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 창간호에서 지령 1000호까지의 계명대신문을 돌아본다

771호부터 열린편집 도입, 다른 신문과 차별화된 편집으로 특성화

전자신문 gokmu.com과 독자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획으로 독자중심 신문으로

계명대신문 지령 1천호를 맞아 그동안 발행된 신문들을 편집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 전에 지령(紙齡)이란 말을 먼저 풀이해보면, 신문의 나이라는 뜻으로 그 신문이 발행되어온 수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 글에서 지난 1천호에 이르기까지 신문의 면면을 살펴보고 지나온 발자국을 돌아보면서 계명대신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조명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창간호, 국한문 혼용
신문 편집의 원칙 부재
편집을 중심으로 하여 신문을 면면히 들여다보면, 창간호에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같은 편집의 신문이 없다. 신문이라는 특성이 그 시기와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른 기사와 사진을 제공하는 정보의 창구이므로 같은 편집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해도, 편집의 기본 틀은 어느 정도의 간극을 가지고 서서히 변하게 마련이다. 1957년 5월 26일 창간 당시의 신문은 세로쓰기 편집을 기본으로 했다. 특이한 점은 창간호 당시 전문적인 편집인의 참여가 없었던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사의 제목 부분이 세로쓰기와 가로쓰기로 혼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제목들로 인해 다소 혼란스러운 편집형을 보이고 있다.
일반적인 대판신문의 세로단수는 15단임에 반해, 창간호에서는 면마다 다른 단수를 사용하고 있다. 창간호라는 한계가 엿보인다. 창간당시 표기 원칙은 국한문 혼용이었으며, 4면 전체에서 사진은 증명사진까지 합쳐서 몇 장에 지나지 않았다. 사진사용이 미미한 점은 이후에도 당분간 지속되는 경향이다.
4면은 ‘학예(學藝)’라는 성격으로 만들어졌는데 지금의 문화면과 흡사한 모습이며, 창작 시, 수필, 기행문 등이 실렸다.

2호, 본격적인 신문편집 선보여
창간호의 어수선한 모습은 사라지고 신문 편집이 제 모습을 보이는 것이 2호이다. 앞서 지적한 제목 배치의 가로쓰기와 세로쓰기 혼용이 사라지고 세로쓰기로 통일되었다. 사설과 논설 등의 고정란이 제 모습을 갖추고 있고 세로단의 변형도 이전 창간호에 비해 줄어들어 안정적인 편집으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창간호 발행 이후의 평가와 경험 및 편집기술 축적에 의한 것으로 유추된다.

3호, 최초의 설문조사
6호, 1면 보도기능 향상
9호, 장수 고정란 ‘밀물썰물’과 ‘계명성’
3호 3면에 계명대신문 최초의 설문조사가 등장한다. ‘졸업생 앙케트’가 그것인데 총 7문항의 설문으로 그 주요내용은 제 1회 졸업생으로서의 소감과 학교당국에 대한 건의, 미국인 교수에 대한 생각, 여학생실에 대한 관심 정도를 묻는 것 등이다.
6호에 들어서면서 뉴스 전달기능이 이전에 비해 강화된 것을 볼 수 있는데, 학내 보도기사의 수가 이전에 비해 급증했고 관련 사진 활용의 폭을 넓혀 뉴스 전달기능이 한층 향상되었다. 9호에 등장한 고정란 ‘밀물썰물’은 828호에 이르기까지 총 820회 연재된 최장수 고정란으로 가십기사를 다루었다.
계명의 소리라는 뜻을 가진 ‘啓明聲’이란 한자로 시작된 편집국장 칼럼인 ‘계명성’이 ‘밀물썰물’과 동시에 등장했다. 초기의 ‘계명성’은 투고광고를 앞부분에 달기도 했는데 이후 본격적인 칼럼의 모습으로 변신하게 되고, 분량도 점점 늘어나게 된다. 691호부터 전국대학 신문 최초로 편집국장 칼럼을 사설과 같은 형으로 편집상 변화를 주면서 ‘계명성’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밀물썰물’과 함께 828까지 연재되었다.

