짖어대기만 한다. 거참, 무책임한 패거리로군!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도 예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긴 하다.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비를 내리게 만들겠다고. 우스운 생각이긴 하다. 어쨌든 지금 나는 레인메이커가 아니다. 비를 내리고 싶지만, 비를 내리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믿거나 말거나, 지금 돈을 뿌리며 다니는 화려한 세계 챔피언 오카다 카즈치카는 프로레슬러가 아니라 도둑놈이다. 녀석이 지금 연기하고 있는 ‘레인메이커’라는 캐릭터는 온전히 내 머릿속에 있던 것이다. ‘이곳에 돈의 비를 뿌려주지’나 ‘메마른 링 바닥을 돈의 비로 적셔주지’와 같이 녀석이 읊조리는 대사는 분명히 내가 말한 것이다. 빌어먹을. 그때 아사히가 너무 달았었다. 그날 나는 긴자에 있는 어느 호프집에서 오카다와 잔을 기울이며 시시껄렁한 프로레슬링 이야기나 나누고 있었다. 마침 녀석이 미국에서 수련을 끝마치고 돌아온 지 별로 안돼서 술이 매우 심하게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녀석과 나는 그저 허름한 프로레슬링 도장의 연습생이었다. 나는 기분 좋게 꼬부라진 혀로 건너편에 있는 오카다에게 말했다.
  —이곳에 돈의 비를 뿌려주지.
  신기하게도, 한 달 후에 오카다는 그 말을 링 위에서 똑똑히 내뱉었다. 녀석이 나와 달랐던 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녀석의 혀가 지독하게 유연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녀석은 링 위에 있었고, 나는 메구미의 방에 있었다는 것이다. 링 위와 달리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브라운관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TV안과 밖은 명확히 다른 세계인 것 같았다.
  —이곳에 돈의 비를 뿌려주지.
  녀석이 TV 안에서 그렇게 떠들고 있을 때, 나는 옆에 있던 메구미에게 불만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저건 내가 말한 건데!
  메구미는 이젠 질렸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했는데, 한껏 구겨진 메구미의 얼굴을 보니 딱히 그녀를 안아주거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녀에게 쏘아붙이다시피 말했다.
  —뭐?
  —너는 참.
  메구미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어나갔다.
  —대단한 프로레슬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저번엔 무토 케이지한테 문설트를 가르쳐줬다며? 참, 대단해.
  —그거 칭찬이지?
  메구미는 아무 대꾸 없이 채널을 돌렸다.

  앨런 구스는 평생을 좁은 골방에서 보냈다고 한다. 평행 세계를 주장한 사람치곤 스케일이 조금 작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그의 수입의 스케일을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점에선 그와 우리는 매우 유사했던 것 같다. 나와 메구미도 별다른 수입이 없이 골방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앨런 구스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는 것이다. 말년에 그는 파뷸라 사이언스 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다른 세계의 앨런 구스는 떵떵거리며 살고 있겠지, 뭐.
  메구미는 앨런 구스의 그런 면을 싫어했다. ‘평행세계’라는 것은 분명히 매력적인 이야기였지만, 메구미에게 있어선 ‘소설’ 그 이상의 것이 되진 못했다.
  —그게 뭐야, 인생 패배자들의 전형적인 마인드잖아.
  도서관에서 앨런 구스에 관한 자료를 읽던 메구미는 이 대목을 본 후 앨런 구스에 대한 관심이 뚝 떨어졌다고 했다.
  —자기 인생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해야지. 인생은 한 번뿐인데!
  그 당시, 나는 입단 테스트고 트라이아웃이고 뭐고 죄다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앨런 구스의 그 주장이 솔깃하게 들렸었다. 희망인지 뭔지 하는 것들이 날아갔을 때에는 여행이 최고라더니, 평행 세계는 내게 있어서 최고의 휴양지가 될 것만 같았다. 내가 메구미의 입에서 나온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읽고 있던 론리 플래닛 일본어판을 집어 던지고 메구미에게 다가갔다. 나는 매우 진지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그 좋다는 평행 세계에 갈 방법 같은 건 없을까?
  언제나 그랬듯이, 메구미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글쎄…. 앨런 구스처럼 버뮤다 삼각지로 뛰어들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광파 오븐에 머리를 박던지.
  이게 지금 누굴 바보로 아는가. 못마땅한 내 표정을 보고 메구미는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아니면 머리에 심한 충격을 입히는 방법도 있어. 왜 그런 거 있잖아.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이 신을 만났다거나 하는 일화.
  메구미는 충격을 받은 뇌가 환상을 볼 수 있다는 환상 같은 이야기를 했다. 뒤에는 앨런 구스가 그렇게 주장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바보 같은 소리였지만, 묘하게 옳은 소리인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메구미는 다짜고짜 관장님이 쓰시던 죽도를 가져오더니 힘껏 내 머리를 내리쳤다. 죽도는 내게 앨런 구스는 바보임이 틀림없다고 똑똑히 가르쳐줬다.

