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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평론]버티고(2018)

-매달린다는 것에 관하여

사랑이야기와 외줄타기의 공통점은, 끊어질 듯 이어진다는 점이다. 위태로움이 정체성이고 본질이다. 걸음걸음마다 위기 아닌 것이 없으며 한 번 심하게 출렁여야 균형도 잡는다. 역설적이지만 분명한 건, 안전하고 안정되기만 해서는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다는 점이다.  

 

영화 <버티고(Vertigo, 감독 전계수)>는 현기증 나는 일상, 고층 빌딩 사무실에서 위태로이 버티던 서영(천우희)이 창밖 로프공 관우(정재광)와 마주하는 아찔한 고공 감성 영화다. 서영은 IT업체의 계약직 디자이너로 상사 진수(유태오)와의 비밀 사내연애에도, 꼬여만 가는 가정사에도 치이고 지쳐간다. 현기증을 뜻하는 영어단어는 버틴다는 우리말과도 닮았다. 배우들은 눈빛, 목소리, 동작 하나하나에 응축된 감정을 담아 ‘말라가는’ 일상의 세부를 표현해냈다. 이런 세상에서 멀쩡한 것들은 ‘정물(靜物)’뿐이다. 사람들은 휘청거리고 실수하고 튕겨져 나간다. 강화유리 외벽과 그 안의 소파와 벽에 걸린 그림... 굳건해 보이는 탕비실과 질서정연한 사무실. 허나 거기야말로 40층도 넘는 실로 까마득한 허공이다. 발 디딜 데 없이 누추한 사연들이 낱낱이 폭로되기에 적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마저 유리창 바깥에서 ‘보고’있는 로프공 관우가 있어 생겨난 ‘입체감’이다. 그를 뺀다면 눌린 평면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버티고>는 20여 년 전 처음 구상된 시나리오라고 한다. 그땐 현기증의 원인이 개인의 부족함으로 치부돼 숨겨야 할 부끄러움인 양 앓았으리라. 지금은 공고한 시스템으로 당연시되기까지 하나, 각자의 고통은 조금도 줄지 않았을 터다. 여전히 개선책은 안 보인다. 슬프게도 이제는 ‘무르익어서’ 그러려니 굳어졌다. 불시에 사라진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됐을지는 모른다. 매달릴 것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게 무엇이든 어떤 형태이든 말이다. 헛것이어도 상대가 나를 위족(僞足)이나 소모품처럼 이용할지라도, 따지고 말고 할 겨를이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거기가 끝이 아니다. ‘껍데기’를 붙잡고 사는 일이 영영 되풀이될 수 있다.

 

어떤 영화는 당대의 그 모든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나와 준 것만으로 고맙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드러나는 가치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유현목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의 <사람의 아들>을 관람하면서 새삼 느낀 바다. <버티고>의 흥행에 가장 난점은, 이 어지럼증과 절망이 일부가 아닌 사회구성원 전체의 고통이라는 점일 것이다. 모두가 공황장애에 대해 알고 있는 시대에 희망의 한 걸음을 내딛고자 하는 일은 더욱 버겁다. 그럼에도 영화는 위로를 건넨다. 외줄에서 버둥거리는 순간은 동시에 ‘위’로 올라가는 상승의 기회다. 두 발에 닿는 착지의 감각은 그 다음에야 온다. 내내 떠 있었다는 사실조차 허공을 벗어나야 깨닫는 것일지 모른다. 영화는 결말부를 아름다운 하늘빛으로 적신다. 영상으로만 가능할 벅찬 반전과 함께 사람의 체온이 확 와 닿는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매달릴 수 있었기에 버텨온 것임을 오래 잊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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