11호, 최초의 만화 ‘또방우’
12호, 최초의 화보 ‘날로 發展하는 大啓明’
발행 초창기인 이유로 이 당시 신문은 계명대신문사 역사에서 최초의 일들이 많다. 최초의 만화 ‘또방우’가 1960년 7월 29일자 11호 신문에 실렸다. 만화라는 요소를 신문에서 활용할 수 있게 되어 보다 다양한 기사 장르를 열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할 수 있겠다.
최초의 화보 ‘날로 發展하는 大啓明’은 총 19장의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우리대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제 2대 학장 안두화 학장의 집무모습과 지금은 사라진 대명캠퍼스의 본관의 원형, 대학 건물 등을 다루고 있다.

23호, 보도면 3면으로
24호, 계명만평 등장
1968년 12월 5일자 지령 100호 특집
116호, 순한글 가로쓰기 체제 도입
신문발행이 계간, 월간을 넘어 46호 신문에 이르러 격주간 발행체제가 되면서 신문이 제공하는 정보량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1968년 12월 5일자 지령 100호 발행 등 격주간 체제가 안정화되면서 신문발행이 제자리를 잡았다. 특히, 1969년 10월 23일자 116호에 이르러 순한글 가로쓰기 체제를 도입하게 됨으로써 신문편집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어 큰 의의를 가진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는데, 일부 대학신문의 경우 창간 52주년을 맞은 본사보다 역사가 짧음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지령을 보이는 경우를 간혹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대학신문 발행행태를 따져보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으로, 본사의 경우 4면 체제에서 특집호를 발행하거나 발행면수가 늘어 8면 이상을 발행할 경우 지령이 1호만 더해졌지만(본사는 1970년대까지 동시 발행하였다.) 일부 대학의 경우 4면이 증면되면 지령도 같이 더해서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즉, 본보의 경우 발행 1000호 이후 발행되는 신문 호수는 무조건 1001호가 되지만, 일부대학의 경우 발행 1000호 이후 발행되는 신문 호수는 면수에 따라, 8면일 경우 1001호, 1002호 동시발행이 되고 12면일 경우 1001호, 1002호, 1003호 동시발행으로 호수를 표기했다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호수 표기법이 현재는 사라졌지만 1990년대까지 이런 체제를 유지한 대학신문들이 더러 있었다.

165호, 4단만화 ‘비슬군’의 등장
계명대신문을 대표하는 만화 주인공을 꼽으라면 ‘비슬군’이 단연 1등이다. 이 ‘비슬군’이 1972년 5월 30일자 개교 18주년 기념호인 165호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전까지 무려 22번의 변신을 했던 본보의 만화주인공이 ‘비슬군’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후 ‘비슬군’의 모습은 담당기자에 따라 다른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했고 336호에 들어서면서 가장 보편적인 ‘비슬군’의 모습이 등장한다. 박가(朴哥)라는 화명을 쓴 기자에 의해 만들어진 ‘비슬군’의 모습은 이후 ‘비슬군’의 모습의 전형이 되었다. 지명 ‘비슬’과 사람에게 붙는 호칭인 군이 합쳐 만들어진 이름이 ‘비슬군’이며 전형적인 모습이라 볼 수 있는 이마 없이 머리카락이 4개닥인 캐릭터는 이후 많은 후배들이 그 모습을 따르면서 가장 익숙한 캐릭터로 남았고, 828호까지 연재되었다.

168호 ~ 227호, 1매에 20원
지난 신문을 보다가 제호 바로아래 발행 일시를 적는 줄에서 재미난 점을 발견했다. 1972년 7월부터 1975년 1월 11월까지 발행된 신문에 (1매 20원)이라는 가격이 매겨져있는 것이다. 당시의 사정을 정확히 알 수 없어 어떤 목적으로 가격이 매겨지고 또, 어떤 식으로 운영되었는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대학신문과 비교하면 참으로 특이한 점이다.

최초의 입시특집호 199호
1974년 2월 1일, 지령 200호 발행
제호, 계대학보에서 계명대학보로 변경
199호와 200호는 각각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학신문이 입시철을 맞아 입시특집호를 제작하는 것은 90년대 들어서면서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는 일이지만, 1974년에 입시특집호를 제작했다는 것은 조금 특별한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과안내를 비롯해 강좌안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199호는 34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의 학제와 커리큘럼을 연구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자 역사라 할 수 있겠다.