  메구미는 대단한 소설가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소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의 소설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나 보다. 이번에도 그녀는 떨어졌다. 메구미는 매트 위에서 뒤로 떨어지는 내게 불평했다.
  —이번에도 대회에서 다 떨어졌어. 아무도 내 소설을 안 뽑아줘.
  지난 5년간, 메구미는 한 달에 한 번씩 소설을 투고했고, 한 달에 한 번씩 다른 사람의 등단을 지켜봤다. 말하자면, 다달이 쌓이는 은행의 이자만큼 작고 흔한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메구미의 이야기는 그렇게 흥미롭지 않다. 대체 누가 반은 재규어고 반은 인간인 키메라 프로레슬러가 평행 세계를 모험하는 이야기 따위에 관심을 가져줄까? 너무나 복잡하고 지루했다. 그럼에도 메구미는 계속 프로레슬링 소재로 글을 쓰는 걸 고집했다. 내가 왜 그렇게 재미없는 소재로 글을 쓰냐고 묻자 메구미는 소설이나, 프로레슬링이나 비슷하잖아라고 대답했다. 뭐가 비슷한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나는 수긍하는 척해줬다.
  낙법 연습이 끝난 후, 나는 링에서 내려와 늘 그렇듯이, 그녀의 지청구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당연하지. 누가 그런 걸 뽑아줘. 프로레슬링에 관심 있는 사람은 없어. 더군다나 반인반수라니. 소름 돋는군.
  하지만 그녀에겐 그 일이 대수였던 것 같았다. 그녀는 바로 내게 저주를 퍼부었다.
  —너는 평생 차가운 링 바닥 위에 엎어져라.
  —링 바닥은 엄청 뜨거운데. 한번 올라와 볼래? 어쩌면 평행 세계로 갈지 몰라.
  —지옥에나 가!
  그녀는 정말로 바닥을 뚫고 지옥에 갈 기세로 쿵쿵거리며 도장 밖으로 나갔다. 나는 복수를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관장님은 한심한 눈으로 우리 둘을 쳐다봤다.

  메구미는 필명이 여러 개였다. 메구미라는 이름이 흔해서였는지, 아니면 그녀의 글 실력이 형편없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필명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메구미는 늘 이렇게 변명했다.
  —앨런 구스의 평행 세계를 간접적으로 느껴보고 싶거든.
  아마도 후자의 이유인 것 같았다. 내 생각엔 그녀는 자신의 글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이따금 메구미는 자신의 글을 보면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곤 했다. 메구미는 그런 글을 인터넷에 올리곤 했다. 그녀는 인터넷에 올린 소설을 내게 공짜로 보여 주진 않았다.
  —보려면 돈 내고 봐.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것만으로 돈이 되는 세상이라니. 나는 놀라워하며 메구미가 알려준 사이트로 들어가 봤다. 사이트는 대문부터 범상치 않았다. 다른 여자에게 팔을 비틀린 채 괴로워하는 여자의 사진이었다. 나는 100엔을 지불하고 메구미의 소설을 읽었다. 프로레슬링 소설이었다. 프로레슬링이긴 한데, 가슴 큰 여자들이 나오는 프로레슬링 소설이었다. 소설을 다 읽은 나는 메구미에게 내 감상을 솔직히 말했다.
  —사람들 참 요상한 거 좋아하네?
  —그러게나 말이야.
  메구미는 어김없이 재미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답했다. 그녀는 필명이 많으면 많을수록 돈이 더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필명이란 것이 프로레슬링의 가면이랑 묘하게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종이 뭉치를 내게 떠넘겼다.
  —뭐야?
  —새 소설이지. 야심작이야.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말했다. 나는 잠자코 제목부터 봤다. 레인 댄스를 추는 매기…의 모험이라. 썩 좋은 제목은 아닌 것 같았다.
  —재미없을 것 같은데.
  —읽어보기나 하셔.
  메구미는 자신 있게 계속 읽기를 종용했다. 그 기세에 눌려 나는 어쩔 수 없이 첫 장을 넘겼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확실히 메구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니까.
  —재미없어. 이건 그냥 우리 이야기잖아?

