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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 오른쪽으로 돌아가시오

  • 작성자 : gokmu
  • 작성일 : 2015-05-18 18:04:23

 ●제35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  오른쪽으로 돌아가시오

 

 

오른쪽으로 돌아가시오
조길란(명지대학교·문예창작학·4학년)


오른쪽으로 돌아가시오

  K는 머리에 통증을 느낀다. 머리가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다. 웅 웅, 이명이 멈추지 않는다. 가전제품들에서 나는 소음 같기도 하다. 오른쪽 귀가 멍멍하다. 새우잠을 자는 버릇 때문에 귀가 머리에 눌린 탓이다. 똑바로 누워서 자는 버릇을 들이려 베개도 바꿔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K는 반대쪽으로 돌아눕는다. 오른쪽 귀에 피가 통하면서 찌잉 전기가 오른다. 그는 눈을 뜰까 말까 고민한다. 눈곱이 속눈썹들에 달라붙어 눈이 잘 떠지지 않는다. 눈을 뜨는 일이 너무도 힘들다. 이렇게 된 거 조금만 더 잘까, 생각하는 순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뒤따라온다. 머리가 아프다. 하루가 시작되고 가장 처음 느끼는 것이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라니. 아직 아무것도 안했는데도 벌써부터 피로가 쌓인다.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어제의 연장일 뿐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K는 식탁 앞에 앉는다. 아내가 어제 먹다 남은 미역국을 데워 K의 앞에 놓는다. 아내는 눈을 감고는 싱크대에 기대 서있다. K는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 한 팩을 꺼내 마시며 아내에게 묻는다.
 “몇 시에 잤어?”
 아내는 고개를 위로 올리고는 입을 살짝 벌린다. 설마 저대로 잠든 건가 생각하는 사이 아내가 고개를 끄덕일 기운도 없다는 듯 네시,라 대답한다.
 “집에 와도 쉬지도 못하고. 나 늦게 오는 거 알면 세탁기라도 좀 돌려주지 그랬어.”
 누가 그렇게 늦게 올 줄 알았나. K는 중얼거리며 반쯤 남은 오렌지 주스를 식탁 위에 올려둔다. 빈속에 오렌지 주스를 마시니 속이 쓰리다. 그는 오렌지주스 팩을 옆으로 치우고는 아내를 바라본다. 아내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찬물에 적신 손을 눈에 가져다 댄다. 그리고 바나나를 하나 까서 TV 앞의 딸아이에게 준다. 아이는 뽀로로에 정신이 팔려 바나나를 밀어낸다. 아내가 바나나를 조금씩 떼어서 아이의 입에 넣어주지만 아이는 이내 씹던 바나나를 입 밖으로 흘려버린다.
 “좀 자.”
 “안 돼. 오늘이 소영이 어린이집 첫날이잖아. 엄마가 같이 가줘야지.”
 아내가 K를 쳐다보지도 않고 쏘아붙이듯 말한다. K는 뭔가 항변하고 싶은 기분을 느끼지만 꾹 참고 묵묵히 수저를 움직인다. 아내는 바나나 먹이는 것을 포기하고 아이를 안아 올린다. 힘에 부치는지 한 번에 아이를 들지 못하고 끙 소리를 낸다. 하. 짜증 섞인 한숨 소리가 들린다. K는 미역국에 밥을 말아 단숨에 들이킨다.
 “내가 할게.”
 당신이? 아내가 묻는다. 
 “아빠가 가면 안 되는 법 있어? 당신도 이따가 일가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더 자둬야지. 냅둬, 내가 하게.”
 K는 아내에게서 아이를 받아 안는다.

