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음동두천 15.3℃
  • 구름조금강릉 15.7℃
  • 맑음서울 16.6℃
  • 맑음대전 14.0℃
  • 구름많음대구 18.3℃
  • 구름많음울산 16.8℃
  • 구름조금광주 14.8℃
  • 구름많음부산 17.3℃
  • 맑음고창 11.9℃
  • 구름조금제주 15.8℃
  • 맑음강화 15.4℃
  • 맑음보은 12.5℃
  • 맑음금산 12.5℃
  • 맑음강진군 15.1℃
  • 구름많음경주시 17.8℃
  • 구름많음거제 14.8℃
기상청 제공

KBS 8월 사태, 그리고 이명박 정권의 '방송 장악 시나리오'


2008년 8월은 훗날 어떻게 역사에 기록될까. 사람들에게는 금메달의 감격 속에 치러진 베이징 올림픽이 제일 먼저 떠오를지 모른다. 그러나 환호 소리에 묻힌 ‘비극의 역사’가 있었다. 바로 KBS에서 벌어진 ‘방송 장악’ 드라마였다.

지난 8월 8일. 베이징 올림픽의 팡파르가 울리던 그 날 KBS에 18년만에 경찰력이 투입됐다. 4백여 명의 사복 경찰은 KBS 본관 3층 대회의실 앞에서 이사회 저지를 시도하며 절규하던 KBS 직원들을 폭력적으로 해산시켰다. 이 사이 이사회는 정연주 사장 해임 제청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이명박 대통령은 제청 사흘만에 해임안에 서명했다. 그리고 이사회의 온갖 탈법·불법 논란, 청와대의 개입설 속에 올림픽이 끝난 이틀 뒤, 후임 이병순 사장이 임명됐다. 불과 18일 동안에 벌어진 일이다.

‘KBS 8월 사태’는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서글픈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방송의 생명은 정치적 독립성이다. 아직은 미흡하지만, 지금 KBS가 어렵사리 완성시켜가던 독립성은 길게는 수십 년에 걸친 언론 민주화 운동의 산물이었다. 이 공든 탑에 날카로운 균열이 생겼다. 바로 이명박 정권의 이른바 ‘방송 장악 음모’ 때문이다.

KBS 정연주 사장을 몰아내고 새로운 사장을 앉히는 과정을 ‘방송 장악 음모’라고 볼 수 있는 방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국가기관들이 총동원돼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 KBS에 대한 압박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라 불리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3월 취임식 바로 다음 날 김금수 KBS이사장을 만나 정연주 사장 사퇴를 종용했다.

6월이 되자 총공세는 시작됐다. 국세청이 KBS 외주제작사에 대한 세무조사에 들어갔다. 감사원은 KBS 특감에 돌입했다. 정연주 사장의 세무조정 배임 혐의를 수사하던 검찰은 정 사장의 소환조사 방침을 밝혔다. 방통심의위원회는 KBS 9시 뉴스의 감사원 특감 관련 보도가 불공정하다며 징계 결정을 내렸다. ‘친 정연주’ 성향으로 분류되던 KBS 신태섭 이사가 동의대 교수직에서 해임되자 방송통신위원회는 한나라당 국회의원 후보로도 거론됐던 인물을 보궐 이사로 임명해 KBS 이사 11명 가운데 친여 성향은 6명으로 과반을 넘었다. 감사원은 보통 4~5개월이 걸리던 특감 결과 발표를 불과 55일만에 내놓고 정연주 사장의 해임을 이사회에 요구했다.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감사원, 국세청, 검찰, 대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관들이 한꺼번에 연출한 이 조치가 ‘오비이락’이라고 믿을 사람은 없다. 더구나 정 사장이 해임되고 후임 사장 응모를 접수받던 기간인 8월 17일, 정정길 청와대 대통령실장,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유력 후임 사장 후보로 거론된 김은구 KBS 사우회장 등이 서울 모 호텔에서 모여 ‘KBS 사장 대책회의’를 연 사실은 ‘방송 장악 음모’라는 해석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한 셈이 됐다.

온갖 법적 논란을 무릅쓰고 정연주 사장 해임과 새 사장 임명을 강행하는 과정 또한 주목할 만하다.

