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발칵 뒤집었던 신정아 사건에 대해 검찰은 “학력위조에서 비롯된 권력형 비리”라고 규정지었다. 그러나 이 간단한 발표문으로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신정아 전 광주비엔날레 감독의 ‘비리’는 예술계와 정치권력이 얽힌 치정쯤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고위 권력자인 변 전 실장이 ‘연인’ 신정아를 출세시키기 위해 비리를 저지르고 국가 기강을 문란하게 했다는 발표 내용은, 이 사건을 개인의 스캔들 혹은 연애사로 축소시키려는 의도마저 엿보였다. 대한민국 전체를 별안간 학력 검증 소동으로 들끓게 했던 학력위조 문제 또한 몸통이 아니라 꼬리에 불과했다. 신정아가 학예실장으로 있었던 성곡미술관의 박문순 관장은 쌍용 김석원 전 회장의 부인이었다. 신정아의 계좌는 성곡미술관장의 자택에 숨겨져 있던 비자금 87억원과 이어져 있었다. 검찰은 성곡미술관에 후원금을 낸 기업들을 조사했다. 대우건설, 산업은행, 기아자동차 등의 이름이 거론됐다. 갑자기 모든 예술 후원금이 ‘억울하게’ 정치 비자금의 혐의를 받는 듯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한국형 메세나의 진면목이었다. 씁쓸하고 참담했지만 진실이었다. 한때 유행처럼 번지며 ‘1기업 1미술품 운동’
김경준이 귀국했다. ‘BBK 주가조작’ 문제가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한 것이다. 수천 명의 피해자를 발생시킨 대규모 금융 사기사건을 과연 현 제 1야당 대통령 후보가 일으킨 것인지, 아니면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김 씨의 단독 범행인지 여부도 곧 드러날 것이다. 주가조작은 시장 경제 질서의 근본을 교란시키는 용서받지 못할 범죄행위다. 이 나라 경제의 기틀을 무너뜨리는 죄악이다. 거기서 발생한 ‘이득’은 수많은 개미들의 돈을 사기쳐 독식한 결과다. BBK를 통해 김경준이 횡령한 돈 3백84억은 주식 폭락으로 자살에 이른 수많은 이들의 목숨 값이다. 미국 같은 경우 주가조작으로 감형 없는 징역 150년을 선고받은 사례도 있다. 공동의 질서를 무너뜨린 점에서 죄질에 있어 그 정도 형벌로도 모자라다. 조선시대처럼 능지처참과 삼족을 멸하는 철저한 응징이 있어야 할 중대 범죄다. 그러지 않고서는 누군가에 의해 또 다시 반복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줄곧 ‘불리한 대선 판을 뒤엎기 위한 선거용’이라며 이번 수사를 정치공작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BBK 주가조작은 이명박에 의한 범죄다. 그가 주범이든, 한나라당의 공식 변론처럼 ‘공범’이든 죄를 지은 것은 명백한 사실
신사임당이 대한민국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아니 대한민국 ‘여성계’에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가 5만원권 화폐 인물로 선정되자 문화미래 이프는 시대착오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신사임당은 “가부장적 사회가 만들어낸 현모양처형 여성상의 전형”이라는 주장도 들려온다. 한 마디로 “자기가 역경을 딛고 일어나 자기의 재능을 발전시켜 사회에 공헌한 바람직한 여성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인물로 이프가 꼽는 이는 유관순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그토록 지지하는 유관순과 그토록 반대하는 신사임당에 대한 논리 자체가 몹시 허술하다는 것이다. 물론 유관순은 위대하다. 하지만 그는 어린 나이에 옥사했다. 그렇게 십대에 산화한 열사들 중 남성을 찾으라면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는 게 역사의 진실이다. 