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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신문

● 계명대신문을 말하다 - 입지 좁아진 대학신문, 가능성 있는 도전을 위해 내실부터

포털형 전자신문 gokmu.com은 계명대신문의 미래… 1주년 맞아 전면 개편 예정

계명대신문 창간 50주년을 맞아 계명대신문에 대해 돌아보고자 한다. 적어도 반세기를 되짚어보면서 우선, 그 공과를 논하기 전에 오늘이 있을 수 있도록 씨를 뿌린 우리대학과 선배 학생기자들에게 감사드린다.

△ 1957년 창간

지난 1957년 5월 27일 계대학보가 창간호를 발행했다. 축쇄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계대학보 창간호는 훼손이 심해 그 면면을 자세히 확인하기에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시절 발행되었던 대부분의 인쇄물들과 같이 세로쓰기와 국·한문혼용체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편집의 경우 지면을 세로쓰기 15단을 기본으로 하여 원고에 따라 변형단수를 사용했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짜맞춤 편집에서 느껴지는 일체감은 없으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새로운 매체를 창간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또 특이한 점은 단기를 사용한 점인데, 단기 4290년에서 단기 4294년(서기 1962년)까지 사용된 단기는 1963년부터 서기로 바뀌었다.

창간호에 사용된 제호는 다음 학기인 1957년 11월 1일 발행된 계대학보 2호부터 새로운 제호로 교체되었는데, 당시에는 매 학기 1회 1천부를 발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1960년대 발행횟수의 변화

1960년 12월, 학기당 2회 발행으로 늘렸다가 1965년부터 격주간 발행에 돌입하게 된다. 격주간 발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신문사 운영 매커니즘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초창기 창간이후의 난관을 극복하고 중흥 또는 발전기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60년 12월 14일에 발행된 계대학보 3면에 최초의 화보가 실렸는데, “날로 發展하는 대啓明”이라는 제목으로 사진 특집의 성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경북인쇄소, 35년을 찍다

창간호부터 시작된 경북인쇄소와 계명대신문과의 끈끈한 인연은 그 후로 35년 지속되어진다. 지금의 경상감영공원 근처에 위치했던 경북인쇄소는 당시 영남지역 최대의 규모와 설비를 자랑했었다. 우리대학 재단의 수익성 사업으로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경북인쇄소는 90년대 디지털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는데 실패해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경영악화 등으로 예전의 모습을 잃는다. 1990년에 들어와서 전산조판을 시작했으며 그 이전에는 활판 조판 방식을 사용했다. 따라서 1990년까지의 계명대신문도 활판 조판이라는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아직도 활자에 잉크를 묻혀 교정지를 찍은 후 학생기자들에게 나누어 주던 경북인쇄소 아저씨들의 투박하지만 정겨운 표정이 떠오르기도 한다.

△ ‘계대학보 문화상’에서 ‘계명문화상’까지

계명대신문사를 대표하는 문화행사는 뭐니 뭐니 해도 계명문화상이다. 혹자는 계명문학상이라 부르곤 한다. 왜 문학상이 아닌 문화상으로 명명했을까? 이런 고민은 아직도 계명문화상에 응모하는 학생들에게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초창기 계대학보 문화상을 살펴보면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학문의 진정한 토론과 대화의 광장이 되기 위해 본사는 계대학보 문화상을 제정하여 104호부터 모집, 게재합니다. 게재된 원고는 고료를 지급하며 1년동안 게재 된 모든 작품 중에서 우수한 것을 뽑아 대상, 당선작, 가작을 선정하여 시상하니 독자 여러분의 많은 투고를 바랍니다.” 이는 1969년 3월 17일 발행된 계대학보 104호에 실린 계대학보 문화상의 안내문이다. 지금의 계명문화상이 청년문학도의 발굴과 대학문화의 진흥을 위하는 목적으로 운영된다면, 당시에는 다양한 의견과 여러 담론에 대한 토론 등을 목적으로 하는 여론활성화에 무게를 두고 있다.

모집부문으로는 수필, 기행문, 콩트, 논문 등이 있었으며 독자 투고를 늘리는 것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선금을 살펴보면 대상에게 1만원, 당선자에게 5천원, 가작에게 3천원을 각각 부상으로 시상한다고 밝히고 있다.

1980년에 들어서면서 계대학보 문화상을 계명문화상이라는 이름으로 문패를 바꿔달고 본격적인 대학 문학상으로서의 위상을 세워나간다. 계대학보 문화상과 계명문화상 사이에 계명대학보 희곡상이 제정되어 운영된 점도 중요한 전환점을 시사해준다. 1977년에 제정된 계명대학보 희곡상은 3회동안 유지 되다가 계명문화상에 바통을 넘기게 된다.

계명대학보 희곡상의 의미를 분석해보면, 앞선 계대학보 문화상에 비해 전문적인 공모전으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분야가 구체적인 부문으로 명시되었고 당선작의 경우 연극반에 의해 공연되는 점 등을 내세우면서 홍보에 나섰다.

