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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100주년기념] 국채보상운동과 경제 주권회복 운동

국채보상운동은 국민들의 애국정신과 애국운동을 경제와 재정 등 실제적 측면과 결합시킨 결과

I. 87년체제와 97년체제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을 이끄는 주요 담론은 ‘87년체제’와 관련한 논의이다. 최근 헌법 개정과 관련한 논의에 있어서도 87년체제 문제는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87년체제 논의의 핵심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 문제이다. 87년을 계기로 한국사회에서 폭발적으로 제기된 민주화 요구가 한국 사회에 얼마나 착근되었는가에 대한 논의가 87년체제의 중심 테제이다. 이렇게 본다면 87년체제 논의가 한국사회에 제기하는 문제의식의 틀은 정치 지향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일반 기층민이 한국사회를 바라보는데 지배적인 관심사는 경제적인 것이다. 보통의 사람이 일상적인 삶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는 경제적인 것이라는 점은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here and now) 한국 사회의 경제적인 문제는 전래 없는 독특한 것이다. 전지구적인 세계화, 혹은 빠른 기술혁신이라는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개념을 빌어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 문제를 한국사회의 특수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부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인 문제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 반영된 매우 고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경제는 그 발전 과정에 비추어 볼 때 이전과 이후가 확연하게 구별되는 단절을 경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단절의 계기는 IMF 경제위기이다.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개발년대의 성장 방식이 근본적으로 부정되고 새로운 방식의 경제체제가 시도되었다. 새로운 방식의 경제체제는 한국 경제의 내적 필요성에 의해 자연스럽게 도입된 것이 아니고 외국자본과 IMF의 요구에 의해 제시된 것이다. 이른바 시장 원리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글로벌 스탠더드’의 전면적 수용이 새로운 경제체제의 도입으로 경험하는 가장 큰 변화이다. IMF 경제위기 이후 한국 경제가 경험하고 있는 이러한 단절을 이른바 ‘97년체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87년체제를 강조하는 논의는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다양한 갈등과 교착의 뿌리가 1987년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형성된 사회체제의 특성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상 한국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교착의 뿌리’는 97년체제를 통해 잉태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구조적이고 문제해결을 위한 접근 방식이다. 이러한 판단은 87년체제의 극복과 관련한 논의가 주로 현실 정치적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87년체제와 관련한 논의가 주로 복고적 감성에 의존하고, 논의의 중심이 현실 정치의 개입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편적이고 임기응변적 성격을 가진다.

한국사회가 1997년을 기점으로 분명한 단절을 경험하고 체제 변환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97년체제 논의를 통해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담론 구조를 ‘현재 여기’의 문제의식과 일치시키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87년체제와 관련한 논의가 주로 지식인 중심으로 사변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일반인의 현실적인 고민으로부터 괴리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97년체제 논의를 통해 이러한 87년체제 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일반 기층민의 삶의 현장에 바탕을 둔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에 담론의 눈높이를 조정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


II. 국채보상운동과 97년체제

역사적 사실을 87년체제라는 거울을 통해 비추어보면 민주화 관련 운동이 크게 부각된다. 동학운동, 2.28, 4.19, 7-80년대의 학생운동이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의미가 부여된다. 한국사회의 근대성(近代性)의 중요한 특징이 민주화의 진전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러한 방식의 역사 기술은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한 일임에 틀림없다.

개발년대를 통해 한국 사회가 이룩한 성과에 대해 논의할 때 경제적 근대화는 성공하였다는 점에서 대체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으나, 정치적 근대화에 대해서는 실패하였다고 하거나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이 매우 일반적인 해석 방법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근대성을 완성시키기 위해 정치적 민주화는 필수 불가결한 과제로 인식되었다. 이것이 87년체제 논의의 역사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국 근대사에서 민주화 운동의 사례가 집중 조명된 이유의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는 중요한 전제가 깔려 있다. 그것은 한국의 근대성이라는 관점에서 경제적 근대화는 부침을 거듭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지속적인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식민지, 한국전쟁, 5.16군사혁명, 석유위기, 중화학공업에 대한 중복투자,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87년 노동자 대투쟁, OECD 가입, IMF 위기, 카드 대란, 부동산 투기 등 어려움에 봉착할 때도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극복하여 경제적 근대화는 단선적인 발전을 지속하고 있다는 낙관적인 역사 인식이 그것이다.