  바람이 차다. K는 딸아이를 팔로 감싸 안는다. 하지만 바람은 그 사이를 더 매섭게 파고든다. 옷을 더 챙겨 입히고 나올 걸, 후회가 된다. K는 가디건을 벗어 딸아이에게 둘러준다. 새 학기라 그런지 어린이집 앞에 학부모들이 잔뜩이다. K는 눈대중으로 사람들을 세어본다. 어림잡아도 열댓 명은 넘어 보이는 것 같다. 남자는 K뿐이다. 다들 한 번씩 힐끔거리며 K를 쳐다본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K는 부러 옆 사람에게 말을 붙인다.
 “애 엄마가 바빠서 대신 왔는데, 남자가 저밖에 없네요.”
 “뭘요, 되게 가정적이신가 봐요.”
 여자가 대답한다. 듣고 있던 다른 학부모들도 와서는 한마디씩 거들며 끼어든다.
 “몇 개월이에요?”
 “26개월이에요.”
 “한창 말하기 시작하겠어요. 얼마나 고집을 부리고 떼써대는지.”
 학부모 중 한명이 깔깔거리며 말한다. K는 민망하게 웃으며 딸아이의 얼굴을 본다. 다른 아이들은 이때쯤이면 슬슬 웬만한 말은 문장으로 다 한다는데, K의 딸아이는 아직도 몇 가지 단어만 말할 줄 알뿐이다. 감정이나 의사를 표현하는 일도 없다. K는 인상을 쓴다. 그 여자만 아니었더라면. K는 딸을 맡겼던 베이비시터를 떠올린다.
 딸이 10개월이 되었을 때, 부부는 휴직이 끝난 아내를 대신해 딸을 돌봐줄 중년의 베이비시터를 고용했었다. 하지만 생판 남을 아무도 없는 집에 들이고 내 아이를 맡기는 것은 생각보다 신경 쓸 게 많은 일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서랍 안에 넣어뒀던 잔돈이 사라진 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K는 보지도 않은 영화의 결제 요금이 청구되기도 했다. K와 아내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베이비시터에게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일을 하러 가야 했고, 그 사람에게 자신들의 아이를 맡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베이비시터가 치약 통 옆에 놓인 무좀약과 치약을 헷갈려 무좀약으로 아이 이를 닦았다는 걸 알았을 때에도 그들은 별 말없이 넘어갔다. 아이는 인질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이에게는 또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러던 중, 아내가 도장을 가지러 집에 잠시 들릴 일이 생겼다. 아내의 말로는 빌라에 들어서자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갈 때 마다 그 소리가 점점 커졌다고. 아내는 단숨에 계단을 뛰어올라가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의 불은 다 꺼져있고 아이 방 문은 닫혀 있었다. 아내는 방문을 열었다. 아이가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혼자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방안 가득 똥냄새가 진동하고, 아이 목은 목대로 다 쉬어 있었다. 아내는 그대로 왈칵 눈물을 쏟았다. 이래서 목이 다 쉰 건 줄도 모르고 베이비시터한테는 애가 너무 많이 울고 떼쓰는 성격이라 미안하다고 그랬으니. 아내는 아이를 안고 베이비시터를 찾았다. 베이비시터는 새로 산 안방 침대에서 누워서 세상모르는 아이처럼 자고 있었다.
 그 후 부부는 아이를 같은 동네에 사는 처이모댁에 맡겼다. 아내가 핏줄을 빌미로 능청스럽게 아이를 떠넘긴 것이었다. 하지만 K는 아내처럼 뻔뻔할 수 없었다. 아이를 맡아달라는 말을 꺼냈을 때, 입으로는 적적한 차에 잘됐다고 하면서도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처이모의 얼굴이 계속 K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매달 용돈도 챙겨드리고 틈만 나면 K가 회사에서 챙겨온 음료수나 과자도 보내드렸지만 빚을 진 듯한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다. 딸아이를 맡기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부채감은 커져갔다. 언제까지고 아이를 처이모 댁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위에서도 슬슬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쳐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 나올 때 쯤, 처이모댁 큰딸이 아이를 낳았다. K와 아내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남의 손에 아이를 맡기는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하긴 하지만, 부부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무사히 보내고 K는 회사로 향한다. 딸이 다른 아이들처럼 울며 떼쓰지 않아서 빨리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딸아이 혼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아이에게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쿵. K가 반대편에서 오던 사람과 어깨를 부딪친다. K와 어깨를 부딪친 사람은 K를 한번 쏘아보고는 다시 뛰어간다. K는 떨어트린 핸드폰을 주우며 애써 안 좋은 생각을 떨쳐내려 한다. 이제 모든 게 괜찮아 질 것이다. 밖에서 슬쩍 본 것뿐이지만 어린이집은 밝고 활기차보였다. 아이들이 쿵쾅거리며 뛰어다니고 거리낄 것 없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평소에는 소음으로만 느껴졌었던 것들이었는데 그 안에서는 모두 어린생명 특유의 활기로 느껴졌다. 딸 또래의 아이들은 벌써 서로 친구가 되어 있기도 했다. 좋은 어린이집 같았다. 그는 혼잡한 대로변을 피해 역 뒤쪽 상업지구 안으로 들어간다.
 상업지구는 길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지하철로 가려 해도 대로변으로 가는 것에 비해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 때문에 아침 출근 시간에는 이 길을 이용하는 사람이 적다. K는 천천히 걸으며 빌딩들 사이를 가로지른다. 고요하다. 새벽동안 불을 밝혔을 술집들도 다들 문을 닫았고 다른 가게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밤새 바닥 위를 굴러다니던 전단지들과 텅 빈 일회용 컵들도 이미 환경미화원이 치워버린 후이다. 사람도 서너 명밖에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비슷한 옷차림에 똑같은 걸음걸이를 하고는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다. 다들 자신의 의지 없이 어딘가로 운송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중 한 남자는 K보다 몇 발짝 앞에서 K가 가려는 길만을 골라서 걷는다. 목적지가 같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K는 계속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남자가 맘에 들지 않는다. K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려 하면 그 남자도 그 골목으로 들어가고, K가 건물을 가로질러 가려고 하면 그 남자도 건물을 가로질러서 가고, K가 골목을 빠져나가려고 하면 남자도 그 골목 밖으로 나간다. 남자는 감기에 걸린 것인지 연신 콜록거리며 기침을 한다. 남자의 기침소리에 K도 왠지 목이 간질거리는 기분이다. K는 애써 남자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걷는다. 남자가 이번에는 빌딩 옆으로 돌아간다. K는 잠시 고민한 후 빌딩을 사이에 끼고 남자와는 반대 방향으로 빌딩 옆을 돌아간다. 그 순간, 탕, 하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총소리 같은. K는 순간 멈칫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게 총소리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곳에 총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어디선가 물건이 떨어졌거나 공사를 하는 중이겠거니. K는 다시 건물 옆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무엇인가를 본다. K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할 새도 없이 몸을 옆으로 피한다. 그는 그대로 옆길로 빠져나온다.
 한참을 정신없이 도망쳐 상업지구를 빠져나온 후에야 K는 멈춰 선다. 그는 잠시 벤치에 앉는다. 심장이 요동친다. 그건 뭐였을까. K는 기억을 되짚는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탓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건 분명히 시체였다. 양복을 입고 있고, 죽어서까지 핸드폰과 가방을 손에 꼭 쥐고 있는. 시체는 가슴팍에서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살덩이. K는 생각한다. 시체가 가지고 있는 부피, 흐물거림, 냄새. 그것들은 시체라는 단어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다. K는 온 몸으로 그것의 무게를 느낀다. 소름이 돋는다. 피부에 그 살덩이가 달라붙어 있는 것 같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신의 앞에서 걷던 남자가 살해당했다. K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막상 떠올리려 하니 자신의 앞에서 걷던 남자도, 살해당한 남자도 명확하게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둘 다 비슷한 양복을 입은 것은 기억나나 그게 같은 양복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머리 모양도 비슷한 듯 하면서 아닌 것 같다. 그런 양복에 그런 머리 모양은 너무 흔해서, 오히려 더 분간이 가지 않는다. 지하철 앞만 가도 K의 앞에서 걷던 남자로 보이는 사람이 열 명은 있을 것이다. 그럼 그 남자가 살인자인가? 모르겠다. K의 머릿속에서 남자와 시체는 같은 사람이었다가 다른 사람이 되고, 남자는 시체가 되었다가 벌떡 일어나 총을 든 살인마가 되기도 한다. K는 숨을 들이마신다. 공기가 폐까지 전달되지 않고 콱 막힌 것 같다. 왜 하필, 이런 일이, 나에게? 그는 어리석은 일인 줄 알면서도 누군가 달려와 영화 촬영 중이었다고 말해주길 바라본다. K는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는가 생각한다. 하지만 두렵다. 혹시라도 자신이 누명을 쓰게 된다면? 아니, 그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저것과 엮이고 싶지 않다. 그는 저 살덩이가 그의 인생에 마구 헤집고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벗어나고 싶다. K는 생각한다. 무엇도 하고 싶지 않다.
 콜록, 기침이 나온다. K는 입을 막는다. 날씨가 꽤 차다. 왜 지금껏 몰랐나 싶을 정도로 몸이 으슬으슬하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이 차갑다. 우선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K는 벤치에서 일어난다. 순간적으로 힘이 풀린다. 그는 벤치에 다시 주저앉는다. 손이 떨린다. 그는 주먹으로 다리를 쿵쿵 내리친다. 겨우 다리가 움직인다.