숱한 전쟁터에서 숨져간 무명의 학도병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유관순은 남성 일색의 국가유공자 명단에서 색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부각된 것일지도 모른다. 유관순을 현대 여성상의 전형으로 꼽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순교’에 가까운 그의 애국심 또한 안타깝지만 전근대적이다. 게다가 남성 가부장제 사회에서 만들어진 위인이라는 지적에서 유관순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사극 속 왕들이 ‘궁’ 밖으로 나오고 있다. 왕의 권위는 때로 한낱 내시보다도 하찮게 보인다. 장차 보위에 오르실 지존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내시나 다모 따위밖에 될 수 없는 미천한 집안의 자식들이다. 갈 데 없는 화전민의 아이들(이산) 또는 역적의 아들로 태어나 숲 속에 버려진 무녀의 양자나 몰락한 양반의 딸(왕과 나)만이 어린 왕의 ‘동무’들이었다. 사대부들은 그저 소품일 뿐 왕의 친구도 왕의 스승도 모두 내시와 나인들이다. 왕의 ‘사랑’마저 언제나 궁 밖에 있다. 심지어 왕의 사랑과 ‘합궁’에까지 내시가 깊숙이 개입한다. 현재 SBS는 월화극 ‘왕과 나’를, MBC는 월화 ‘이산-정조대왕’· 수목 ‘태왕사신기’를 편성하면서 사극 전성시대를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세 드라마는 제목부터 파격적이다. ‘왕과 나’는 왕을 ‘나’와 동격으로 보고 있다. 조선 국왕은 주인공인 내시 김처선과 동급일 뿐 아니라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과 같은 눈높이다. 그리하여 훗날 성종이 될 자을산군은 내시와 옷을 바꿔 입고 저잣거리로 나가고, 내시가 될 김처선은 곤룡포를 입고 잠시나마 왕 행세를 한다.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 식의 옷 바꿔 입기는 얼핏 낭만적인 에피소드
대한민국 공영방송 KBS가 곧 시청료를 기존 2,500원에서 4,000원으로 인상할 계획이다. 여론의 반대와는 아랑곳없이 무려 60%나 일방적으로 인상시킨 채 관철을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물론 반대가 만만치 않다. 실은 KBS 직원을 비롯한 방송 관계자들만 인상안을 관철시키려 애쓰는 듯이 보인다. KBS를 시청하는 ‘국민’들은 시청료 인상에 대해서 대체로 수긍하지 못할 뿐 아니라, 현재 전기세에 통합 징수되는 2500원에 대해서도 전혀 ‘수신료의 가치’를 못 느끼겠다는 분위기다. 도리어 이번 기회에 아예 통합징수를 원천적으로 분리하라는 원성만 자자하다. 그러나 KBS는 집요하다. 이 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KBS는 차근차근 준비해 왔다. 2005년 국정감사를 통해 800억 적자를 낸 사실이 알려졌을 때부터 정연주 사장 이하 KBS의 경영진은 제일 먼저 수신료 인상안부터 내세웠다. 방만한 경영과 프로그램의 질적 저하에 대한 반성은 없이 몇 년째 수신료 인상안 관철을 위해 골몰해온 것이다. 적자를 타개할 그 어떤 능력이나 수단이 없는 무능함을, 오로지 전 국민의 주머니를 1500원씩 털어내 해결하겠다는 안일하고 뻔뻔한 발상이다. 그에 대한 나름의 ‘타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로버트 퍼시그) 신을 믿는가? 왜 믿게 되었는가? 기억이 없다면 당신의 믿음은 순전히 부모와 환경이 주입한 것이다. 이런 식의 질문에 ‘신의 뜻’이라는 갑옷으로 무장돼 있다면, 당신은 이미 종교에 깊이 세뇌된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신간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 단언한다. 신이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종교를 만들었다! 종교는 더 이상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그 ‘사회’의 소산이다. 