한국 사회의 경제적 근대화의 경험을 인식함에 있어, 단선적 발전 과정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낙관성은 경제적 근대화 과정에 대한 역사적 성찰의 필요성을 주목하지 않는다. 97년체제 논의는 한국 사회가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분명한 질적인 체제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 전환이 야기하는 문제점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할 경우 중대한 위기의 국면에 처할 수 있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적 근대화는 이와 유사한 위기 상황을 일본의 식민지 강점 시기에 경험한 바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정치적 근대화 과정에 천착하는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만큼 한국의 경제적 근대화 과정이 역사적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순조롭고 합의된 발전과정을 따라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97년체제를 주목하는 입장에서 보면 한국의 경제적 근대화 과정은 여전히 미완(未完)의 과제이다. 오히려 한국의 경제적 근대화는 정치적 근대화에 비해 훨씬 느리고 전망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IMF 경제위기는 경제적 근대화의 불완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의 경제적 근대화는 97년체제의 극복과정에서 비로소 그 성패가 결정되는 성질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한말의 국채보상운동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식민주의의 경제적 침탈 구조를 꿰뚫어 보고 일반 기층민이 자발적으로 참가한 경제주권회복 운동이다. 이후 전개되어 온 한국의 경제적 근대화 과정을 돌이켜 살펴보면 100년 전 국채보상운동에서 제기된 경제주권의 문제야말로 한국의 경제적 근대화를 규정짓는 핵심적 요소임이 발견된다. 97년체제의 극복을 통해 한국의 경제적 근대화를 완성하자고 하는 주장은 따지고 들면 한국의 경제 주권 회복이라는 것과 다름 아닌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III. 경제주권 회복과 한국 경제의 근대화 완성

97년체제를 통해 한국경제에 있어 가장 커다란 변화는 세계화의 진전과 함께 외국자본의 지배력 강화, 고용관행의 변화, 시장원리의 강조, 그리고 글로벌 스탠더드의 중시 등을 들 수 있다. 경제주권의 회복이라는 말은 한국경제에 일어나고 있는 이와 같은 변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자는 방식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와 같은 변화를 적극적이고 수용하는 것이 경제주권 회복의 관건이라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말하는 경제주권 회복의 진정한 의미는 세계화가 야기한 경제 환경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되, 한국경제에 정합적인 방향에서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MF 위기 이후 외국자본에 의해 주도된 경제구조개혁 노력은 사실상 한국 경제의 개방과 시장원리 도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러한 구조개혁 노력은 한국경제의 현실을 감안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한국경제에 대한 일방적인 시장원리 적용과 글로벌 스탠더드의 적용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경제의 외형적인 성장 기조는 회복되었으나, 경제구조의 질적인 변환을 초래하였다. 그 질적 변환의 주요 내용은 한국경제의 이중구조 확대이다. 재벌과 중소기업의 격차는 보다 확대되었고, 소득의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금융의 공적 기능은 현저하게 약화되었으며,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불균형은 보다 악화되었다.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은 급속하게 증대되어 고용관행의 불안정성은 가중되었다. 수출기업은 호조를 보이는 반면 내수기업은 침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경제의 이러한 이중구조 확대는 사실상 한국경제의 근대화의 실질적인 후퇴를 의미한다. 개발년대를 통해 한국의 외적 성장은 달성하였지만, 경제 구조의 질적인 발전은 다음 세대의 과제로 이월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현세대로 이월된 경제구조의 발전 과제는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는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IMF 경제위기를 경험하면서 한국경제의 근대화는 외형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후퇴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세계화의 흐름에 대한 한국경제의 비주체적인 대응 방식이다. 한국경제의 근대화는 세계화에 대응한 한국경제의 정합적인 대응방식을 발견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제적인 성과는 현재 악화 일로에 있는 한국경제의 이중구조의 완화라는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경제주권의 회복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대내경제의 폐쇄적인 운용이 아니라, 세계화가 초래하고 있는 국내경제의 이중구조를 주체적인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의미 중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의 지역성(locality)이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 운동의 진행 방향이 지역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계화는 전통적인 국민국가의 와해라는 점에서 그 위험의 속성을 드러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지역성의 강화를 수반할 때 세계화의 위험성이 극복되는 양면성을 가진다. 국채보상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경제적 침탈의 의도를 지역민이 가장 먼저 그 위험성을 발견하고 대응을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국채보상운동은 세계화의 흐름에 대하여 지역이 중심이 되어 주체적 발신(發信) 기능을 담당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경제적 주권을 회복하는 것은 결국 지역화의 진전이라는 의미와 상통한다는 것을 국채보상운동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지역화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한국 경제의 근대화를 완성하는 의미를 가졌다는 주장도 이로써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