1-1

  …지난 수년간, 저를 끈덕지게 괴롭힌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앨런 구스 씨. 그렇다면 평행우주는 어떻게 가는 것인가요?
  제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답은 이것뿐입니다. 글쎄, 분명 제가 많은 가설을 주장했지만, 가설은 가설일뿐, 진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직접 실험체가 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라고만 생각하시고, ‘진짜인가?’라고 생각하시지 마십시오. 아직까지, 평행세계로 가는 그 어떠한 방법도 발견되거나 발명되지 않았습니다. 아쉬우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제일 가까운 평행세계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꿈’입니다.

—앨런 구스, 《팽창이론으로 말하는 평행 우주》에서 발췌

2

  세상은 여전히 후덥지근했다.

  그녀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디서 만났는지는 기억이 난다. 나는 여전히 그곳이 바인지 호프인지 모르겠다. 누군지도 모를 밴드의 음악이 나오는 걸 보면 바 같기도 하고, 요란한 인테리어나 테이블들을 보면 호프 같기도 했다. 그곳은 지하였다. 그 당시 그녀는 바인지 호프인지 모를 술집의 종업원이었고, 나는 바인지 호프인지 모를 술집에서 프로레슬링을 하는 프로레슬러였다. 술집 주인은 그곳을 카페라고 주장하긴 했지만, 글쎄, 세상 어느 카페에서 만취한 손님이 병을 깨뜨리면서 테이블 위로 난투극을 벌일까. 그 술집 주인은 프로레슬링 매니아인지, 변태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술집에서 프로레슬링 시합을 열곤 했다. 별다른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링 바닥 위에서만 구르는 내가 달리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기에 아주 기쁜 마음으로 술집에서 프로레슬링을 했다. 술집은 링이 들어가도 될 정도로 크긴 컸다. 다만 문제는 너무나 낮은 천장이었다. 천장이 얼마나 낮았는지, 탑 로프 위에서 뛰어내리면 천장에 부딪힐 정도였다. 한 번은 타이거 마스크 4세가—내 생각에 그 녀석은 가짜인 것 같았다, 처참한 실력은 둘째치더라도, 술집 주인이 타이거마스크 4세를 섭외할 만큼의 자금력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이곳에서 경기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녀석은 경기 도중 바깥으로 나가더니 사다리를 들고 되돌아왔다. 아마도 사다리 위에서 뛰어내릴 심산이었던 것 같았다. 녀석이 사다리를 들고 링 위로 올라가는 순간 퍽—하는 소리가 나며 술집이 순식간에 암흑천지가 됐다. 사다리가 조명을 깨부순 것이다. 덕분에 술집 주인은 한동안 프로레슬링 시합을 개최하지 못했고 장사도 하지 못했다. 술집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타이거마스크 등신대가 사라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만큼 아슬아슬한 곳에서 프로레슬링을 했다. 데뷔 못 한 프로레슬러가 경기할 수 있는 곳은 그런 곳뿐이다. 남들이 밟고 다니는 땅 아래에 있는 술집. 이게 다행인진 모르겠으나, 나는 아직도 그곳에서만 프로레슬링을 한다. 적어도 굶은 일은 없을 테니, 다행일지도.