계명문화상은 당시 대학문학상 중에 가장 많은 상금을 내걸고 적극적인 홍보를 했다. 심사위원 역시 당대의 작가들을 엄선하여 위촉하는 등의 노력이 기반되어 단시간에 전국 대학문학상을 대표하는 위상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러한 위상이 제 27회 시상식을 갖는 지금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 신문사 내의 신문사, 영자신문

The Keimyung Gazette는 현재 우리대학의 영자신문이다. 많은 우수한 재원들이 영어로 뉴스를 전하기 위해 오늘도 구슬 땀을 흘리고 있는 곳이다. 영자신문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확인하는 것은 자료의 부족으로 어렵다. 이후 영자신문의 뿌리 찾기를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취재를 해야할 부분으로 여겨진다.

계명대신문 제 393호 1980년 4월 1일자 1면에는 영자신문 제 1기 견습기자를 선발한다는 광고가 실려있다. 80년대 계명대신문사에는 영자신문을 만드는 부서가 존재했다. 지금과 같이 독립된 영자신문사가 아닌 계명대신문사의 한 부서로서 기능했다. 15년 정도가 흐른 후 영자신문은 계명대신문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독립적인 위상을 갖게 되었다.

△ 자체 DTP 시스템 구축, 제작국

탁상출판이라는 개념은 90년대 초반부터 우리나라 인쇄 및 신문업계를 강타했다. DTP(Desk-top Publishing) 시스템을 구축한 1998년 이를 운영할 전담 부서인 계명대신문사 제작국이 신설되었다. 제작국 출현으로 디지털 조판 인력을 양성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작업시간 단축이라는 큰 성과를 이루게 되었다. 많은 대학신문사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자체제작을 포기하여 지금은 몇몇 대학에서만 이뤄지고 있지만, 계명대신문사 제작국에는 오늘도 맥킨토시를 주무르는 학생기자들의 열기가 가득하다.

△ 전자신문의 포기와 재기

1999년을 전후해 전자신문을 1년여 동안 운영했었다. 그러나, 전자신문에 대한 인식의 부족과 운영자의 미숙, 적극성의 부족 등의 이유로 의미 없는 외침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 실패가 2006년 전자신문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큰 경험이었다. 기획단계부터 실제 서비스 실시에 이르기까지 2년여의 준비를 통해 세상에 나온 것이 포털형 전자신문 gokmu.com이다.

안세권 주간교수의 의지와 대학본부의 지원을 이끌어낸 신문사행정팀, 추진력을 가진 퇴임기자들의 복귀 등 여러 호조건 속에서 전자신문국을 신설하여 계명대언론사 통합 뉴스 포털 gokmu.com이 지난 2006년 8월 30일 서비스를 개시했다. 1년간의 운영을 바탕으로 올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 대학신문, 내실이 최우선이다.

성장을 위주로 커왔던 지난날의 대학언론에 대한 반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계명대신문 역시 화려했던 지난날을 접어두고 현실적인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이다. 학생기자 인원의 빈곤은 전국대학에서 90년대부터 불어 닥친 위기를 표면화 시키는 작은 현상에 불과하다. 인터넷이라는 괴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따끈따끈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대학신문은 주간신문이라는 벽과 마주한 채 정체되고 있다. 정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고 있지만 아직은 실험적인 수준이다. 독자지향적인 신문을 위해 그동안의 틀을 과감히 깨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서구의 대학에서 보여지는 학생들 스스로의 매체로 변화하는 것이나 기존 대학언론의 건설적인 통합 등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계명대신문 창간 50주년에는 거창한 행사가 없다. 매년 있어왔던 계명문화상 시상식과 초청강연회 일정에 조촐한 기념식을 가질 뿐이다. 대신, 독자들에게 한 발 더 다가서기 위한 지면 업그레이드와 학생기자 교육 프로그램 개선, 신문배포 영역의 확대 등을 통해 내실 다지기에 한창이다. 대학신문의 주인은 바로 대학인 모두이기 때문이다.
계명대신문사 역대 편집국장·제작국장·주간교수
■ 편집국장

김이봉 1957
장원달 1958
박청륭 1959
이병준 1960
박순경 1961
문해완 1962
이만형 1963
이재구 1964
김희설 1965
윤두혁 1966
박영환 1967
신동수, 이한석 1968
윤성광 1969
이철구 1970
편은식 1971
정춘섭 1972
이충희 1973
신종봉 1974
손인호 1975
손화식 1976
송경원 1977
라상범 1978
이종일 1980
김윤조 1980
김옥동, 서호승 1981
서호승 1982
오승건 1983
허필수 1984
김선표 1985
손규호 1986
김택상 1987
김종수 1988
최현길 1989
최승미 1990
하승룡 1991
정재호 1992
김예경 1993
한영필 1994
김정미 1994
최진용 1995
윤영하 1996
강화자 1997
김현경 1998
김성동 2000
박지현 2001
문경희 2001
홍정민 2002
이다희 2003
권정규 2004
윤진영 2005
이지현 2006
백지원 2007

■ 제작국장

김민철 2003
정주은 2006
박경인 2007

■ 주간교수

황성수 1957
강도영 1959
정규복, 이정호 1964
서재극, 신동욱 1967
서재극 1968
남기심 1969
김기홍 1974
서대석 1975
서재극 1976
이원주 1978
노태돈 1979
설성경 1980
권의무 1980
노중국 1982
장해광 1982
김치홍 1984
이석재 1985
원명수 1988
김세철 1989
홍순성 1991
최봉기 1993
이진우 1994
박일우 1995
손유익 1996
김용일 1999
임대근 2001
배대헌 2002
이상식 2004
안세권 2005




[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