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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추천해주세요] 반딧불이의 무덤


학창시절 친하게 지냈던 여학우의 남편이 베를린 영화제 단편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그 참에 친구 몇몇이 모여 얘기꽃을 피웠는데, 일본 애니메이션도 주요 얘깃거리였다. 지브리로 대표되는 일본 작품들이 지금의 수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매년 수백 편의 작품들이 치열하게 경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월트 디즈니 사의 스태프들도 <이웃집 토토로>를 보고 항복 선언을 했다는 일화도 있지만, 최근의 한류 열풍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에서만큼은 일본의 입지는 탄탄하다고 보인다.

내가 소개하고픈 작품은 최고의 반정영화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반딧불이의 무덤>이다. ‘호타루노하카’(火垂るの墓)라는 원제가 ‘반딧불의 묘’라는 엉터리 번역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던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배 다카하타 이사오가 만들었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잔혹 그 자체’이다. 떠꺼머리 소년의 ‘소화 20년 9월 21일 밤, 나는 죽었다’라는, 영화의 첫 대사부터가 작품 전체의 무거운 분위기를 예고한다. 아버지가 해군 제독으로 전장에 나가 있는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는 미군의 공습으로 어머니를 잃고 친지 집에 기숙하지만, 피폐해진 인심은 이들을 내몰아 방공호에 노숙하게 한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츠코는 영양실조로 죽고, 동생을 화장한 세이타 역시 탈진한 채 죽어간다. 장면 곳곳에서 묘사되는 세츠코의 귀여운 목소리와 세이타의 의젓한 표정이 약간의 위안거리일지 모르나, 이 모든 것들도 기실은 결말에서의 비감을 더욱 첨예화할 뿐이다.

그리스 비극이 개인의 사적 불행이 아닌, 정당한 가치와 이념의 필연적 충돌을 그리기에 모종의 지적 쾌감을 제공한다면, 이 작품의 잔혹성은 감독이 주인공과 관객 모두에게 일체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현실을 생생하게 전달한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지금껏 꽤 많은 비극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없었던 나도 이 영화가 절반 쯤 진행되었을 때 이미 나머지 절반을 끝까지 볼 수 없을 정도로 비탄에 잠겼었다. 이 작품은 ‘일본인이 전쟁의 피해자인 양 호도하는’ 것이라는 반론 때문에 국내 개봉이 지연된 적이 있지만, 설사 감독 자신도 모르는 그러한 리비도가 작용하고 있을지라도, 보편적 인간애의 관점에서 이미 수작으로 인정될 수 있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등 유럽 원작을 작품화한 이사오의 애니메이션들이 오히려 지금 유럽 아이들의 인기 프로그램이 되었을 만큼, 일본 애니메이션은 결코 무시 못 할 수준에 올라 있다. 거기에는 깊고 다양한 인문학적 콘텐츠가 과격하지 않게 요소요소에 스며 있다. <철완 아톰>의 데츠카 오사무 감독이 노벨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쓰나리 못지않게 일본인의 정신적 스승으로 거론되는 건 결코 이상하지 않다. <라스트 갓파더>를 보고 웃음을 강요하는 짝퉁 영구에게 신지식인의 칭호를 주었던 게 우리의 수준이다. 데츠카 오사무, 다카하타 이사오, 신카이 마코토 같은 거장이 우리에게서 나오기 위한 필요조건의 하나가 바로 그러한 문화 내셔널리즘의 극복이다. <반딧불이의 무덤>은 그 안에 냉철한 인문학적 통찰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현재의 한국 문화산업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힌트를 주는 작품이니 일단 탈국수주의적 자세로 이 작품을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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