  술집에서 프로레슬링은 다섯 경기씩 열렸다. 신기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세 경기씩 뛰었다. 가면이란 것은 참으로 유용한 도구다. 돈이 부족한 사장에게는 한 명으로 세 명을 고용한 효과를 주고, 돈이 없는 프로레슬러에게는 수당을 두 배로—사실 약간 손해 보는 기분도 들긴 했었다—받을 수 있게 해주니까. 가면의 유일한 단점은 답답하다는 것뿐이다. 답답한 것은 가면뿐만이 아니었다. 사장이 틀어대는 구린 음악은—그 레인 댄스를 추는 매기의 모험인지 뭔지 하는 게 제일 구렸다, 그 노래의 가사는 도대체 뭘 말하는 건지, 원—시시각각 귀를 조여 왔다. 그녀를 만난 그날도 사장은 미친 음악을 틀었고 나는 가면을 쓰고 미친놈마냥 링을 휘젓고 있었다. 안타까운 점은 상대도 나 못지않은 미친놈이었다는 것이다. 녀석은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링 위에 올라왔다. 나는 취객을 상대로 싸워본 걸 반추하며 경기를 풀어나갔다. 술집에서의 프로레슬링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술에 취한 것처럼 모든 것이 즉흥적으로 결정됐다. 도저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아마도 녀석도 탑 로프 위에 있던 나를 즉흥적으로 밀었을 것이다. 그 찰나의 시간에 나는 적어도 인생은 계획적으로 살아야지, 라고 마음먹었다. 술 취한 놈의 힘은 두 테이블 위로 나를 스치듯 날아가게 만들 정도였다. 안타깝게도 세 번째 테이블 위로 지나가진 못했다. 나는 그곳에 쌓여있던 병들과 테이블을 박살 내며 쳐박혔다. 파편을 헤치고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관중들은 전부 나를 좀비 보듯 두려워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마스크 사이로 액체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아요?
  뒤쪽에서 누군가 내게 물었다. 고개를 돌렸다. 아직은 누군지 모르는 여종업원이었다. 그녀는 《1Q84》라고 큼직하게 써진 책을 끌어안고 서 있었다. 아마도 내가 처박힌 테이블에서 책을 읽고 있었나 보다.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뭐,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날의 기억은 이것이 끝이었다. 정말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은 레인 댄스 매기의 모험을 들으며 나는 쓰러졌다.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듣겠는 가사처럼 정말 왠지 모를 밤이었다.

  의사는 내게 한동안 뛰어다니지 말라고 했다. 어릴 때 다른 의사가 뛰지 말라고 했을 때 뛰어도 딱히 별일이 없어서, 나는 일주일 후 다시 링 위로 올라섰다. 의사란 족속들은 대개 알츠하이머니 뭐니 하면서 우리들을 겁주는 존재가 아닌가! 나는 귀신이니 괴물이니 하는 것들을 믿지 않아서, 그런 겁주기는 내게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 아주 훌륭하게 경기를 치르고 내려오는 나를 그녀가 붙잡았다.  
  —저기, 혹시 한가하시면 이것 좀 읽어주실래요?
  솔직히 뭔가를 읽는 것은 정말 질색하는지라,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할 일도 없었기에, 나는 그러죠, 라고 대답하며 그녀가 건네준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것은 프로레슬러가 등장하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별로 반갑진 않았다. 그녀는 프로레슬러가 등장하는 소설을 줄곧 써왔다고 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내가 테이블을 박살 냈을 때, 그녀도 주인공이 테이블에 처박히는 장면을 쓰고 있었다고 했다. 읽어 보니까 재미는 없었다.
  —재밌네요.
  배우진 않았지만, 나는 예의가 뭔지 아는 사람이어서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소설을 되돌려줬다.
  —와.
  그녀도 웃는 얼굴로 종이를 되받아 들며 내게 말했다.
  —당신, 정말 훌륭한 프로레슬러가 되겠네요.
  처음엔 그녀가 내게 호감이 있는 줄 알고 칭찬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서야, 그녀는 내가 그 소설을 받은 지 정확히 2분 53초 만에 돌려주며 다 읽었다고 말했다고 한 사실을 알려줬다.