미국 아칸소 주에서 태어났다면 기독교가 옳고 이슬람교가 틀렸다고,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났다면 그 반대로 생각할 뿐이다. 이 신성 모독의 책은 현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이 두툼한 인문서가 한국에서도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그의 주장은 단호하고도 명쾌하다. 논증은 치밀하고 설득력 있다. 이 책이 제기하는 질문들은 너무나 근원적인 것이기에 ‘신앙인’들이 회피해왔던 문제점일 수 있다. 도킨스가 하려는 주장의 요지는 서문에 모두 나와 있다. 이후의 내용은 그 질문에 대한 논증 작업이다. 종교는 세상을 평화롭고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이라는 기만’을 통해 악
일이 엉뚱한 데로 튀고 있다. 날이 갈수록 점점 이상야릇해지고 있다. 신정아 사건은 이제 대한민국 전체 여론을 뒤흔드는 초대형 스캔들이 됐다. 문화일보는 급기야 만천하에 신정아의 누드를 공개했는데, 이유는 단 하나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란다. 신정아가 ‘교수’였다는 이유로 우리 사회의 학벌 제일주의를 질타할 때부터 조짐이 수상했다. 갑자기 전 언론이 한 목소리로 학계의 무능을 질타하고, 가짜 박사에 대한 자체 검증능력이 아예 없는 것처럼 집중 공격할 때도 미심쩍었다. 대학을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학계가 그렇게 만만한 곳일 리 없다. 경찰이 나서서 검증 시스템을 도입한다느니 설쳐 봐도 막상 가짜들이 굴비 엮듯 줄줄이 엮여지지 않자, 불똥은 곧 연예계로 튀었다. 연예계는 원래가 학력이나 학벌로 먹고 사는 동네가 아니기에 과연 가짜 학위가 많았다. 빅 스타들이 연일 학력 위조로 도마에 올랐다. 문화예술계와 연예계의 거물들이 결국 초라한, 자신의 진짜 학력을 고백하며 대중 앞에 사죄했다. 일부는 사법처리 대상이 되어 범법자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번에 문제가 된 이들 대부분은 새롭게 들통 났다기보다 주변에서는 이미 내막을 알고 있던 경우가 많았다. 그들에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음껏 활짝 웃지도 못했다. 죄인이 따로 없었다. 입을 뗀 첫 마디는 한결같이 ‘국민들께 죄송하다’였다. 사지(死地)에서 극적으로 생환한 ‘아프간 인질’들이 입국장에서 보인 반응은 그야말로 석고대죄였다.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고맙고 고마울 뿐인데 그 기쁨만으로도 통곡이 나와야 마땅할 텐데, 그들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무표정으로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말만 거듭했다. ‘하나님’과 ‘기도’는 절대 금지 단어였다. 40여일 간 억류됐다 풀려난 감격 대신 석고상처럼 굳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아프간으로 떠나기 전 유서까지 썼다는 결연한 의지와 신앙심은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자살특공대’를 방불케 하며 격전지로 떠났던 그들은 그렇게 인간의 가장 약하고 초라한 면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돌아왔다. 그들을 맞이하는 우리 국민들의 반응도 싸늘하기는 마찬가지다. 억류 기간 동안 마음 졸이며 무사귀환을 염원하고 전원 석방 소식을 눈 빠지게 기다려왔음에도, 막상 귀국길의 그들을 안아 주지는 않았다. 풀려났다는 소식에 안도했을 뿐이다. 더 이상 가슴 아픈 ‘인질 살해’ 소식이 없다는 점이, 19명이 모두 무사하다는
