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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학년도 1학기 초빙, 회화과 박성열 교수

‘추억이 가득한 모교에서 강의할 수 있어 영광’

 

올해 1학기 우리학교는 교수 20명을 초빙하였다. 그중 우리학교 92학번 회화과 출신 박성열(회화) 교수는 수많은 개인전과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가하며 작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해 가르치는 선생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박성열 교수를 만나 모교에 초빙된 소감을 들어보았다.

 

Q. 모교에 교수로 초빙되신 소감이 어떠신지요?

그리운 스승님들의 뒤를 이어 이 자리에 서게 돼 매우 영광입니다. 부담감도 있지만 학생들의 기억 속에 최선을 다해 가르치는 선생으로 남을 수 있도록 열심히 강의하겠습니다. 또 저의 추억 속 낡은 교정이 전보다 더 아름답고 깨끗하게 보존되고 있어 더욱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Q. 모교에 오시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국내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어 개인전을 열기도 했고 ‘아트부산’과 같은 국내 아트페어부터 홍콩, 싱가포르, 두바이, 중국 등지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다양한 아트페어에 참가해 작품을 출품했습니다. 또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발전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작품 작업 외에도 취미반 수업, 대학교 시간강사 등 일주일에 한 번은 외부에서 미술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Q. 회화를 전공으로 선택하신 계기는 무엇이었는지요?

인생에 대한 확신과 공부에 대한 의욕이 없던 재수생 시절, 그나마 흥미를 느꼈던 것이 그림이었습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미술대학 진학을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그림에 몰두하다보니 자연스레 그림 실력이 늘게 되었습니다. 그다지 거창한 계기 없이 시작한 미술이었지만 점점 재미와 성취감을 느꼈고,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린 결과 4개월 만에 우리학교 산업미술과(현 산업디자인과)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산업미술과에 진학하고 보니 제 예상보다 그림을 그릴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이 길이 맞는지 고민하던 도중 우연히 회화과 실기실 앞을 지나가면서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바로 그 모습이 제가 바라던 대학생활이라는 생각이 들어 과감히 또 한 번 수험생활을 시작했고, 그 결과 우리학교 회화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Q. 대학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교수님이 계시는지요?

많은 분들이 떠오르지만 이원희(회화‧퇴임) 교수님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원희 교수님은 학생들을 인솔해서 러시아에서 연수할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하셨고, 국내에서 열리는 여러 러시아 미술 전시회에 데려가시는 등 저희들에게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교수님과 관련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한 학기 내내 캔버스만 만들었던 일입니다. 교수님께서는 평생 동안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재료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하시며, 학생들에게 캔버스를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초반에는 많은 실패가 있었지만 학기말 즈음에는 제법 그럴싸한 캔버스를 제 손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비용 측면에서는 캔버스를 구매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었지만 한 학기 동안 직접 만들어 써보니 캔버스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토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Q. 대학 졸업 후에 러시아로 유학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러시아 유학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1998년 졸업 후, 같은 해 6월에 러시아로 떠나 3년간 유학을 했습니다. 처음 유학을 결정할 때 주변의 반대가 심했지만, 대학교 4학년 때 다녀온 러시아 연수와 러시아 미술 전시회 등을 경험하며 확신을 가지고 유학을 선택했습니다.

러시아 유학 시기에 그림 공부도 많이 했지만, 우리나라의 미술 교육 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미술대학들은 여러 과목을 개설해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러 교수님들에게 다양한 지식을 배울 수 있어 좋은 점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체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러시아는 한 명의 교수 아래서 공부하면서 깊이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제도가 한국의 미술대학에도 도입된다면 학생들이 더욱 빠르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후배이자 제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학생들도 훗날 되돌아봤을 때, 우리학교에서 공부한 것이 큰 행운이었다고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타고난 재능이 부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반드시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겼듯이 학생들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