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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의 神들

50주년 특집 명사초대석-김상기 칼럼

지난달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 가서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을 찾았다. 그 규모가 작으나 소장품의 질에서 세계최고의 하나로 꼽히는 명소이다. 그러나 히타이트 문명의 유물에서 볼만한 조형미술의 걸작품이 없어 서운했다. 설형문자가 새겨져 있는 돌과 벽돌들이 가장 중요한 보물인데, 히타이트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 뜻도 없다.

한 문명이 모든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는 경우,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 문명은 참으로 희귀한 경우에 속한다. 히타이트 문명은 그 정신문화의 깊이와 폭에서 오늘의 우리가 도저히 흉내 내지 못하는 위업을 이룩했다.

약 3천8백년 전에 공동체들을 짓기 시작한 이들은 기원전 15세기경에 북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아나톨리아 전역, 시리아와 레바논에 이르는 큰 제국을 세웠다. 이 유목민은 처음으로 말을 길들여 타고 다녔고 수레를 끌게 했다. 이들은 놀랍게도 처음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절대군주의 개념이나 이집트의 식민주의와 전혀 다른 정치문화를 개발했다. 히타이트의 왕은 파라오 같은 신이 아님은 물론이고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처럼 신의 대변자도 아니다. 그는 귀족 가운데서 추대 받아 이들의 지지로 다스리는 하나의 지도자(primus inter pares)일 뿐이므로 중세유럽 봉건체제의 왕에 더 가깝다.

이들은 피정복민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는 것을 삼가하고, 조약을 맺어 쌍무협정을 정하여 이들을 복속시켰다. 이들이 국제법을 세운 것이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을 토대로 하여 외교활동을 펼쳤다. 대사관을 설치하여 예물을 교환했고, 지배귀족 가문들 사이에 결혼이 성행했다. 제국의 전역을 연결하는 외교의전이 발달하고, 인도유럽계 언어인 아카디안(Akkadian)이 공용어로서 자리 잡았다. 고대문명의 중기에 꽃핀 이 문명은 정복자가 피정복민을 만들어 내지 않는 특이한 인간승리를 성취했다. 모스카티는 이들이 평형을 유지하되, 통일을 추구하거나 중앙집권화에 집착하지 않은 것을 특기했다.

독일의 사학자 모르트가트(Moortgat)는 히타이트 문명의 위대성을 권력분산(polyarchy)을 추구하는 정치적 연방주의와 이에 평행하는 ‘정신적 연방주의’에서 찾았다. 이들의 종교생활은 보편적인 정신적 관용을 바탕으로 했다. 외국인에게 너그러울 뿐 아니라 그들의 종교를 존중하여 이를 흡수하거나 합치는 것을 삼갔다. 히타이트는 천위(千位)의 신(神)을 모셨다. 그러나 이미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들이니, 과장된 다신교의 이념일 뿐이라고 모르트가트는 해석한다. 우리의 불교도들이 말하는 천불(千佛)과 일치되는 사상이다.

다른 고대사회의 여성들과는 달리, 히타이트의 여성은 훨씬 높은 사회적 지위와 힘, 자유를 누렸던 사실이 밝혀졌다. 형벌은 관대하여 주로 변상과 보상으로 죄를 다스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뽑는 보복성 형벌을 기피하고 악형을 금했다. 노예가 있기는 했으나 이들의 재산취득과 소유권이 보장됐으니 오늘의 노동계급과 비슷한 사회계층이 아니었을까 한다. 적어도 19세기의 미국보다는 훨씬 앞서 있었다. 특기할 또 하나의 일은 세계에서 제일 앞서, 역사를 인과관계와 도덕적 책임의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서술했다는 사실이다.

슬프게도, 아름답고도 행복한 사람들이 세운 히타이트 제국이 3,200여년 전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철기로 무장한 바다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청동기 시대의 막이 내린 것이다. 제국이 망한 뒤에도 작은 규모의 신(新)히타이트 나라들이 수세기 동안 명맥을 유지했으나, 다시 크게 일어나지 못하고 기원전 717년에 그 마지막 불꽃이 꺼졌다. 이들이 떨어트린 씨가 훗날 그리스에서 찬란한 꽃이 되어 다시 피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 필자 약력
서울대와 뉴욕주립대에서 철학 전공
중앙일보 기자
계명대학, 브록대학(캐나다), 남일리노이 대학(에드워즈빌)에서 교편
세인트루이스 거주




[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