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음동두천 24.3℃
  • 맑음강릉 27.7℃
  • 맑음서울 24.4℃
  • 맑음대전 25.2℃
  • 맑음대구 27.5℃
  • 맑음울산 24.5℃
  • 맑음광주 26.4℃
  • 맑음부산 22.0℃
  • 맑음고창 23.7℃
  • 맑음제주 20.3℃
  • 맑음강화 20.2℃
  • 맑음보은 24.7℃
  • 맑음금산 25.1℃
  • 맑음강진군 25.8℃
  • 맑음경주시 28.1℃
  • 맑음거제 23.8℃
기상청 제공

국위 선양이라는 허상

월드컵은 언론과 기업들에 의해 어느순간 민족의 시험대로 둔갑했다

그 뜨겁던 2002년 여름 이후, 축구는 더 이상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며 월드컵은 ‘민족’의 이름으로 성전(聖戰)이 되었다. 2006 독일 월드컵 관전(觀戰)은 말 그대로 전쟁을 맞이하는 각오를 요구하고 있다.


5월 11일 최종 엔트리가 발표된 직후 가진 선발 선수들의 인터뷰나 그 가족들의 반응 또한 출사표를 방불케 했다. 우려 속에 선발된 송종국은 “다리가 풀려 쓰러질 때까지” 뛰겠다고 했고, 신예 조원희의 어머니 최병숙 씨는 12일 방송된 [MBC 모닝쇼]와의 인터뷰에서 아들에게 “그라운드에서 죽어도 울지 않겠다”며 “죽을 힘”을 다해 싸울 것을 주문했다. 이쯤 되면 월드컵 선발을, 나가서 죽으라는 전시의 특공대 차출 정도로 착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 이렇게 비장해 진 것일까. 살기마저 감도는 이 섬뜩한 단어들이 진정 축구선수들을 위한 ‘응원’이란 말인가?


이제 우리는 도저히 월드컵을 그저 게임으로 즐길 수 없게 됐다. ‘결전’을 치르기 오래 전부터 이미 나팔수가 된 언론의 표현대로라면, 우리의 첫 상대 토고는 민족의 제단에 바쳐질 제물이 돼야 하는 건 당연하고 팀 전력이 잘 드러나지 않은 토고와의 경기는 마치 복마전에 비견되고 있다. 토고 선수들은 은연중에 ‘트로이의 목마’를 방불케 하는 음흉한 ‘적’들이 되었다.


TV는 온통 월드컵에 잠식되었다. 하루라도, 단 한 프로그램이라도 월드컵에 대한 언급 없이는 진행이 불가능한 이 붉은 화면 앞에서, 그 흔한 ‘시청자의 볼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조차 온데간데없다. 월드컵 열기를 주도 아니 선동하고 있는 KTF와 SKT의 광고들을 필두로 애국가마저 응원가로 동원됐는가 하면 자사 프로그램에 등장했던 ‘꼭짓점 댄스’까지 범국민적으로 띄우며 대한민국 국영방송이 가세했다. 민심과는 별개로 요란한 그들만의 잔치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6월을 목전에 둔 지금 실체 없는 전파 싸움은 터질 듯이 달아올라 있다.


막상 조사결과를 보면 국민들의 희망은 16강인데 언론은 노상 ‘4강’을 당연시하고 있다. 그 성적표가 실로 ‘기적’이었음에도, 이제는 기적의 재현을 한 치의 의심 없는 기정사실처럼 말한다. 그 무서운 강요 뒤에 민족주의가 버티고 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사전적 의미의 민족국가를 이루어보지 못했던 우리나라는,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부재할 수밖에 없는 ‘민족 영웅’의 신화에 도취돼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이후, 이 월계관은 ‘국민영웅 황우석’에게 돌아갔다. 황우석 신화가 거짓으로 드러났음에도 지지자와 반대자로 나뉘며 이상 과열 됐던 국론이 이에 대한 반증이다.


황우석이 무대에서 사라지기 직전, 언론은 재빨리 미국 슈퍼볼 MVP 하인즈 워드를 발굴해 냈다. 미식축구의 게임 룰 하나 모르고 슈퍼볼이 뭔지도 모르던 대다수 국민들은, ‘영웅’ 워드의 한국 방문 이후 연일 헤드라인 뉴스를 장식하는 그와 그의 한국인 어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봐야 했다. 여태 잘 활동해왔던 가수 인순이를 갑자기 공익 광고에 출연시키는가 하면, 왕년의 최고 스타로서 모자람 없는 인기를 누렸던 윤수일이 별안간 가요 프로그램에 연속 등장했다. 윤수일은 뒤늦게 ‘혼혈’ 컨셉으로 호출 당한 셈이다.


워드가 흑인혼혈이라는 점에 착안해 때아닌 캠페인이 온 나라를 휩쓸기도 했다. 진작부터 대두 됐던 혼혈인 차별에 대한 문제가 지금 폭발 직전에 이른 것도 사실이지만, 그 모든 문제점과 고발 프로그램들이 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다뤄지다가 워드의 귀국과 함께 사라졌다는 데 중대한 함정이 있다. 워드 열풍이 각종 언론을 휩쓸고 간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미식축구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우리나라에 이른바 용병으로 와서 뛰고 있는 수많은 외국인 운동선수들에 대해 성적 이외의 것에 관심 없듯이, 워드의 경우는 한국인 어머니를 뒀다는 사실만이 관심거리였던 것이다. 한국인의 ‘피’가 섞였으되 워드는 명백한 미국인이다. 미국인들이 워드를 칭송하는 것은 그가 슈퍼볼 MVP이기 때문이지 한국계이기 때문이 아니다. 아울러 그의 가치는 오직 운동선수로서의 능력에 국한돼 있을 뿐이다. 우리가 염원하듯이 국위 선양이나 한국에 대한 괄목상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축구선수 샤샤가 아무리 K리그에서 선전했어도 한국인은 그의 조국 세르비아를 대단한 나라로 여기지 않았다. 팔등신 러시아 미녀들이 각종 홈쇼핑의 속옷 광고계를 평정해 버렸지만, 우리나라에서 러시아의 국위는 조금도 선양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쿠바는 2006년 제 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준우승하였다. 비록 준우승에 그쳤지만 쿠바는 세계야구계에서 오랫동안 최강국의 지위를 누려온 나라이다. 하지만 야구와 쿠바의 국제적 위상은 전혀 별개다. 축구강국 브라질은 월드컵 우승을 다섯 번이나 했지만, 축구를 잘한다고 해서 잘 사는 나라가 된 것도 행복한 나라가 된 것도 아니다.


월드컵은 언론과 기업들에 의해 어느 순간 민족의 시험대로 둔갑했다. 국력과 국위 선양의 기치 아래 선수들은 죽을지언정 져서는 안 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방송은 시청률을 위해 기업은 이윤을 위해 선전선동에 막대한 공을 들이고 있는 동안, 선수들은 피로에 지치고 국민들은 흥을 잃었다. 세계는 축구공처럼 공평하게 둥글다는 FIFA의 슬로건은 축구경기 중에만 통하는 룰이다. 그마저 로비 의혹과 오심 등으로 공정성을 잃은 지 오래다. 애국가가 월드컵 응원가로 채택되면서 안익태와 애국가의 친일 논란이 본격화된 사실이 입증하듯이, 광고 속의 ‘민족’은 허위다. 축구를 통한 국위선양 또한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불과하다. 부디 차분해지자. 경기는 경기로서 가볍게 즐기는 성숙함이 진정한 국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