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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신문을 통해 시사를 보는 눈을 기르자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소화해내는 것이 중요


우리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정보통신 혁명은 이를 촉발시켰다. 인터넷에 이어 텔레비전은 집 밖으로 나와 활개를 친다.


이 현상은 정보의 홍수라는 필연을 낳았다. 언제 어디서나 눈만 뜨면 따끈따끈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측면이 적지 않다. 여과되지 않거나 왜곡 가공된 그것들이 전방위에 걸쳐 노출됐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많은 젊은이들이 진지한 정보를 외면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정보의 바다’라고 일컬어지는 인터넷을 뒤지고 다니지만 게임과 채팅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정보를 재가공하고 전파하는 중심에 서 있던 신문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밀려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 처지에까지 놓였다.


그러나 세상을 제대로 읽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 내는데는 신문만한 스승이 없다고 단언한다. 신문에는 방송, 인터넷이 흉내 낼 수 없는 세상의 흐름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신문을 통해 세상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신문에는 세상의 흐름이 담겨 있다


멀티미디어, 인터넷시대로 정의되는 21세기 초입, 수 천년의 역사를 가져 온 신문은 독자적인 영역을 고수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보를 쏟아내는 방송매체의 속성에 그 원인이 있다. 아무리 텔레비전 앞에서 꼼짝 않고 뉴스만 본다고 해도 요란한 화면과 기자의 간략한 리포트만 스칠 뿐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파악하기란 쉽지가 않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모든 신문이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만들어 올리지만 인터넷을 통해 세상 흐름을 파악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인터넷은 폭발적인 양의 정보를 담아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는 특정한 정보를 원하는 사람이 검색을 통해 쉽게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뉴스의 중요도를 구분하고 사회에 중요한 이슈를 게기하는 능력은 신문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
반면 신문은 세상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 사회에 유용한 것, 알려야 할 만한 것들을 추려낸다. 이를 꼼꼼하게 취재해 이슈화 하고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내용을 분석한다. 사설이나 칼럼 등의 형식을 통해 여론을 주도한다.


이런 기능을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신문이란 활자매체가 보여주는 일목요연함을 당해내긴 어렵다.


방송과 인터넷은 수용자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매몰돼 버리는 매체인 반면 활자매체는 독자가 기사를 읽고 난 후 차분하게 전후 사정을 짚어보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은 진실만 말하는가


사람들은 신문이나 방송 등 매스미디어를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대화 도중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팽팽한 논쟁을 벌이다가도 “신문에 났다니까” 한마디만 하면 반박의 여지가 없어진다.


국민들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고 있는 신문은 과연 진실만을 말할까. 신문에 난 이야기는 모두 믿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신문은 너무 많은 거짓말과 실수를 하며 너무 가볍게 현상을 진단한다. 심지어 신문사의 이익을 위해 특정 부분만 부각시키는 수법으로 독자를 오도하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이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다. 아예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권력의 압력에 못 이겨 사실을 왜곡해 전달하는 사례가 그 대표적이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이런 일이 많았다.


신문이 진실하지 못했던 대표적인 사례를 훑어보자.


지난해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황우석 교수 줄기세포 파문’이다. 세계 유력 과학 잡지인 ‘사이언스지’에 황 교수 논문이 게재된 뒤 우리나라 언론은 사이언스지에 글이 올랐다는 사실만으로 더 이상의 진위여부 파악은 필요치 않았다. ‘국민적 영웅’으로 띄우기에만 급급했다. 의혹을 제기하는 젊은 과학자들의 외침은 공적으로 내몰렸다.


몇 달 후 황 교수와 줄기세포는 어떻게 되었는가?


시계추를 26년 전으로 되돌린다. 5월 광주.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해 일어난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는 국내 모든 언론에 의해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됐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아래서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했다. 정권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예 보도할 수 없었고 마음에 드는 내용만 나갈 수 있었다.


언론이 권력 앞에 무기력하게 굴복한 탓에 국민들의 눈과 귀는 가려졌다.


1986년 10월에 보도된 ‘평화의 댐’ 오보도 압력에 의한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북한이 금강산 지역에 건설하는 댐이 전쟁용으로 폭파될 경우 서울은 물바다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국민들이 두려움에 떨 만한 내용들이었다. 이런 여론을 업고 평화의 댐 건설 모금 운동도 펼쳐졌다.


진실은 1993년 6월 감사원 감사에 의해 의도적으로 과장된 발표였음이 드러났다. 민주화 요구가 확산되자 위기에 몰린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하고 신문을 비롯한 언론이 이에 협조한 결과였다.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권력의 눈치를 보는 시절은 지났다. 그러나 자본력으로 무장한 광고주들의 구미에 맞게 기사를 바꾸거나 꾸미는 사례는 여전하다. ‘보이지 않는 압력’은 늘 언론의 오보와 거짓말을 조장하는 요인이 된다.

신문을 통해 세상을 똑바로 보려면


“신문에 났어”라는 말로 사실을 증명하려는 태도는 어리석다.


그렇다고 신문을 불신하는 것도 잘못이다. 보도 내용의 대부분은 사실이며 정보다. 일부를 차지하는 잘못된 보도를 어떻게 구분하느냐가 핵심이다.


우선 맹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맹신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더욱이 마감시간이라는 제한된 틀에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신문을 무조건 믿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은 생각한다. 생각이란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사물의 이모저모를 분석하는 것이다.
신문 읽기도 마찬가지다. 맞지 않는 부분이 없는지,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의심해 볼 만한 모순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이런 노력이 전제될 때 신문은 우리에게 바른 정보를 주는 유용한 채널이 된다.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소화해내는 일, 그것은 단지 신문을 통해 시사를 올바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꼭 필요한 덕목이다.





[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