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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에 일궈낸 눈물의 땅, 우토로

그 땅의 진정한 해방은 언제 오는가?

해외동포 700만 시대, 조선의 식민지 침탈과 근대화과정 100년 남짓 되는 사이 700만 명의 동포들이 해외로 흩어져 나갔다. 이 중 일부는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함이었지만, 대부분 그 이주의 발단이 일제의 식민화 과정 속에서 차별과 탄압에 못이겨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중앙아시아, 중국, 연해주, 유형의 땅 사할린으로, 또 멕시코의 애니깽 노동자로,, 이름조차 다 알기 힘든 조선인들이 해외로 끌려나갔다.

1938년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총동원령을 법률로 제정해 조선 각지에서 일부는 군인으로, 또 징집을 피하기 위해 노무자로 일본에 들어갔다. 우토로도 마찬가지로 당시 군수기업이었던 닛산차체의 주도 아래 군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노무인력으로 동원되면서 생겨났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그 노무자들을 그대로 방치하면서 생겨났다. 이후 주민들은 노동자 숙소, ‘함바’에서 생활해야 했다. ‘우키시마호폭침사건’처럼 고국에 돌아가는 도중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또 고국에 돌아가도 이제는 기다리고 있는 가족도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그들은 그 땅에 계속 머물러야 했다. 이제 강제동원 1세들이 다 돌아가시고 얼마 남지 않은 상태이지만, 그 후손들에게는 강제 동원의 기억이 뼛속에 스며 있다.

전후 우토로 지역은 닛산차체의 소유로 넘어가 1987년 그 땅을 전매할 때까지, 주민들의 요구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기본적인 생활기반시설은 물론, ‘우토로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주민들은 이곳에 집을 짓고, 도로를 닦고, 학교를 만들어 삶의 터전을 다졌다. 1965년 한일협정을 맺을 때까지, 재일조선인들에게는 아무런 법적권리가 없었다. 일본정부는 이들에게 보상해야할 의무도, 도의적 책임도 없었다. 그토록 기대했던 보상도 한일협정을 통해 한국정부가 독차지했고,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버림받은 채 우토로의 주민들은 평생을 살아와야 했다.

2005년 우토로문제가 한국 사회에 이슈화된 것은 해방 60년 만이었다. 60년간 자신들을 버렸던 조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공공연하게 우토로 지원을 약속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한 달 월급을 우토로에 기부하겠다고 했다. 14만 명에 이르는 국민들이 우토로에 기부했고, 외교통상부 직원들은 월급의 일부를 쪼개 2천만원을 기부했다. 곧 해결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이런 국내적 움직임과는 반대로 외교를 펼치고 있었다. ‘해외동포 지원의 형평성’, 즉 어느 한 곳만 편중되어 지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실상 외교부는 그 ‘형평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해외동포에게 단 한 번도 지원한 적이 없었다.

우토로 문제에 대해 외교부의 노력은 이렇다. 2007년 9월 30일, 우토로문제가 이슈화된지 2년 반 만에, 청와대가 우토로에 4억엔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방침은 국회로 넘어가 예산이 통과되어야 효력이 발생한다. 그 과정에서 외교부가 기울인 각고의 노력 끝에 10월 15일 있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예산결산기금심사소위원회에는 15억원으로 상정이 됐다. 청와대가 4억엔(32억원 상당)으로 결정한 것을 깎아 15억원으로 만드는 기술, 외교부가 가지고 있는 외교력은 국내에서만 발동된다. 외교부의 역할은 일본과 협의해 재일동포들의 차별문제를 해결하고, 고령 1세대들에게 과거를 보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일본 정부는 패전 이후, 해외에 사는 니켄징(일본의 재외동포) 본국송환을 시작해 지금까지 온가족이 고국에 돌아와 정착해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전쟁 당시 사망한 일본인의 유골은 물론, 당시 중국이나 러시아 땅의 일본 형무소 내에 갖혀 있다가 귀국하지 못한 범죄자까지 자국으로 귀환시키는 일본에 비해, 한국정부는 이런 문제를 너무 도외시 해왔다.

그렇다고 우토로 문제를 모두 외교부에만 떠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흔히 ‘재일동포’하면 돈이 많아서 한국에 투자하는 부자쯤으로 생각하지 않았는가? 현재 한국 정부의 정책이 그렇다. 해외동포를 대하는 입장에 있어, 소위 선진국인 미국, 일본에 사는 동포들에게는 그 나라 국적을 취득하더라도, 혈통으로 동포라는 것이 증명되면 자유출입국을 보장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버림받고 소외받은 지역, 즉 중앙아시아, 사할린, 중국의 동포들은 외국인 취업비자를 주고, 아무리 우리말을 잘하고 한국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도 외국인으로 받아들인다.

