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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꿈꿨던 이공계 학생의 ‘40년 철학 외길’

계명-목요철학원장 백승균 명예교수 인터뷰

독일철학 vs 분석철학 간 논쟁 잦았던 1980년

 

“공개토론회 진행하자” 백승균 명예교수 제안에 ‘목철’ 첫발

 

500명 넘는 학생들이 복도까지 들어차 ‘대성황’

 

한때 중단될 위기에 처해 ‘목철을 해야하는 이유’ 주제로 토론하기도

 

백승균 명예교수 “학생들이 스스로에게 자부심 가졌으면”

 

 

한때 한국 철학계는 독일 관념론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다. 우리나라에 서양 철학이 이식된 시기가 일제강점기였음을 감안하면, 일본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학교 철학과 또한 독일 관념론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던 1980년, 미국에서 철학을 전공한 김영진(당시 철학) 교수가 우리학교에 부임하면서 철학과에 학문적 파장을 몰고 왔다. 그는 ‘분석철학’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철학을 들고서 독일 관념론이 주류였던 우리학교 철학과를 뒤흔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철학적 논쟁의 필요성을 절감한 교수들은 현재 계명-목요철학원장을 맡고 있는 백승균(철학윤리학) 명예교수의 제안으로 철학 세미나를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1980년 10월, 엄혹한 정세 속에서도 우리학교 어느 한 구석에서는 ‘아가페와 자비’라는 주제를 두고 철학과 교수들 간의 열띤 설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김영진 교수와 변규룡 교수, 백승균 교수 등이 자리했다. 강의가 모두 끝나고 어느덧 오후 6시에 가까워진 시간이었지만, 토론회가 열린 장소는 교수들의 논쟁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든 학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목요철학 세미나(이하 목철)’ 40년 대장정의 첫발을 떼는 순간이었다.

 

당시 목철을 주도한 교수들 중 우리학교에 남은 교수는 백승균 교수 뿐이다. 우리학교 철학윤리학과는 50년이 넘는 역사만큼 많은 교수들이 자취를 남기고 떠나갔다. 하지만 백승균 교수는 우리학교 철학윤리학과와 역사를 함께한 산증인으로서, 현재까지도 계명-목요철학원장을 맡으며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불혹을 맞은 목요철학 세미나를 노(老)철학자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40년 역사의 목철, 막이 오르다

 

Q. 목철 40주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인문학 강좌를 한 대학에서 이렇게 오래토록 지속한 곳은 전세계적으로 드뭅니다. 우리학교는 지방대학이라고 하지만, 40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철학 강좌를 이어온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목요철학 세미나를 이토록 긴 세월 동안 이어왔다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Q. 목요철학 세미나를 시작한 계기가 무엇인가요?

1980년 우리학교 철학과에 김영진 교수님께서 새로이 부임하였습니다. 지금은 인하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신 분인데, 그분께서는 미국에서 분석철학을 전공하고 우리학교로 왔습니다. 김영진 교수님은 ‘철학은 관념철학이 아닌 분석철학이어야 한다’며 강의 시간만 되면 학생들에게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8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 철학계 전반이 일본의 영향을 받아 독일철학이 주류였고, 우리학교도 마찬가지였던 상황이라 꽤나 큰 논쟁거리가 됐습니다. 그렇게 1학기를 보냈는데, 이렇게 교수 간의 학문적 간극이 큰 상황에서는 학생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해 ‘방과 후에 공개적인 토론회를 진행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여기에 김영진 교수님과 변규룡 교수님이 동의해서 바로 다음 학기부터 ‘목철’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Q. 당시 목요철학 세미나를 주도하셨던 교수님들께선 현재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사실 지금은 연락이 거의 닿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철이 500회째를 맞이했을 때 김영진 교수님과 변규룡 교수님께서 참석을 해주셨습니다. 당시 주제는 ‘목요철학 세미나를 회상한다’였던 것 같습니다. 김영진 교수님은 앞서 말했다시피 인하대에서 정년퇴임을 하셨고, 변규룡 교수님도 한국교원대에서 정년퇴임을 하셨습니다. 결국 아직도 현장에 남아있는 교수는 나밖에 없는 셈입니다(웃음). 김 교수님과 변 교수님께서는 다른 대학에서도 꾸준히 철학을 가르치셨는데, 우리학교에서 진행한 목철에서 영향을 받아 그 학교에서도 비슷한 행사를 기획하셨던 걸로 압니다. 이밖에도 한자경 교수님께서 우리학교 철학윤리학과에서 8년 정도 계셨는데 그분께서도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기셔서 철학 세미나를 진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Q.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전반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철학을 주제로 한 세미나가 40년 넘게 이어질 수 있었던 저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학교는 개교 당시부터 영문과와 철학과가 있었던 학교였던만큼 인문학 분야에서 남다른 저력을 보여 왔습니다. 이것이 40년간 이어진 목철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봅니다. 다만 앞서 질문에서도 지적했듯 인문학 전반은 불안한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인문학 자체는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생산하는 학문이 아니다보니 과거에 비해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은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오늘보다 내일을 준비하는 학문의 성격이 강하고,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철학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학문’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목요철학 세미나를 진행해오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신가요?