  갑자기 돈이 궁해졌다. 원래 돈이란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니던가. 결국 나는, 술집 주인에게 아르바이트를 시켜달라고 했다. 그곳 말곤 달리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처음에 주인은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다.
  —우리는 아르바이트를 두 명이나 쓸 여력이 없어. 프로레슬링이나 계속 해 줘.
  나는 그의 신발을 잡으며 사정했다. 그러자 그는 큰 선심을 썼다는 듯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정 그렇다면, 받아들여 주지. 대신 이제부터 프로레슬링 출전 수당은 없다.
  신난다, 이제 돈이 더 생기겠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돈이 더 생기긴 했다. 한 350엔 정도? 그래도 덮밥을 시킬 때 한 번쯤은 곱빼기로 시킬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좋은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일을 구걸하는 그 날, 그녀는 여전히 노트에 뭔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이젠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일이 한가할 때면, 책을 읽거나—최근에 그녀가 읽고 있던 《1Q84》를 슬쩍 들쳐봤는데 야한 장면 빼고는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야심차게 ‘창작노트’라고 쓴 공책에 뭔가를 끼적이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몇 달 전에 등단한 신인 소설가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신통한 소설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술집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소설 하나 쓰는 것보다 돈이 더 잘 벌린다고 했다. 수입 문제말고 다른 문제도 있었다. 사장은 그녀의 소설을 읽고 불면증이 싹 나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가 이런 술집에서 일하는 것이구나, 싶기도 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원래 소설가는 글만 쓰는 직업이 아닌가.  그녀는 뭔가를 쓸 때,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그 노래가 듣기 싫기도 해서 나는 그녀에게 물어봤다.
  —레인 댄스인가? 도대체 그 노래는 왜 부르는 거예요?
  그녀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멈췄다. 그러곤 한참 내 얼굴을 쳐다 본 후 답했다.
  —비를 바라니까요. 당신도 비를 바라지 않나요?
  —아니오. 저는 햇살이 쨍쨍한 게 더 좋은 데요. 비 오면 관절이 쑤시거든요.
  내 대답에 그녀는 소리 내어 웃더니, 재밌는 분이시네요, 라고 말을 한 후 다시 노트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비를 바라다니. 무릎 관절이 튼튼한 여자로군, 이라고 생각하며 물걸레질을 했다. 사장이 어디선가 나타나서 그녀에게 이따위 글을 뭐하려고 쓰냐고 꾸중했다.

  세상에 착한 사장님은 없다고, 관장님이 말씀하셨다. 관장님도 따지고보면 사장님이 아니냐고 따졌지만, 돌아온 것은 죽도 세례뿐이었다. 술집 사장을 생각해보니, 관장님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녀석은 ‘님’자 붙이기도 아까운 인간이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었다. 나는 돈을 너무 적게 받고 있었다. 하루에 세 탕이나 뛰었는데 받은 것은 두 경기 분의 수당이었다. 이젠 술집 일까지 하는데 여전히 비슷한 돈을 받고 있었다. 갑자기 화가 났다. 화가 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사장에게 화를 한 달에 한 번씩 냈다. 사장은 숫자를 낮추려고 했고, 그녀는 올리려고 했다. 대개 승리는 사장 쪽으로 돌아갔다.
  —재미없는 소설이나 쓰면서, 무슨!
  사장은 중요한 숫자와 관계없는 얘기를 하며 그녀를 몰아쳤는데, 그럴 때면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가게로 뛰쳐나가곤 했다. 그러나 사장은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딱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까 말했듯이, 술집은 지하에 있었다. 나는 폭우가 쏟아져 술집이 잠기길 원했다.

