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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

수년 전 동네 교민들 사이에 연속극 ‘대장금’이 크게 이름을 떨쳤다. 시간에 쫓기는 터라 보지 못 했는데, 퇴직하고 나니 이번에는 중국인 동료들이 왜 안 보느냐고 성화다. 그 중에도 의생(醫生) 왕 여사는 오로지 따이장징 보는 재미로 산다며 이미 다섯 번을 봤노라 자랑했다.

드디어 동료교수가 호화판 DVD를 구해와 안사람이 보기 시작하니, 금방 살림에 변화가 왔다. 자기가 수라간 정 상궁이라 착각한 안사람이 임금님 수라에 정신이 팔려 밥 해줄 생각을 않는 것이다. 라면과 감자로 연명하니 속이 허하고 배에서 굴굴 소리가 난다. 50회가 넘는 에피소드가 다 끝나야 밥 한 끼 얻어먹을까 보다.

이것은 조금 불편한 대로 견딜 만한데, 시도 때도 없이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멜로드라마를 강요하며 필자에게 역사 얘기를 시키니 난감하다. 조광조, 사화, 사림파의 승리와 당쟁, 탕평책과 그 결과로 나타난 세도정치, 실학, 평민의 각성과 농민반란 등등 소시 때 배운 대로 둘러대니 복잡해서 듣기 싫단다.

한마디로 훈구파는 모두 당파싸움과 가렴주구 밖에 모르는 역적들이고 사림파는 혁신과 진보의 주체라 한다. 그러나 실은 사림파가 부패 훈구파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나자, 진보세력 자체가 반동화 했고 당쟁은 오히려 격화되지 않았던가? 허나 안사람은 픽션 속의 미남 동부승지에게 매료되어, 그와 같은 사람들이 붕당을 이루어 당쟁 속에 빠져 들어갔던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사림의 기반인 지주, 토호들은 중앙정권 쟁탈을 위해 끝없는 사상논쟁과 의전에 대한 언론 싸움을 벌였으니 이것이 당쟁이다. 서로 바탕을 함께 하는 성리학 신봉자들 사이의 이론 투쟁이었으므로 내용이 시시콜콜 편협하고 소모적이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조금만 주자학에서 벗어나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자유로운 사상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당쟁은 서로의 이론과 학문을 가지고 공론을 펴서 당당하게 경쟁한 것이었으므로 높이 평가할 만한 면이 있다. 파벌싸움 때문에 일본의 침범에 기민하게 대응할 기회를 놓치는 등 천추의 한을 남겼으나, 당쟁은 다른 나라 역사에서 보는 궁중음모, 암살, 닌자가 벌이는 유혈극과는 그 격이 다르다. 나라에 끼친 해악으로 말하자면 외척 안동 김씨에 의한 국가권력의 사유화가 당쟁보다 더 컸다.

안사람은 다시 악덕상인 최판술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백해무익한 이런 무리를 왜 모두 혼쭐을 내지 않고 그냥 두었냐는 것이다. 그러나 봉건사회의 해체와 새로운 상업자본주의 발전에 이들이 끼친 공로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는가? 농민의 잉여노동 수탈을 생산물징수 즉 지세(地稅)로 바꿔 통일시킨 것이 대동법(大同法)이다. 농민은 환영했으나 양반, 지주의 반대로 그 시행이 1609년부터 백년이나 걸렸고, 그나마 함경도 평안도는 제외됐었다. 이 세제 개혁의 결과, 특산물의 상품화, 나아가 상품생산과 판매도 발전하게 됐다. 천민자본가(pariahcapitalist)는 이 사회변화의 전위요 개척자였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들이 너무 쫀쫀하여 왜구와 내통하고 중국과 밀무역하는 정도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큰 악한들을 보라. 만일 악당 올림픽이 있다면 피사로, 코르테즈는 단연 금메달 수상자들이다. 이들이 중남미에서 노략질한 금과 은으로 근대자본주의 경제가 유럽에서 시작됐다는 시각도 있다. 바스코 다 가마와 콜럼버스도 최소한 은메달은 챙겼으리라 나는 믿고 있다.

안사람은 내가 악의 무리를 편들어 두둔한다고 앙앙불락이다. 나는 정 상궁에게 “악덕상인의 동생이며 희대의 독부(毒婦)인 최 상궁과 내통한 사실이 없소이다”며 구차스럽게 변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는 요즈음 ‘칠정울결(七情鬱結)’로 고통 받고 있다기에 그게 무슨 뜻인가 물으니, 요새 말로 스트레스란다. 상한(傷寒)의 증세마저 나타나는데 이게 모두 내가 도섭스럽게 궤변을 늘어놓아 자기를 헷갈리게 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밤새도록 눈을 붙이지 않고 스크린에 코를 맞대고 열중해 있으니 상한에다 소갈(消渴) 증세마저 나타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왕 의사를 본받아 대장금을 다섯 차례 볼까봐 간이 조마조마하다.

우리 집안에 찻잔 속의 태풍을 몰아와 작은 당쟁을 일으킨 대장금. 한 고아가 의사가 되어 살신성인(殺身成仁) 하는 위대한 여성의 이야기는 국민영웅의 창조로서 손색이 없다. 이것을 지은 원작자에게 감사하고, 수많은 분이 힘을 모아 큰 일 이룩한 제작진에게 갈채를 보낸다.




[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