요란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남녀차별 의식 없는 세대가 출현했다고 전 매스컴이 호들갑이었다. 남자보다 우월하고 성취감 높은 여성 리더 집단, 그들은 이름도 화려한 ‘알파걸’이었다. 하버드 대학 아동심리학자 댄 킨들런의 책 ‘알파걸(ALPHA GIRLS)’은 사실 원산지인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주목받는 트렌드가 되었다. 대한민국 여성가족부가 가장 뿌듯해 할 성과 중의 성과가 바로 ‘알파걸’의 탄생이 아니었던가. 각종 문화 프로그램은 앞 다퉈 이 신조어의 용어풀이와 ‘잘난’ 여학생 집단의 출현을 다뤘다. 전교회장을 맡은 여학생들은 ‘알파걸’의 모델로 긴급 소환되었다. SBS가 봄 개편으로 신설한 정보 프로그램 ‘굿모닝 세상은 지금’ 5월 13일 방송은 1시간 동안 알파걸 신드롬을 다뤘다. 일단 ‘남학생보다 공부 잘하고, 아버지와의 유대관계가 돈독하고, 리더십 강한’ 알파걸의 특징에 부합하는 모델이 있어야 했다. 성적 우수하고 학생회장을 맡고 있는 몇몇 여고생이 초반에 등장했다. 효과적인 개념 전달을 위해 당연히 ‘남녀공학’의 여학생이어야 했다. 이 프로그램이 방송시간 대부분을 통해 ‘알파걸’의 증거로 제시한 집단은 사법연수원의 여성합격자들이었다. 기획의도 자체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그에 대한 정책은 언제나 남성 대표가 결정했다. 이는 단순히 아이들의 숫자를 조절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여성의 몸을 국가가 관리하고 나아가 국민의 이불 속까지 들여다보고 검사하는 사생활 통제로 드러난다. ‘새마을 시대’를 거친 우리 국민에게, 지난 30년 간 아이를 더 낳느냐 마느냐는 국가의 선택이었다. 단산과 출산이 불과 한 세대 만에 국정의 으뜸 사안이 될 만큼, 우리나라는 정권 중심적 발상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장애인 비하 및 낙태허용’에 대한 발언으로 논란을 빚고 있다. 장애인단체와 여성계, 종교계 모두를 쑤셔놓은 이 발언의 문제점은 단순 말실수가 아니라 대권주자와 그가 속한 집단의 생각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낙태를 둘러싼 생명윤리 문제는 일단 유보하겠다. 그것을 논할 만큼 복잡한 윤리적 고민 속에서 나온 발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지는 낙태가 여전히 정부 소관이라는 사실,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가 당사자가 아닌 행정 수반의 결제 아래 놓여있다는 ‘새마을 시대’의 사고를 공표했다는 점이다. 장애아일 경우에 제한적으로 아이를 없애라는 논리는, 그래서 생
‘아버지’들이 미디어를 휩쓸고 있다. 올 봄 개봉한 한국영화의 트렌드는 한 마디로 ‘아버지’다. ‘아들’, ‘눈부신 날에’, ‘날아라 허동구’는 모두 어머니 없이 아버지와 아이를 투톱으로 내세웠다. 장애인과 그 아버지를 다룬 권용국 감독의 장편 데뷔작 ‘파란 자전거’와 설부터 개봉이 미뤄진 ‘이대근, 이댁은’까지 개봉작은 온통 부성애 타령뿐이다. ‘우아한 세계’ 역시 그렇고, 지난해의 초대박 ‘괴물’ 또한 아버지들의 이야기다. 가정의 달이면 으레 가족애를 강조한 작품들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올 봄은 유독 부성애가 판을 친다. 그것도 ‘신파’를 내세워 아버지의 눈물을 강조한다. 영화만이 아니다. KBS 메인 뉴스는 5월 들어 ‘우리 시대의 아버지’라는 집중 기획까지 마련했다. 아버지는 바야흐로 올 봄 대한민국을 읽는 코드다. 그런데 왜 다시 ‘아버지’인가? 한때 아버지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 IMF 직후 이 땅의 아버지들은 파산의 책임을 홀로 짊어져야 했다. 그 즈음 김정현이라는 형사 출신 소설가의 ’아버지’가 출간돼 6개월 만에 1백만 부나 팔려나가는 기염을 토했다. 아버지들은 연민의 대상이었다. 또한 모든 아버지가 자기 연민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열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