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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 있는 뚜렷한 보물

“나의 전공 분야는 행동이다.”

비폭력 저항운동의 상징인 마하트마 간디는 자기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엄청난 땅 인도를 식민의 족쇄에서 풀어낸 그의 일생은 행동으로 이어져 있다. 굶기, 집 짓기, 실 잣기, 비료 만들기, 가축 기르기, 환자 돌보기 등 그는 입술이 아니라 맨발로 자신의 이상을 만들어 보였다. 그의 이러한 행위에 대한 비판도 없지는 않다. ‘간디가 가난하게 사는 데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고 한 이도 있지만, 그 의미는 민중의 잠자는 의식을 일깨우는 종소리였다는 점에서 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간디가 행동으로 보인 절정의 사건은 소금 행진이었다.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대한 탄압과 착취의 수단으로 소금에다 세금을 부과하면서 인도인 누구도 소금을 만들 수 없도록 했다. 참을 수 없었던 간디는 1930년 3월 12일 바다를 향해 아메다바드를 떠났다.

“소금법을 어기고 기꺼이 처벌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수만 명이 될 것이다.”

간디의 이 소금 한줌을 얻기 위한 행진을 식민 통치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제풀에 지쳐 시들 것이라고 여겨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행진이 진행될수록 무리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나이, 신앙, 출신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3킬로미터까지 이어졌다.

“비참하게 쓰러져 개들이 내 뼈를 핥을지언정 나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간디는 24일 동안 4백킬로미터를 걸어 단디에 도착했다. 4월 6일 아침, 그는 바다로 걸어가서 허리를 굽히고는 하얀 소금 한줌을 집어들었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추종자들도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소요가 일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갔다. 급기야 진압군은 군중들을 무자비하게 무너뜨렸고, 이후 네루의 표현처럼 ‘마치 용수철이 튀어오르듯 민중들의 열광과 소금 만들기는 들불처럼’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간디의 뜨거운 지지자였던 아나수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대부분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을 말했고 말한 것을 실천에 옮겼다. 그의 정신과 영혼과 몸은 일치했다.”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마치 유리로 만든 눈과 같아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 먼 곳의 희미한 것보다 곁에 있는 뚜렷한 것을 껴안도록 애써라. 그것이 오늘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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