  K는 지하철에 올라탄다. 축축한 먼지 냄새가 콧속에 들이찬다. 약간의 흔들림과 비틀거림, 살내음의 끈적함과 약간의 소란스러움. 적당한 불쾌함들이 K에게 현실에 있다는 안정감을 준다. K는 지하철 문에 기대선다. 건너편의 검은 창으로 자신의 모습이 희끄무레하게 보인다. 비로소 돌아온 느낌이다. 지하철은 언제나와 같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너무 멀쩡하다.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출퇴근 시간에 역 바로 근처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났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긴 하다.
 K는 신고를 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회사로 가지도 못하고 한참을 인근 파출소와 지하철 주변을 서성였다. 한참 후 그가 사건 현장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경찰이 도착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사건이 진행 중이 아니라 종결된 후 다시 그 장소에 돌아와서야, 정확히는 ‘접근금지’라 쓰여 있는 노란색 폴리스라인을 본 후에야 그는 비로소 자신이 엄청난 사건에 휩쓸렸다는 것을 실감했다. K는 자신이 본 것을 경찰에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경찰은 자기들끼리 바빠 보였고, 그는 이만 이 일에서 발을 빼고 싶었다. 이제는 경찰이 알아서 이 일을 처리 할 것이었다. 부를 일이 있으면 경찰이 알아서 찾아오겠지. K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으로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렇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K는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이다. 그들의 얼굴에서 일상은 지루하고 예측 가능한 일들의 반복일 뿐이라는 절망이 보인다. 더러는 그러한 절망을 잊기 위해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맨 끝자리의 여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모든 것이 끔찍하게 지겹다는 표정을 하고는 절망에 덮쳐지길 기다리듯 앉아있다. K는 언제나 지나쳐왔던 이 풍경이 알 수 없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들과 자신 사이에 미끈거리는 막이 있는 것처럼. K는 총소리를 들은 것이 자신뿐일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누군가는 듣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그 시체를 본 사람이 또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지하철 안의 풍경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평범하다. K가 본 것이 그저 환상에 불과한 것만 같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건 정말 환상이 아니었을까. K는 고개를 흔든다. 어지럽다. 그는 벽에 기댄다. 옆에서 지하철 문이 열린다. 사람들과 함께 바람이 지하철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에어샤워를 하는 것처럼 바람이 K의 온 몸을 훑고 지나간다. 정말로 K는 그 살덩이의 촉감이 씻겨나가는 기분을 느낀다. 시체는 없는 것이 되어간다. K는 이 현실이야말로 잘 만들어진 가상 같다는 생각을 한다.