1984년 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엔 한국사회나 우리학교나 여러모로 흐름이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대상에서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정부나 학교 당국이 부담을 느끼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철을 열지 말라는 압박이 가해졌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미나 당일에 ‘우리는 왜 목요철학 세미나를 해야하는가’를 주제를 걸고 그냥 진행을 했습니다(웃음). 당시엔 학생들도 꽤 많이 모였지요.

또 다른 일화라고 한다면, 한 번은 <즐거운 사라>의 저자 마광수 교수님을 초청해 강연을 진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땐 거의 500명에서 6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복도까지 들어찰 만큼 성황이었습니다. 그만큼 목철은 인기가 많았고, 학생들에게 지적 자극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과생’ 백교수, 철학자가 되다

 

Q. 철학을 전공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고등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가장 좋은 직업은 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생명을 직접 다루는 직업이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었기에 선호했다기보다는, 생명을 다루는 일 자체가 숭고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둘째로 좋은 직업은 교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사는 직접 생명을 다루지는 않지만 생명을 간접적으로 다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교사를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당시엔 교사라는 직업이 그리 좋은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만나던 애인에게 차였던 적도 있죠(웃음). 아무튼 그렇게 선생이 되기 위해 이공계에 진학을 했습니다. 처음엔 고려대 화학과에 다녔는데, 그때 철학 강좌를 듣고 철학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당시엔 철학을 공부하려면 독일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이 많았던 탓에, 결국 독일어를 배울 수 있는 한국외대로 학교를 옮겼습니다. 외대에서 독일어를 배워 졸업한 뒤에는 또다시 고려대 철학대학원에 진학해 석사 학위를 받았고, 독일 유학길에 나서 그곳에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게 됐습니다. 박사학위를 딴 뒤에는 나의 고향인 대구에서 철학 강의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우리학교로 와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이렇게 제 삶을 돌이켜보니 참으로 탈(脫)의 연속이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Q. 교수님이 생각하시기에 철학이란 무엇인가요?

철학은 ‘결단’하는 일입니다. 결단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에서 주어진 선택지를 고르는 결단을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만 이는 존재하되 곧 사라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결단입니다. 물론 순간의 실수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책하고 현재에 머무를 필요는 없습니다. 인생길은 돌아서 가도 첩경(지름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장 저만 하더라도 이래저래 돌아다니다보니 마흔 살이 되어서야 교수가 되었습니다(웃음). 둘러가는 것은 어쩌면 자기를 마련해나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듯싶습니다.

 

Q. 끝으로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학생들을 보면 지방대학 학생이라는 이유로 위축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혀 위축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오히려 지방대학 학생들이야말로 더욱 미래지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가꿈으로써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지난 40년 간 우리학교 학생들을 보고 내린 결론입니다. 

따라서 우리학교 학생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또 어떤 일에 맞닥뜨린다면 온 정성을 다해 노력하는 것, 그러면서 사람을 잊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을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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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왜 읽고 생각하고 쓰고 토론해야 하는가? 읽는다는 것은 모든 공부의 시작이다. 지식의 습득은 읽는 것에서 시작한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지식 기반 사회에서는 지속적인 혁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지식 정보를 수집해 핵심 가치를 파악하고 새로운 지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창출해 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읽기다. 각 대학들이 철학, 역사, 문학, 음악, 미술 같은 인문·예술적 소양이 없으면 창의적인 인재가 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고전과 명저 읽기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교과 과정으로 끌어들여 왔다. 고전과 명저란 역사와 세월을 통해 걸러진 책들이며, 그 시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를 저자의 세계관으로 풀어낸,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책이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발하는 정신의 등대 역할을 하는 것이 고전과 명저라 할 수 있다. 각 기업들도 신입사원을 뽑는 데 있어서 자신의 재능과 역량을 증명할 수 있는 에세이와 작품집을 제출하는 등의 특별 전형을 통해 면접만으로 인재를 선발하거나, 인문학책을 토대로 지원자들 간의 토론 또는 면접관과의 토론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등 어느 때보다 인문과 예술적 소양을 중시하고 있다. 심지어 인문학과 예술을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