80~90년대, 신문의 저널리즘 강화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의 급변과 함께 대학신문의 사회참여라는 ‘화두’가 제기되었고, 대다수의 대학신문들이 기존 ‘학보’의 울타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아카데미즘이 약화되고 저널리즘이 강조되어 대학신문은 기성언론의 보도행태에 맞서는 ‘대항언론’으로서 자리매김한다.
이 과정에서 ‘특집면’ 또는 ‘사회면’의 성격을 가진 지면이 고정화되고 또, 80년대 이전보다 학생기자들이 직접 기사를 쓰는 사례가 대폭 늘어났다. 필진의 다수가 진보적인 색채를 가진 사회단체 혹은 지식인 집단으로 집중되었고, 대학신문 기자들의 모임이 지역에서 비롯되어 전국적인 조직체로 결속력을 다지게 되면서 각 대학간의 기사 공유가 빈번해지면서 ‘공동기자단’ 운영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기동력과 취재력을 지면으로 옮겨냈다. 이 시기 일부에서는 대학신문의 좌경화에 대한 비판이 일기도 했다.771호 열린편집 시대를 열다
1996년 2월 22일자 771호 신문은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오던 계명대신문의 편집형에 대폭변화를 주면서 전혀 새로운 편집형을 선보이게 되었다. 기존의 편집이 닫힌 편집이라고 한다면 지면 내에서 선의 사용을 자제하고 여백의 활용을 높여 독자의 시야를 시원하게 열어 가독성을 강화했다. 이 열린 편집은 지금까지 계명대신문의 편집의 기본 틀로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829호 기존의 고정란과의 작별
1999년 5월 31일자 829호 신문은 계명대신문이 오랫동안 유지했던 고정란(계명성, 밀물썰물, 비슬군, 여과가 등) 등을 모두 연재 종료하고 새로운 기획과 고정란을 제시했다. 1999년은 신문발행의 새로운 분기점으로써 이후 신문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841호 제호 교체, 보도면 강화
2000년을 맞아 뉴스를 강화하고 독자 투고와 참여를 늘리기 위해 면 구성이 새로워졌다. 1면에 보도기사를 전진배치하고 독자 투고나 참여시 지급하는 고료나 경품 규모를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했다. 뿐만 아니라 신문사 자체 역량으로 편집형을 완전 열린편집, 블록편집 체제로 전환하여 지금의 신문형이 태어날 수 있는 모태가 되었다.

982호 창간 50주년
창간 50주년을 맞아 발행된 982호는 우리대학 시각디자인과의 자문을 받아 기존 편집의 부족한 부분 2%를 채웠다. 교내 광고 편집을 정리하여 새롭게 규정하고 지면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미세한 부분까지 통일감을 주었고 제호를 교체했다.
그 내용에서는 지난 50년간의 제호 변천사를 비롯해 연혁 등 그동안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부분을 마무리했다.992호, 커버스토리로 독자에게 한걸음 더
2008학년도 1학기 개강호인 992호부터 1면의 대형 화보를 게시하고 이를 기존 주, 월간지의 커버스토리화 했다. 커버스토리를 통해 신문의 얼굴인 1면의 경쟁력을 높여 독자를 보다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것과 동시에 연애상담, 틀린그림찾기 등 보는 신문에서 즐기는 신문으로 내딛기 위한 지면개선을 시도했다.

1000호, 위기와 기회
대학언론사 마다 학생기자 구인란에 허덕이고 있다. 따라서 본사 역시 신문제작의 효율성을 높이고 종이신문과 전자신문(gokmu.com)을 연동하여 요즘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는 정보서비스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지난 2006년 8월 30일 전자신문 서비스를 실시했고 종이신문이 제공할 수 없는 다양한 뉴스까지 서비스하고 있다. 지령 1천호는 계명대언론사가 함께 이룬 우리대학 언론의 경사라 하겠다. 이후 대학언론사의 위기를 극복하고 신문과 방송, 국문과 영문 모두를 다양하게 서비스하는 계명인의 눈과 귀가 될 수 있다면 지금의 위기는 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재호 전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