  K는 출근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회사에 도착한다. K가 사무실에 들어가도 누구 하나 그를 맞이하거나 혼을 내는 사람이 없다. K가 없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듯하다. K는 자신이 2년간 단 한 번도 지각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긴 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마 전자 출결 기록 시스템뿐인 것 같다는 생각에 실없이 웃음이 나온다. 힘이 빠진다. K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사무실 구석 쓰레기통 옆에 있는 K의 자리는 파티션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책상 옆으로는 부서로 온 물건들과 이면지들이 쌓여있다. 사람이 앉아있지 않으니 꼭 누군가의 자리라기보다는 물건만 쌓아두는 창고 같아 보인다. K는 자신 또한 그 물건 중 하나라고 느낀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언젠가는 치워질 물건. 서늘한 바람이 셔츠 소매 사이로 들어온다. 소름이 돋는다.
 “왔어? 나 커피 좀.”
 옆자리의 선배가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한다. K는 슬쩍 선배의 모니터를 확인한다. 이케아 쇼핑몰이 떠있다. 그러고 보니 곧 이사를 한다고 했던가. 선배는 마우스 휠을 돌린다. K는 가방을 책상 위에 두고는 커피를 타러 간다. 부장이 K에게 다가온다.
 “끝까지 긴장 해야지.”
 부장이 K의 어깨를 툭툭 친다. K는 부장의 질책에 고개를 숙인다. 부장은 왜 늦은 것인지 묻지 않고 K를 떠난다. K는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장은 K에게 질문을 한 적이 없다. 부장뿐만이 아니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 누구도 K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본 적이 없었다. 면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회사에 지원한 이유가 뭔가? 그 형식적인 질문도 K를 비껴갔다. 질문은 K의 옆 사람, 옆 옆 사람을 지나 다시 K의 옆 사람에게로 갔다. K 차례는 없었다. K가 뽑힌 건 순전히 운이었다. 전문대 출신자 머릿수를 채워야 해서 뽑은 것에 지나지 않은. K가 유일하게 질문이라 할 만한 것을 받은 것은 입사 동기들과 가졌던 첫 술자리에서였다. 
 왜 여기로 왔어요? 생산직이 정규직 전환하기 더 좋을 텐데.
 K는 그저 웃었다. 그 후로 K는 알아서 동기들과 거리를 두었다. 가끔 그들이 술자리에 K를 부르기도 했지만 K쪽에서 먼저 거절했다. 눈치 없이 그런 자리에 그가 가봤자 서로 민망하기만 할 것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선배들은 그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K가 실수를 했을 때, 그들은 한숨을 쉬거나 K에게 화를 낼 뿐이었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를 알려주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준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K는 그것도 요구할 수 없다. 그들과 K 사이에는 딱 그 정도의 관심, 그 정도의 거리가 있다. 계약이 끝날 때까지 K가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K의 자리 주변에 쌓인 이면지들처럼 K도 내다 버려질 것이다.
 괜찮을거야. K는 스스로를 격려한다. 그는 정수기 옆의 커피믹스를 하나 집는다. 포장지에 ‘진짜 우유’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진짜 우유’를 사용한다는 마케팅으로 커피믹스 시장에 진입한 회사의 제품이다. 사실 ‘진짜 우유’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었지만, 매출에는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덕분에 그 팀에 있었던 비정규직 사원은 정규직으로 승진했다고. K도 자신에게도 가능성이 있다 생각한다.
 K는 커피를 가져다 선배의 책상 위에 놓는다. 에취, 재채기가 나온다. 선배가 K를 힐끗 쳐다본다. K는 자리에 앉는다. 선배는 커피를 마시지도 않고는 구석으로 치워버린다.