  어울리지 않게, 그녀는 프로레슬링을 좋아했다. 우리는 한가할 때면 늘 시답잖은 프로레슬링 얘기나 했다. 어느 날, 그녀는 ‘레인메이커’ 오카다 카즈치카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오카다를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은 우리 도장 출신이었으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오카다 그 녀석을 잘 알죠.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계속 내 말을 들었다.
  —오카다 그 녀석, 실제로는 무게감 없이 재밌는 놈이라고요. 혹시 한번 만나보고 싶으세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알고 있진 않았다. 녀석은 같은 이름을 가진 나를 볼 때마다 슬금슬금 피했다. 나를 도플갱어라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뭐 녀석이 재밌는 놈이긴 하다. 링에서 재밌는 경기를 만드니까 재밌는 놈이 아닌가?
  —네!
  그녀는 정말로 기뻐하며 답했다. 큰일이다. 그냥 예의상 해본 말인데. 사실, 오카다에 대해선 잘 모른다. 그가 연습하는 것만 봤지 얘기를 나눈 적은 없었으니까.

  사장의 폭언은 슬금슬금 기어 오더니, 어느새 나를 덮쳤다. 서빙을 하다가 맥주 두 병을 깨뜨린 것이 화근이었다. 사장은 내 목덜미를 잡더니 창고로 끌고 갔다.
  —벌써 몇 병째야!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조아리는 것뿐이었다. 사장은 그 모습에 더 분통이 터졌는지 기어코 내 뺨을 갈겼다.
  —가짜 쇼나 하는 주제에!
  그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나는 사장을 잡아 올려서 안주가 쌓여있는 곳으로 던졌다. 그러니까, 실수를 저지른 것은 나였다. 큰 소리를 들었는지, 그녀가 창고에 나타났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사장과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모습이었다.

  —혹시 앨런 구스 아세요?
  일을 그만두기 며칠 전, 그녀가 내게 질문을 했다. 앨런 구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 같았다. 미국인 프로레슬러인가? 내가 답을 못하고 끙끙대자, 그녀가 답을 말해줬다.
  —모르는 게 정상이에요. 제 SF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이에요.
  뭔가 이상했다. 내가 그녀의 공상과학소설을 봤을 리도 없거니와, 들을 리도 없었다. 나는 도대체 그 이름을 어디서 들은 것일까?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이 주인공 당신만큼이나 꽤 특이해요. 허풍이 되게 심하거든요. 한 번 읽어보세요.
  그녀는 어느샌가 또 종이 뭉치를 내게 들이밀고 있었다. 괜찮다. 언젠가 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예측하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으니. 지난번에 대충 읽었으니—내가 생각해도 2분 53초는 좀 너무했다—이번만큼은 꼼꼼히 읽어 주리라. 이번 소설의 제목은… <레인 댄스를 추는 매기의 모험>이었다.
  —그 앨런 구스라는 주인공은 평행세계 이론을 주장한답니다. 이번 소설의 가장 큰 구심점이 바로 그것이죠.
  —평행 세계?
  —쉽게 말해서 다른 세상이죠.
  그녀는 평행 세계에 대해 설명해줬다. 그녀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랑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세계. 나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뭐하러 그런 세계를 상상하나요?
  —숨이 막힐 정도로 더우니까요. 당신은 지금이 괜찮나요?
  사실 나는 지금 급료만 빼면 큰 불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대답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는 잠자코 있었다.
  —제 소설의 주인공은 비를 바라죠. 하지만 그가 사는 세계는 비가 안 내린 지 오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를 찾으려고 여러 평행 세계를 떠돌죠.
  그녀의 설명은 어느새 평행 세계에서 자신의 소설로 넘어갔다.
  —하지만 어느 세계에서도 비가 내리진 않았답니다.
  —슬픈 이야기군요.
  나는 천천히 소설을 넘겨봤다. 소설의 제목은 《레인 댄스를 추는 매기의 모험》이었다. 정말로 그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 세계에서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맞아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소설을 다 읽은 나는 의문이 들었다.
  —이 허무한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을, 그리고 누굴 위한 이야기죠?
2-1