특감 과정과 결과 자체도 시빗거리였지만 감사원이 KBS 이사회에 해임을 요구한 것은 법률적으로 얼토당토하지 않다는 비판이다. KBS 이사회에 KBS 사장 해임제청권이 없을 뿐더러 대통령에게도 해임권이 없다는 지적이다.

2000년 통합방송법 제정 당시 대통령의 KBS 사장 ‘임면권’은 ‘임명권’으로 개정됐다.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대통령의 면직 권한을 박탈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임기 중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박지원 민주당 의원을 통해 증언했다. 법 제정 과정에 참여했고 제 1대 방송위원장을 지낸 강대인 건국대 교수도 이 사실을 확인했다. 독일, 영국, 일본 등 선진국 가운데 대통령이나 총리가 공영방송 사장의 해임권을 가진 나라는 없다.

그러나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제 2차관, 한나라당은 ‘임명권이 있으면 해임권도 있다’는 강변으로 해임을 변호했다.
신태섭 전 KBS 이사의 해임 과정도 법적 다툼의 여지가 충분하다. 동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신태섭 전 이사는 ‘학교의 동의 없이 KBS 이사가 됐다’는 이유로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동의대측은 그가 이사가 된 지 1년 6개월이 넘어서 이를 문제 삼았다는 점에서 ‘교육과학부의 감사 압박’에 굴복했다는 설이 힘을 얻었다.

따라서 동의대의 해임 조치 자체가 법적으로 논란이 있다. 해임 무효소송도 진행 중이다. 아직 사법부의 최종 결론이 나지 않았는 데 방송통신위원회가 나서 법률적 판단을 한다는 것도 무리다.

또한 방송통신위원회는 KBS 이사 추천권은 있으나 해임권은 없다. 방통위가 결격사유로 꼽은 ‘징계를 받은 자는 KBS 이사가 될 수 없다’는 규정도 이사 임명 당시에 적용되는 것이지 임기 중 적용할 수 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더욱이 방통위는 신 전 이사 교체 건을 전체회의 긴급 안건으로 올려 결정했다. 방통위 전체회의의 안건은 긴급 안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전 공지하도록 규정돼 있다.

KBS 이사 문제가 긴급 안건으로 올라갈 사항인지에도 의문이 많다. 검찰이 수사 중인 정연주 사장의 배임 혐의도 ‘덮어씌우기’라는 비판이 나오는 실정이다.
순리적이라면 이렇게 많은 법적 논란을 무릅쓸 이유가 없다. 정권이 KBS 사장을 교체해야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지 않고서는 밀어붙이기 어렵다.

그만큼 이명박 정권에게 KBS는, 그리고 방송은 반드시 통제해야 할 대상이었다.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를 가장 철저하게 검증한 곳은 KBS와 MBC였다. 당선 뒤에도 장관 후보 등 공직자 검증 등에서 KBS는 굵직한 보도를 여럿 남겼다. 급기야 미국산 쇠고기 문제가 불거진 ‘촛불 정국’에서 방송은 정권에 적잖은 타격을 줬다. 조선·중앙·동아 등 거대 보수신문이 아무리 정권을 엄호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방송과 신문은 일반 국민에 대한 미디어로서의 영향력에서 큰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은 이후 여러 차례 방송 장악에 대한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지난 7월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KBS 사장의 경우 중립성 측면도 고려해야겠지만, 정부산하기관장으로서 새 정부의 국정철학과 기조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려는 의지가 있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최적임자인지를 한 번쯤 검증하고 재신임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본다.”

KBS 사장을 갈아치운 데 이어 KBS 2TV, MBC, YTN의 민영화 설이 구체화되고 있다. 민영화는 조·중·동 보수신문과 재벌이 방송사를 소유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결과를 부를 수 있다. ‘방송 장악 시나리오’는 현재 진행형이다. 과연 이명박 정권은 이 시나리오를 성공리에 완성할까?

한 중앙 언론사의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언론을 장악하려고 시도한 역대 어느 정권도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언론은 반드시 저항하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에 대해 훈련을 쌓은 우리 국민들이 이를 상식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당장은 모르지만 결국 정권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