  K는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 한 팩을 꺼내 마신다. 달큰한 오렌지 과즙이 입안에서 감돈다. 아침에 마셨을 때와는 달리 술술 잘 넘어간다. K는 몇 개 더 챙겨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오렌지주스 팩을 본다. ‘엄선된 100% 오렌지 과즙’이라는 문구가 크게 쓰여 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포장지에 저 문구가 쓰여진 이후 30대 주부들의 매출이 늘었다. 물론 조금만 생각해 보면 100% 오렌지과즙에 파인애플 과즙과 정제수, 액상과당, 합성착향료, 오렌지향은 왜 들어가나 하는 의문이 들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애초에 그런 의문을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차피 만들어 먹지 못할 것이라면 적당히 ‘100% 오렌지 과즙’일 거라고 믿는 쪽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K가 하는 일은 바로 그런 마음을 이용하는 고도의 소비자 심리 분석 마케팅이다. 그는 이 오렌지주스의 성분함량에서 파인애플과즙 농축액의 원산지를 ‘필리핀’에서 ‘수입산’으로 바꾸고는 ‘오렌지 농축액 12%’를 '오렌지과즙 농축액 (오렌지과즙으로 100%)'로 고쳤다. 그 과정에서 오렌지에 달려있던 ‘유전자 변형’ 표시는 사라졌다. ‘엄선된 100% 오렌지 과즙’이라는 문구는 이렇게 K가 성분표시를 상업용으로 고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끔씩 아이들이 먹는 음료수를 유전자 변형 오렌지로 만들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K 자신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기에 자식에게 좋은 것을 먹이려는 부모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법을 어긴 것은 아니니 문제 될 것이 없다. 무엇보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내 아이를 먹여 살릴 수 없다. K는 오렌지주스 팩을 거꾸로 든다. 주스 몇 방울이 K의 입 안으로 떨어진다. 액상과당의 끈적함이 K의 입 안의 남는다. K는 팩을 접어 휴지통에 버린다.
 문득 K는 아침에 본 시체를 떠올린다. 시체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인터넷을 켜고 포털 사이트에 총기 살인사건을 검색한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K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직까지 기사가 안 올라 올 수 있나? K는 스크롤을 내리다가 이번에는 ‘OO역 살인 사건’으로 검색어를 바꿔 다시 검색해본다. 위에서 세 번째에 1시간 전에 올라온 기사가 있다. K는 그것을 클릭한다. 기사에는 오늘 아침에 OO역 근처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쓰여 있다. 경찰은 CCTV 확인 후 용의자를 양복차림의 30대 초반의 남성으로 지목했다고 한다. 기사를 읽던 K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다. ‘살인사건’이라니? 그가 본 것은 ‘총격 사건’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총기 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가장 중요한 ‘총’이 기사에서 사라져있다. 그는 다른 기사를 더 찾아본다. 지역 신문과 인터넷 신문에서 작성된 것이 두 개 더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모두 처음 기사에서 그대로 긁어온 것인지 토씨하나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그리고 또 하나, 용의자로 지목된 양복차림의 30대 남성. K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낀다. 그는 인터넷 창을 끈다.
 “뭐해?”
 K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본다. 선배였다.
 “점심시간이야.”
 선배는 왜 그러냐는 듯 K를 바라본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K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K는 밥을 열심히 목구멍에 밀어 넣는다. 밥을 먹는다기보다는 의무적으로 음식을 몸 안에 채워 넣는 쪽에 가깝다. 머리가 복잡하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먹어서인지 속도 더부룩하다. K는 수저를 내려놓고 고개를 든다. 건너편 테이블에 한 남자가 앉아있다. 순간 K의 눈에 그가 아침에 본 시체로 보인다. K는 눈을 비비고 다시 그를 본다.
 “왜 그래?”
 선배가 K에게 묻는다. K는 아니라고 말하고는 맞은편의 남자를 힐끗 쳐다본다. K의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도 K를 바라본다. K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K의 짧은 대답에 선배는 조금 당황한다. 그는 뭔가 더 할 말을 찾으려다가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듯 포기한다. 선배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만지작거린다.
 “무슨 일 있답니까?”
 K가 묻는다.
 “일은 무슨, 맨 똑같지.”
 선배는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K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에 밥을 우겨넣는다. 똑같은 하루이다. 아무 일도 없는. K는 되뇐다. 실제로 자신 말고는 아무도 살인사건 따위에 신경 안 쓰고 있지 않은가. 콜록, 갑자기 기침이 나온다. 사래까지 들린 탓에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 입 안에 있던 음식이 입 밖으로 튄다. 급하게 입을 막아 보지만 이미 늦었다. K는 상을 닦으며 선배의 눈치를 살핀다. 선배는 수저를 내려놓는다.
 “감기 걸렸냐?”
 예? 선배의 말에 K는 고개를 든다.
 “건강관리 해야지. 자기 몸 관리도 못하고 다니면 위에서 별로 좋게 안 봐.”
 선배는 휴지 끝을 꼬아 그것으로 이를 쑤신다. K는 억울한 마음이 든다. 그런 것도 자기 탓이냐고 하고 싶지만 선배는 K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스마트폰만 보고 있다. 죄송합니다, K는 말한다.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얼굴에서 열이 난다. 다시 기침이 나온다. K는 맞은편의 남자를 본다. 남자는 K를 보고 있었다. K는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K가 있는 곳으로 온다. K는 젓가락을 칼처럼 손에 쥔다. 남자는 K를 지나쳐 계산을 하고는 가계 밖으로 나간다. K는 한숨을 쉰 후 물을 들이마신다. 저 남자가 그 남자일까? K는 고개를 젓는다. 혼란스럽다.
 “사실 오늘 출근길에 사람이 죽은 걸 봤습니다.” 선배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는 듯 K를 바라본다.
 “살인사건이었는데…… 총에 맞은 거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조용해요. 신문에도 안 나오고요. 마치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선배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옮긴다.
 “무슨 대한민국에서 총이야. 니가 잘못 본 거겠지. 진짜 총이면 이렇게 조용하겠어? 그리고 사람 하나 죽었다고 큰일 안나. 하루에 죽는 사람이 얼만데. 그럼 세상 안돌아가.”
 쯧, 선배는 다 먹은 밥그릇에 침을 뱉는다.
 “그래도…… 아이를 데리고 살기에 좀 위험한 곳인 것 같아서…….”
 K는 고개를 숙인다. 눈앞에 시체가 아른거린다. 선배는 K에게 코나 닦으라며 핀잔을 준다. K는 코를 훔친다. 맑고 끈적한 콧물이 묻어나온다. 당황스럽다. 정말 감기에 걸린 건가? 어느새? K의 머리에 순간적으로 아침에 본 남자가 떠오른다. 남자는 계속 기침을 하고 있었다. K는 휴지에 코를 푼다. 선배는 식당 밖으로 나간다. K도 뒤따라 일어난다.

