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세상이 떠들썩했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말로는 삼성의 엄청난 비자금이 밝혀졌다고 했다. 폭로였다. 폭로자는 삼성의 직원인 김용철 고문변호사였다. 삼성의 비리 내부고발자. 연일 신문의 첫 면을 장식한 그의 이야기를 두고서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누군가는 그의 출신지를 두고 지역감정을 일으켰고 한편에서는 용기 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이야기는 그가 ‘배신자’라는 사실이었다.
배신은 믿었던 이에게 상처를 남긴다. 개인 사이의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지 못했을 때, 이는 나아가 조직의 문제로 커질 수 있다. 대다수의 내부고발자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런데 이들의 선택은 자신을 위한 것일까, 사회 공익을 위한 것일까? 용기 있는 자는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그 문제가 우리가 경계하는 대기업·정부의 부패와 관련된 문제라면 더욱 그러하다. 나 또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를 지지한다. 하지만 그들은 내부고발자로 불린다. 공익에 도움을 주는 사람인데 왜 ‘고발자’로 불릴까. 내부고발자라는 단어 자체는 기업의 기밀을 폭로하는 사람으로 이미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들을 ‘휘슬블로어(whistle-blower)’라 부른다.
호루라기를 부는 이는 사회 질서에 헌신하는 경찰관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겉으로 내부고발자를 칭찬하면서도 결국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있던 것은 아닐까. 내부고발은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다. 사회적으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보다 깨끗한 조직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바가 크다. 다만 특정 기업과 한 사람의 희생이 뒤따른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정당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려해 보아야 한다. 이를 통해 내부고발자의 의미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그가 사회적으로 낙오되지 않도록 보호법의 경계가 보다 확실시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