  …그들은 허공을 향해 레인 댄스를 췄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들에게 내리는 것은 쨍쨍한 햇살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허공에서 레인 댄스를 췄다. 그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그들 중 하나가 내게 외쳤다.
  —이봐요, 앨런 박사! 뭘 망설이는 거예요! 어서 함께 추자구요!
  그들 모두가 나를 열망의 눈길로 바라봤다. 그 따가운 시선을 못 이긴 나는 어쩔 수 없이 팔과 다리를 허공에다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햇살은 여전히 따가웠다. 우린 솟아오르는 아지랑이 사이로 춤을 췄지만,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메구미 카즈유키,《레인 댄스를 추는 매기의 모험》에서 발췌

3

  —3! 오카다 선수 승리합니다! 돈의 비가 천장에서 쏟아지는군요!
  잠시 졸았다. 한쪽 뺨이 축축해졌다. 아직도 흘릴 침이 남았던가. 나는 책상 위에서 글을 쓰던 중 엎어져 잔 것 같았다. 목이 말랐지만, 물이 없다. 수신이 좋지 않아 잡음이 발생하는 TV에서 또랑또랑한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경기를 중계하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방 한구석에 있는 라디오에선 익숙한 외국 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비를 찾는 노래였다. 문득 베란다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밤하늘이었다. 다른 곳에는 비가 올까, 라고 중얼거렸다.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일하고 있는 바의 사장이었다.
  —왜 출근을 안 해?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그에게 그만두겠노라고 대답했고 그는 욕지거리를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두들기기 시작한다.
  —어쨌든 비가 오게 만들어야 해.
  라디오 속에서 밴드들이 편안하게 지껄이고 있었다. 뚫린 입이니까 아무 말도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라디오에서 신나게 나오고 있는 저들의 노래가 모티브다. 비를 바라지만, 비는 오지 않는다. 어떤 세계에 있던 아무도 비를 내리는 방법을 몰랐다. 모두들 무지할 따름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허공에서 레인 댄스를 추는 것뿐이다. 8월. 여전히 후덥지근한 밤에 나는 시원한 비를 바라며 소설을 썼다. 일기예보는 가뭄이 한 달쯤은 더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 최악의 여름이었다. 수분이 부족하다. 이대로 가면 온 지구가 메말라서 박살이 나 우주의 먼지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한쪽에 비가 안 오면 다른 쪽엔 비가 오는 법이니까. 단지 이쪽은 비가 안 오는 쪽이다. 불공평하다. 나는 세상을 다 쓸어버릴 폭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한 방울만 내렸으면 좋겠다. 막힌 내 소설을 뚫어줄 정도로만. 아니, 적어도 이 골방 안을 떠도는 먼지를 가라앉을 정도로만. 아니, 내 갈증을 채워줄 정도로만. 나는 허공에서 레인 댄스라도 춰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일어설 힘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책상에 머리를 쳐박았다. 아찔해진 정신 사이로 멀리서 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다른 세계의 소리였던 것 같다.
  여전히 하늘은 맑았다.


 

●제34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가작(1) - 당선소감


<레인 댄스를 추는 메기의 모험>은 부족한 소설이지만, 여러모로 제게 전환점이 된 소설인 것 같습니다. 소설을 쓰기 전에, ‘레인 댄스’를 검색해 봤습니다. 춤을 추신 분에게 미안한 소리겠지만, 상당히 천방지축인 춤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제 소설도 상당히 천방지축인 소설처럼 보입니다. 마른하늘에서 비를 쏟게 하려면, 천방지축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주인공처럼 비를 찾아서 아주 멀리 돌아간 것 같지만, 어쨌든 비 한 방울을 맞은 느낌이 듭니다. 이 비가 잠깐 그치다가 말 소나기가 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일단은 가족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허락도 없이 메구미의 모델이 되어 준 저 자신과 맹꽁이에게도 고맙고, 이 소설을 쓸 때 스피커에서, 모니터에서 저를 위해 노래해 준 레드 핫 칠리 페퍼스 형님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고마운 분들은 저의 소설을 읽은 분들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외에도 더 많은 분들게 감사하다고 전해주고 싶은데, 그건 나중에 더 큰 폭우 속에서 말하겠습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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