  K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간다. 옥상에는 K와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K는 난간에 붙어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남자는 눈인사를 한 후 고개를 돌린다. K도 눈인사를 한 후 남자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다. 점심시간 후 옥상에서 매번 보는 얼굴이다. 자연스레 그가 어느 부서의 누구인지 알게 되었지만 K는 그와 눈인사 이상의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핸드폰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이다. 스팸인가? 왠지 꺼림칙하다. K가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전화는 꺼진다. K는 핸드폰을 켠다. 부재중 전화에 번호가 찍혀있다. 그는 전화를 걸어볼까 고민하다가,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어, 왜?”
 아내가 전화를 받는다. 밥을 먹고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고 있는 중인지 주변이 소란스럽다. K는 그냥, 이라고 말을 흐리며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꺼낸다. 아내는 잘 들리지 않는지 건성으로 대답한다. K는 한숨을 쉰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K가 말이 없자 아내가 이만 전화를 끊어도 되는가 묻는다. 잠깐만. K는 아내를 붙잡는다.
 “우리도 이사 갈까?”
 “……갑자기 왜?”
 아내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K는 침을 삼킨다. 아내 주변의 소음들이 천천히 사라진다.
 “역 근처에서 사람이 죽었다는데, 좀 위험한 거 같아서. 우리는 애도 있잖아.”
  K가 최대한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본다. 아내는 말이 없다.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곧 아내가 입을 연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우리 형편에 이만한 데가 어디 있어. 애를 위해서라도 견뎌야지. 중학교 고등학교 가면 학교가 얼마나 중요한다. 그리고 이사 가면 어린이집은 어쩌라고.”
 “당신이 돌보면 되잖아. 어차피 당신 월급은 다 원비로 나가는 거.”
 “당신이 책임 질 수 있어? 정사원 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잖아.”
 “알았어.”
 K가 아내의 말을 끊는다.
 “정사원은커녕 계약 연장도 될지 안 될지 아직도 말도 없다면서…….”
 “알았다고!”
 K는 전화를 끊는다. 그는 담배를 땅에 비벼 끄고는 입술을 씹는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K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아내의 말이 맞다. 애초에 아이가 학교를 다닐 것까지 고려해서 자리를 잡은 것이었고, 무리를 해서라도 집을 산 것이었다. 어린이집도 겨우 들어갔다. 다행히 평판도 좋고 시설도 괜찮아 보이는 곳이다. 딸아이처럼 말을 잘 못하는 아이에게는 한글 공부여 영어공부도 시켜준다고. 아이를 위해 꼭 필요한 곳이다. K는 손으로 한쪽 팔을 감싼다. 걱정할 것 없어. 그는 스스로를 다독인다. 아내의 말처럼 그 시체는 K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K에게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불안한 것인지.
 목이 간질간질하다. K는 기침을 한다. 목에서 가래가 나온다. 칵, K는 난간 밖으로 가래를 뱉는다. 가래가 빌딩 아래로 떨어진다. K는 그곳에 시체가 누워 있는 것을 본다.

