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문학의 위기, 나아가 학문의 위기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전개되고 있는 대학구조조정은 WTO체제하에서의 교육시장 개방과 국가경쟁력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나, 기본적으로는 지식정보화와 시장경쟁논리를 바탕으로 한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라는 국제적 흐름의 강제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실용주의가 대세를 이루면서 학문의 산실인 대학이 일반기업처럼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경영체제로 재편되는 가운데, 기초학문에 대한 외면·경시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사회의 모든 것이 상업적 가치로만 치환되는 가치부재의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인문학의 위기는 대개 두 가지 요인으로 집약된다. 첫째는 내재적 원인으로는 인문학의 특성에서 연유한 아카데미즘에의 안주와 새로운 변화에 대한 능동적 대처의 미흡을 들 수 있으며, 둘째는 학문 영역에도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외부환경적인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다.
현 상황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대학에서 인문 관련 학과의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는 인문학 전공학생의 수적 감소와 이로 인한 학과간의 통폐합,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인문 관련 학과의 폐과로 나타난다. 현재 한국의 고등교육의 문제점을 논할 때 항상 지적되는 것이 ‘인문학의 위기’, ‘이공계의 위기’, ‘기초학문의 위기’이지만, 이중에서도 인문학의 위기가 가장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인문학 관련 학과들은 특히 이중고를 겪고 있다. 한편으로 인문학을 지원하는 학생 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인문학 전공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한 ‘밥그릇’싸움으로 인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위기로까지 확대될 것이며, 인문 교육의 실종은 인문 정신이 결여된 기능적 시민을 양산함으로써 사회발전의 방향을 제시할 정신적 역량의 빈곤화를 초래할 것이다. 인문학적 상상력, 창의력, 감수성은 한 선진 지식정보사회를 구현하는 정신적 인프라로서, 인문지식의 발전적 재생산이 없는 한 향후 국가의 경쟁력도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상 지난 수 십년 간 과학기술 분야는 국가적 우선 과제로서 온갖 정책적 혜택을 받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인문학은 사회적 실용성,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정책적 소외지역에 놓여 있었다. 심지어는 인문학은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촉발시키는 언쟁의 분야로 인식되어 인문학은 전적으로 수요자의 선택에 맡겨져 있었다.
그러나 인문 진흥 정책은 교육정책의 하위 범주로서 인문정책이 아니라, 과학기술정책과 동등한 위상을 갖는 학문정책으로서의 인문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해외 선진국들은 일찍이 인문학 진흥정책을 펴왔다. 미국은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대통령 직속의 국립인문재단(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을 설치하고, 50개의 주에는 각각 인문학위원회를 두고, 지역별로 인문센터를 설치하여 인문학을 육성 지원하고 있다. 영국은 최근 기존의 인문예술위원회를 인문예술연구회로 승격하여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인문계 관련 학과 재학생 수가 전체의 13.4%를 차지하는 데도 정부의 기초학문 분야 지원 중에서 특히 인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미약하다. 일례로 2003년 정부 R&D 예산에서 인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5조 1천1백89억원 예산에서 1.7%인 9백40억에 불과한 실정이다. 학술진흥재단의 사업분류와 지원금액에서 나타나듯이 ‘학술진흥법’의 입법 목적이 한국 전 학문분야의 균형지원이라는 한계로 인하여, 한국과학재단과 같이 이공계분야만을 중점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조적으로 가질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정부(교육부)는 이 점을 중시하여 2002년부터 ‘기초학문육성지원’이라는 관점에서 인문·사회 분야 및 이공계 기초학문지원을 목표로 3년 동안 3천억원을 한시적으로 지원하기로 확정, 집행하고 있으나 문제는 인문학으로 특화된 정책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과 한시적 지원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문진흥을 위해서는 “인문진흥법”(가칭)의 입안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선진지식사회로의 진입을 위해서는 인문학에 대한 국가적인 종합지원육성 정책의 마련이 시급하다. 학술진흥재단 및 개별적 연구지원단체 등에 의존하고 있는 현재의 빈약한 인문학 지원 방식은 전면적으로 재조정되어야 한다. 국가인문정책의 비전을 제시하고, 인문학의 체계적 육성을 위한 조사, 연구, 평가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도록 하며, 인문학의 연구·교육·사회적 확산에 대한 지원 조직과 재정을 법적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는 ‘인문진흥법(가칭)’의 제정이 필수적이다. 이 법에 기반하여 대통령 직속으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법률상의 기구로 설치되어 있듯이 해외 선진국에서와 같은 ‘국가인문진흥위원회’(가칭)를 설치하는 방안이 검토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관은 학문정책에 대한 교육인적자원부·과학기술부 등 정부조직상의 한계를 고려할 때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국무총리 산하 정부출연연구기관인 경제·인문사회연구회에 인문정책연구를 중점적으로 수행할 기구로 ‘인문정책연구원’(가칭)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 전공인력 수요-공급체계 개선, 인문직업개발 등 시의성 있는 구체적 단기정책과제를 상시적으로 연구하고, 전국에서 수행되는 인문정책관련 연구결과를 정기적으로 종합관리하며, 연구결과를 확산하고 정책에 반영하며, 국가경쟁력의 인문학적 기반 마련을 위한 중장기 인문정책 연구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기관의 설립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인문학의 제도적 육성을 통하여 창조적 인문연구인력의 양성, 국가 인문경쟁력의 강화, 한국 인문학의 세계화와 특성화로 견인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문학 연구자들은 위와 같은 제도적 개선을 요구하면서도 내부적으로 다음과 같은 자문을 해야 할 것이다. 인문학자들이 자본주의 논리에 의한 문화적 변동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현대사회는 이미 인문학으로 하여금 다른 학문과의 연계 및 통합을 요구하고 있지만, 인문학은 여전히 고고한 상아탑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인문학적 성찰의 대상은 전통적인 가치 영역을 벗어나 우리 삶의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 사학, 철학은 여전히 기존의 틀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