한국과 일본 양국정부가 모두 무시하는 우토로를 우리는 왜 살려야 하는가? 주민 200명 중 90%만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고, 나머지 10%는 일본에서 북한으로 분류하는 조선적이다. 조선적은 UN에서 난민으로 인정하는 무국적 지위이다.) 우토로 문제가 생겨난 것은 근본적으로 일본의 잘못이지만, 그동안 우리가 저지른 잘못도 있다.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경부고속도로를 깔고, 포항제철을 만들어, 우리만 잘살겠다고 그들을 무시한 우리의 잘못이기 때문에 우토로를 살려야 한다. 120만에 가까운 잔류 조선인들의 전후 청구권을 모두 말소해, 이제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선진국에 들어섰으면서도, 일본에 끌려가 그래도 조선 사람이라고 정체성을 지켜온 그들에게 우리가 해준 것은 무엇인가?

일본사회의 민족차별은 매우 정치적이며 교묘히 이루어진다. 우토로는 그런 보이지 않는 차별이 가시화된 역사의 현장이다. 수 십 년 전의 일본에는 우토로와 같은 땅이 많았다. 고향을 잃은 조선인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공동체를 형성해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차별을 볼 수 있는 마을이 우토로를 제외하고는 남아있지 않다. 차별은 남아있지만 차별을 볼 수 있는 현장이 없는 것이다. 이 마을마저 개발업자들의 욕심과 한일 양국의 무관심 속에 사라져버린다면, 조선인들이 받은 60년간의 차별은 없었던 기억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며,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행했던 차별은 아무런 용서와 화해도 없이 조용히 지속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억은 쉽게 왜곡되고, 쉽게 잊혀진다.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겪어오고 있는 차별과 배제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질 것이다.

또한 일본 정부, 그리고 과거 전쟁에 협력해 회사를 키웠던 기업, ‘닛산’은 수많은 조선인들을 착취한 원죄를 과거에 대한 사죄 없이 벗을 수 없다. 따라서 기념관, 박물관으로 만들어 지나간 역사로 화석화시키는 것보다는 마을을 보존해 ‘식민지배’, ‘차별과 배제’의 역사를 현재화시켜야 한다. 우토로 마을의 보존은 그들의 과거식민지배에 대한 무언의 함성이고, 현존하는 차별을 보여줄 수 있는 생생한 교육현장이다.

물론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하는 것은 우토로 마을이 마을 주민들이 황무지를 개척해서 일궈낸 삶의 현장이라는 점이다. 평생을 살아왔고, 그 땅에서 현재도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에게, 보상은 커녕 삶의 터전마저 뺏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모든 책임을 일본 정부에게 돌리고, 해결해주기만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도 60년 넘게 ‘무관심’이라는 범죄를 저질러온 동조자이지 않은가?

현재 일본정부가 생각하는 우토로 문제 해결은 간단하다. 앞으로 10년만 침묵하면 조용히 사라질 것이다.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던 많은 고려인들이 이제 고향땅 한번 못돌아오고 사라지는 것처럼, 그리고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여는 정신대 할머니들이 양국의 무관심 속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어쩌면 10년만 침묵하고 지나면 아무런 기억도 역사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20여년간 우토로 주민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도 이제 망각의 강을 건너고,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이런 무관심은 결국 우리 스스로도 일본 정부가 60년 넘게 자행해온 ‘무관심’과 차별이 다를 바 없다는 방증이다.

현재 우토로는 9월 30일자로 땅소유주와 토지협상이 끝나고, 마을의 절반을 5억엔에 매입하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민간 모금액 5억2천여만원, 정부지원‘예정’금액 30억원, 부족한 5억여원은 민간모금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정부지원 ‘예정’금액도 대부분의 국민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계속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백지수표가 될 수 있다. 부족분 5억여원도 그 무관심 때문에 헛된 꿈이 될 수도 있다. 식민지배에서 해방된지도 이제 62년, 우토로에는 진정한 해방이 오지 않았다. 막연한 반일감정으로 일본을 대하는 것보다는 현재 살아서 차별받고 있는 동포들의 고통에 동감하고, 일본이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나서서 사죄하고 보상해야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일본이 나서서 사죄하고 모든걸 해결해주기만 기다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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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