  오후가 되니 감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모양이다.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 K는 연신 콜록거리며 휴지에 코를 푼다. 열도 나는지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없다. K의 기침소리가 신경이 쓰이는지 건너편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파티션 너머의 K를 째려본다. K는 입을 다물고 소리 없이 기침을 하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기침이 더 멈추지 않는다. 하. 누군가가 짜증을 내는 소리가 들린다.
 “미안한데, 좀 조용히 좀 해주면 안 돼요?”
 K는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휴지로 입을 틀어막는다. 휴지의 먼지가 입 안에 들어온다. 목이 칼칼하다. 자꾸 기침이 나오는 걸 K도 어찌 할 수가 없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왜 이렇게 갑자기? K는 계속 자신의 앞을 막으며 기침을 했던 남자를 떠올린다. 그 때 옮겨 온 것이 분명하다. 그 때 다른 길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하지만 후회해봤자 이미 늦은 일이다. 뿐만 아니라 K는 남자가 자신을 따라 다니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식당에서도 그랬고, 복사를 하러 갔을 때에도, 화장실에 갔을 때에도 남자와 비슷한 사람들이 눈앞에 튀어나와 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K는 휴지를 책상위에 던진다. 그것과 동시에 핸드폰에서 벨이 울린다. 몇 사람들이 K를 못마땅한 눈으로 째려본다. K는 황급히 핸드폰을 잡는다. 전화를 받으려던 K는 발신 번호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번호인 것을 본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고 핸드폰을 진동으로 설정한다. 곧 전화가 꺼진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는 찬찬히 아침을 돌이켜본다. 혹시 자신이 오해를 살만한 일을 하지는 않았는지, 어딘가에 흔적을 남긴 것은 아닌지. 식은땀이 난다.
 K는 인터넷을 키고 포털 사이트에 들어간다. 실시간 인기검색어에는 여자 아이돌과 남자 배우의 스캔들, 화장품 가게 세일 같은 것들이 올라와있다. 살인사건과 관련된 것은 없다. 그는 검색을 해본다. 아까 올라 왔던 기사들에서 몇 개만 추가됐을 뿐, 내용들은 그대로이다. 여전히 기사에서 총은 빠져 있으며, 용의자는 30대 남자로 추정되고 있다.
 정말 선배의 말대로 자신이 착각 한 것일까? K는 고개를 젓는다. 분명 총소리를 들었다. 얼핏 본 것이긴 하지만 남자의 가슴에는 분명 총상이 있었다. 그러나 기사에는 그러한 것이 사라져있다. 기사뿐만이 아니다. 누구도 거기에 총이 있었단 것을 모른다. 총과,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시체 모두 세상에서 사라진 느낌이다. K는 기사를 다시 읽는다. 몇 줄의 문자로 쓰여진 사건은 어느 곳에서나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살인 사건처럼 느껴진다. 쉽게 숫자로 환산될 수 있는, 확률적으로 한 도시 내에서 일 년에 두세 번 정도는 일어날 수 있는 살인. 그걸 의도 한 것이라면, 꽤 성공적인 마케팅일 것이다.
 하지만 K가 본 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런 식의 숫자가 아니라 보기만 해도 무게와 촉감이 느껴지는 살덩이였다. 감기처럼 몸에 찰싹 달라붙어 끊임없이 K를 괴롭히는. 그리하여 서서히 K를 파괴하는.
 K는 첨부된 사진을 클릭한다. 양복을 입은 30대 남성이 양쪽으로 갈린 긴 사이의 건물 앞에 서있다. 사진에는 별다른 설명 없이 ‘현장 CCTV’ 라고만 쓰여 있다. 사진 속 남자가 피해자라는 건지 가해자라는 건지 알 수 없다. 어쩌면 경찰들도 그것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 노이즈도 심한데다가 남자의 뒷모습밖에 찍혀있지 않으니. K는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사진 속의 남자는 K의 앞에서 걷던 남자 같기도 하고, 식당에서 K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 같기도 하고, 복사기 앞에서 만난 남자 같기도 하다. 어지럽다.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 K는 약국에서 사온 감기약을 입에 털어 넣는다. 웅- 이명이 들린다. K는 사무실 안을 둘러본다. 모두가 사진 속의 남자로 보인다.
 “K씨,”
 누군가 K의 어깨를 잡는다. K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떨쳐낸다. 아차, 싶어 뒤를 돌아보니 차장이 서있다. K는 서둘러 일어난다. 아냐 괜찮아. 차장이 송구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K를 말린다.
 “오늘 어디 안 좋아? 하루 종일 집중을 못하네.”
 어쩐 일로 차장이 K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럽다. 괜찮습니다, K는 대답한다. 코에서 콧물이 흐른다. K는 급하게 소매로 그것을 닦아낸다.
 “계약 문제로 할 말이 있는데…….”
 순간, 무언가 터지는 듯한 충격이 몸을 뚫고 지나간다. K의 몸이 휘청거린다. K는 가까스로 정신을 잡는다. 뭐라는 거지? 차장이 하는 말이 들리지 않는다. K는 눈을 깜빡인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소리가 뭉개져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귀에 물이 차있는 느낌이다. 입모양을 보고 차장이 하는 말을 알아맞히려고 해도 잘 보이지 않는다. 니코틴에 찌든 누런 이만 눈에 들어온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린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온몸이 흔들린다.
 “……하네.”
 “뭐라고요?”
 K가 되묻는다. 차장은 대답을 피하듯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가버린다. 왜 저러지? K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다. 그는 고개를 돌린다. 사무실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 다들 왜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다. 맞아, 핸드폰. 전화 왔었지. K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핸드폰이 손에서 빠져나가 바닥에 떨어진다. K는 핸드폰을 주우러 손을 뻗는다. 
 쿵, K가 쓰러진다. 사람들이 K의 주위로 몰려든다. K는 눈을 뜬다.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 역광 때문에 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온통 까만 실루엣뿐이다.
 “많이 안 좋으면 말을 했어야지, 미련한 사람아.”
 다들 한마디씩 거든다. K는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기침을 했는데, 꼭 말을 해야만 아픈 걸 알 수 있나? 말을 했다고 알아주긴 했을까? 에취, K는 재채기를 한다. 재채기가 멈추지 않는다. 사방으로 침이 튄다. K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사란들이 슬슬 뒤로 물러난다. K는 소매로 입을 닦으며 핸드폰을 집어 든다. 부재중 전화 한통과 문자 메시지가 와있다.
 “몸 안 좋으면 오늘은 이만 집에 가게. 어차피 곧 퇴근시간이기도 하고.”
 부장이 말한다. K는 문자메시지를 확인한다.
 ‘혹시 당신이 소영이 데려갔어?’
 
 K는 어린이집에 도착한다. 문 앞에는 퇴근길에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가 몇 명 서있다. K는 그들을 밀치고 어린이집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뒤에서 뭐라 소리치는 것이 들리지만 그는 아랑곳 앉는다. 신경 쓸 겨를이 없다. K는 방을 하나씩 돌아다닌다. 딸은 보이지 않는다. K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참고는 숨을 가다듬는다. 심장이 터질듯이 쿵쾅거리던 것이 겨우 안정이 된다. 그는 다시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이며 어린이집 안을 걷는다. 곧 그는 새싹반에서 나오던 교사 한명과 마주친다.
 “여기 신발 신고 들어오시면 안돼요.”
 중년의 교사가 K를 나무란다. K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들을 삼킨다. 삼켜야 할 말이 너무 많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K는 주먹을 꾹 쥔다.
 “소영이 아빠인데요.”
 목소리가 떨려 감정이 숨겨지지 않는다. 교사는 놀라며 태도를 공손하게 바꾼다.
 “죄송합니다. 애가 아파서 병원에 보냈었어요. 알려드리려고 몇 번 연락 드렸는데 안 받으시더라고요.”
 K는 몇 번인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던 것을 떠올린다.
 “저희 애기 선생님이 아직 첫날이라 애들 이름을 못 외워서 어머니가 오셨을 때 설명을 잘 못했나 봐요. 정말 죄송합니다.”
 교사가 허리 숙여 사과하고는 방안에 손짓을 한다. 안에서 갓 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보이는 어린 교사가 뛰쳐나온다. K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당신들은 내가 어떤 심정으로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알아? K는 어린 교사를 노려본다. 어린 교사는 K와 중년 교사를 번갈아 보더니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연신 죄송합니다를 연발한다. 그녀는 K에게 말하면서도 내내 중년 교사의 눈치를 살핀다.
 “저야 말로 죄송합니다. 전화를 받았어야 했는데.”
 K는 손에 힘을 푼다. 그는 아이가 인질로 잡혀있다는 것을 떠올린다. 그래도 무사하다니 다행이라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소영이는 방금 어머님이 데리러 가셨어요.”
 중년 교사가 말한다. K는 신발을 벗어 손에 든다.
 “애가 어디가 아픈가요?”
 “오후부터 기침을 하더니 열이 높더라구요. 감기 걸린 거 같아요.”
 예? K는 되묻는다. 교사는 무슨 문제 있냐는 표정으로 K를 바라본다.
 “아닙니다……. 수고하세요.”
 K는 황급히 어린이집을 빠져나온다. 교사들은 어리둥절하며 그에게 인사한다.

