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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프로그램의 비행이 잘 되려면

발전가능성과 향후 대중적 관심의 변화를 충분히 감안해야


1999년 7월 18일 9시, KBS에서는 전혀 다른 형식의 코미디 프로가 방영되었다. 코미디언 9명이 다양한 장르의 코미디를 묶어 한 편의 공연처럼 전달하는 실험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컬트 삼총사’ 등 대학로 소극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코미디 공연을 안방극장에 맞게 접목시킨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 프로는 정규 방송 프로가 아닌 이른바 파일럿(pilot)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가 바로 지금도 방영되고 있는 <개그콘서트>다. 이 후부터 파일럿 프로는 점차 대세가 되었다.

대개 파일럿 프로그램은 설날이나 추석 특집으로 편성되는 경우가 많다. MBC <스타의 친구를 소개합니다> 도 설 연휴에 파일럿 프로로 처음 방송된 뒤 5월부터 정규 방송프로그램이 됐다. <미녀들의 수다>도 2005년 추석 특집으로 방송된 뒤 반응이 좋아, 2006년 11월말부터 매주 일요일 오전의 정규 프로가 되었고, 2007년 4월 30일부터는 오락프로 경쟁이 심한 월요일 밤 11시로 옮겨졌다. ‘무릎팍도사’역시 2006년 1월 <황금어장>에서 신년특집으로 2회에 걸쳐 마련된 뒤 이후에는 아예 <황금어장>이 ‘무릎팍도사’로 채워졌다. 박경림의 ‘좋은 사람 소개시켜줘’는 2007년 추석 파일럿이었고, 최근에는 추석에 방송되었던 MBC <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 등이 정규 프로로 편성되었다.

하지만, 파일럿 프로그램은 명절에 특집의 일회성으로만 방송되는 것은 아니다. 시험용으로 만들어 반응이 좋으면 정규 편성하는 프로그램이다. 많은 경우 파일럿은 봄과 가을을 앞두고 이루어진다. 방송 프로의 정규 개편은 크게 봄과 가을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6개월 단위로 프로그램이 개편되고, 이 정규 개편을 앞두고 파일럿 프로그램들이 집중적으로 선을 보이는 것이다. 심지어 정규 편성을 앞두고 여러 파일럿 프로를 매주 실험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추석과 설날에 파일럿 프로가 많이 방송되는 데에는 따로 이유가 있다. 명절에는 따로 편성시간을 잡지 않아도 파일럿 프로그램을 선보이기가 쉽다. 특집기획 방송 형식으로 선보이면 되기 때문이다. 정규 방송시간에 대체 방송하다가는 시청자에 대한 기만이라며 욕먹기 쉽다. 또한 명절은 전 연령대의 가족 구성원이 텔레비전을 보는 날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시청자의 반응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파일럿은 리트머스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파일럿 프로는 제작 후에 방송사에서 일단 내부 시사회를 열고 방송 여부를 결정한다. 그리고 방송 후 시청자의 반응 등을 보고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고정 편성하게 된다. 고정편성 결정으로 바로 방송되는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장단점을 보정·보완하는 단계를 거쳐서 정규 방송 된다. 대개 파일럿의 제작은 외주 제작사에서 한다. 정규편성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고, 그만큼 방송 제작 여건이 살벌한 경쟁의 와중에 있음을 반증하는 사례다. 일부 방송사 내에서는 따로 테스크포스팀까지 만들어 파일럿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파일럿 프로는 오락 프로의 전유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SBS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와 <생활의 달인> 등 교양 성격의 프로도 파일럿에서 정규 프로가 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파일럿 꼭지’라는 용어도 생겼다. 전체 프로그램을 파일럿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특정 꼭지만 시범적으로 방송하는 것이다. 올 2월 설날 특집 프로였던 ‘우리 결혼했어요’는 3월 MBC <일요일일요일 밤에>에 정규 편성됐다. <신동엽 신봉선의 샴페인>에서는 여름 특집으로 ‘샤워토크’라는 파일럿 꼭지를 선보였고, <야심만만 시즌2>는 편성 전 ‘절친노트’ ‘스타 사랑고백 후’ ‘살아봅시다’를 파일럿으로 발진시켰다.

파일럿 프로그램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계책이다.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방송제작하는 것은 비용 낭비고, 시청자를 외면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요컨대, 사전에 인기를 끌 수 있는 방송 포맷을 사전 선별해 최대의 효과를 이끌어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의 반응만으로 정규 편성을 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파일럿 프로그램은 완결성을 갖지는 않는다. 따라서 발전가능성과 향후의 대중적 관심의 변화도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방송의 역할은 대중적인 상식에 영합하는 것만이 아니라 낯설지만 의미 있는 것에 대한 대중적 저변의 확산에도 있다. 단지 당장의 반응만을 보고 정규 편성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좋은 프로를 사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별순검>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나 독창성이나 전문성은 물론 공익성이나 공공성, 시청자 주권을 담고 있는 프로의 경우
정규개편에서 밀려나기가 쉽다. 무엇보다 충분한 숙의 민주주의 과정이 필요하다. 무조건 공중파 방송을 통해 시청자를 마루타 삼는 것은 문제가 있다. 어느 정도 완숙된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외국처럼 객관적인 평가단을 만들고, 충분히 조율하는 과정도 일부 필요하다. 그리고 일단 방송이 결정된 프로에 대해서는 제작진에게 전폭적으로 전권을 인정해야 한다.

방송은 창작의 과정이다. 외부의 영향력을 행사할수록 아무리 좋은 기획도 좋지 않은 결과물을 낳을 수 있다. 거꾸로 좋지 않은 기획이라 해도 그럴 때 좋은 프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무엇보다 천재는 범인(凡人)들이 알아볼 수 없다. 창작에 대한 사전선별이 근본적으로 위험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