  밖으로 나온 K는 어린이집을 바라본다. 해가 지고 차가운 네온사인만 잔뜩 켜진 어린이집은 어딘가 기괴한 느낌이 든다. K는 어린이집을 찬찬히 살핀다. 놀이터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는 한쪽 끝이 부러져 있고, 차고로 향하는 철문은 잠겨있지도 않다. 아침과는 달리 안에서 아이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창을 통해 보이는 아이들은 지루한 표정으로 부모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드디어 부모가 데리러 온 아이 하나가 부모의 등에 짐짝처럼 매달려 어린이집 밖으로 빠져나온다. 아이와 부모 모두 얼굴에 피곤만이 가득하다.
 아침보다 바람이 강하다. 기침이 더 심해진다. 목을 붙잡고 콜록거리고 있던 K는 어린이집 옆 쓰레기더미에서 익숙하게 생긴 오렌지주스 박스들을 발견한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그의 회사와 이름과 ‘100% 오렌지 과즙’이 쓰여 있다. K는 바닥에 주저앉는다. 더 이상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근육이 마비되어가는 느낌이다. K는 아침에 보았던 시체의 질감을 떠올린다. 소름 돋는 촉감이다. K는 자신이 시체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 스스로도 말이 되지 않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시체는 K와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그와 시체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탓에 그는 더 강하게, 시체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 뿐만 아니라 딸에게까지 전해지고 말았다.

  K는 집에 도착한다. 현관문이 닫힌다. 쿵. 거실에서 졸고 있던 아내가 깬다. 왔어? K는 대답 없이 신발을 벗는다. 아내는 하품을 하며 TV를 킨다. TV에서 뉴스가 나온다. 딸은 아내의 옆에서 머리핀이 뜯어진 키티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다. K는 아내의 앞으로 가 조용히 앉는다. 기침이 나온다. 뒤에서 아내가 부스럭거리며 일어난다.
 “당신도 감기 걸렸어?”
 응. K는 대답한다. 아내가 조심 좀 하지 그랬냐며 핀잔을 준다. K는 손으로 장판을 쓴다. 머리카락이 손에 묻어나온다. K는 장판에 손톱을 박는다. 비닐의 표면이 늘어나며 손톱만한 상처가 거실 바닥에 남는다. K는 손을 털고 딸을 향해 돌아앉는다. 딸은 작은 손으로 키티 인형의 귀를 잡아 뜯고 있다. K는 그 작은 손을 본다. 벌레같이 꼬물거리는 작은 손.
 “우리 뽀로로 노래 불러볼까?”
 오자마자 뭐 하는 거야. 아내가 웃으며 따뜻한 물을 떠다 준다. K는 딸을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다. 아빠랑 같이 하자. K는 딸의 팔을 잡고 춤을 추듯 손을 흔든다. 인형을 돌려 달라며 칭얼대던 딸도 곧 K를 따라 노래를 부른다. 제멋대로인 발음이다. 음도 박자도 하나도 맞지 않고, 빽빽 소리를 지르는 것에 불과하다. 콜록, 신나서 노래를 부르던 딸이 기침을 한다. 딸의 코에서 맑은 콧물이 흘러나온다. 딸은 아랑곳 않고 다시 노래를 부른다. 문득 K는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막막함을 느낀다. 그는 고개를 숙인다.
 모든 것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K는 딸을 안는다. 그의 등이 들썩인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가 당황하며 묻는다.
 “여보, 무슨 일이야.”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내는 계속해서 질문을 한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어디 아파? 무슨 일이야. 아내의 물음들에 그는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침에 지하철 뒤에서 사람이 죽었어. 그것 때문이라고 하면 이해 해줄까?
 K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총에 관한 것도, 시체에 관한 것도. 그냥 모두 없는 것으로 하기로 한다. K의 아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K를 안는다. 그리고 가만가만 그를 토닥인다.
 뉴스에 짤막하게 아침에 있었던 살인사건이 지나간다. 여전히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사진 또한 아까 본 것과 그대로이다. 사진 속 남자는 건물 앞에 서서 어느 쪽으로 갈지 고민하는 듯 보인다. K는 문득, 사진 속 남자가 자신인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때 내가 어느 쪽으로 갔더라? K는 생각한다. 아무리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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