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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로서의 BL(Boys Love)을 알아보다

‘BL’ 콘텐츠는 남성과 남성 간 사랑 이야기
동성애와 무관, 성소수자 다룬 장르도 아냐

“여성들이 쓰고 만들고 여성들이 소비하는 판타지 장르”

 

“대리만족의 세계에만 익숙해지다 보면 점차 실감세계가 엄두조차 나지 않을 수 있다.”

 

주류 장르로 떠오른 BL

요즘 가장 반응이 뜨거운 장르는 ‘BL’ 콘텐츠라고 한다. ‘보이즈 러브(Boys Love)’의 약어로 남성과 남성 간 사랑 이야기다. 동성애와는 무관하다. 성소수자를 다룬 퀴어 장르가 아니디. 여성들이 쓰고 만들고 여성들이 소비하는 판타지 장르다. 사회문제가 배제돼 있고 모두가 이 남남 커플에게 우호적이고 응원을 보내는 아름다운 ‘가정(假定)’이 필히 동반된다. BL과 유사한 단어로 소년애, 쇼타콘, 야오이, 주네 등이 있지만 BL에는 성적 기호와 성행위도 포함돼 있다. 감각적 묘사와 섬세한 전개가 특징이다. 시장의 대세로 떠오르면서 드디어 ‘음지에서 양지화’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새삼스러운 장르는 아니다. 1960년대 이후 일본 만화와 소설로부터 등장해 꾸준히 매니아 층의 인기를 끌어왔다. 문제는 양적 팽창이다. 아니 팽창의 속도다. 최근 웹드라마의 인기로 한류의 새 가능성으로까지 점쳐지고 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앞다퉈 BL 콘텐츠들을 선보이고 있고, 웹툰과 웹소설의 BL 신작이 한 달에 3백 종씩 쏟아진다. 국내에서는 2016년 리디북스를 시작으로 알라딘, 네이버 등이 BL에 공격적 투자를 해왔다. 카카오페이지는 2021년 7월에 BL 파트를 따로 만들었다. “BL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을 파고든다. 디지털 콘텐츠로 바뀌자 10년 사이 10배 이상 시장이 커졌다.”는 현장의 목소리도 있다. 싫어할 수는 있으나, 이제 무시할 수 없는 규모다. 최초의 BL 웹드라마 ‘시맨틱 에러’는 소위 초대박이 났다. 2018년 리디북스 BL 부문 대상을 차지한 19금(禁) 웹소설이 드라마에선 ‘직접 묘사’를 빼고 12세 관람가로 유통 중이다. 드라마 공개 이후 일주일 간 웹소설 거래액이 이전 대비 6배가 늘었다고 한다.

 

‘내돈내산’ 96%가 10~40대 여성

로맨스는 애초 여성들의 대리만족을 위한 용도다. 할리퀸 시리즈가 노골화된 형태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인기로도 증명되었다. BL은 로맨스에서 여성 캐릭터가 들어갈 자리에 여성의 다양한 욕망이 투영된 미소년이 들어간다. 당연히 자아도취형 사랑과 함께 오는 ‘헌신에 대한 공포’는 없다. 실감 없고 대면(對面) 없는 시대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물린다. 지난 8일자 서울신문 기사 제목이 이를 인상적으로 압축했다. “男 모르는 판타지… 그녀들이 사랑한 ‘男男 로맨스’”

 

교보문고 통계에 따르면 BL ‘내돈내산’ 고객은 96%가 여성이고 20대부터 40대까지 고루 분포돼 있다. 남자 아이돌을 소비하는 새 경로이기도 하다. 공연도 팬미팅도 유보된 시대에 웹드라마는 팬들을 열광시켰다. 실제로 최근 컴백한 보이그룹 DKZ(구 동키즈)의 멤버 재찬(본명 박재찬)은 드라마 출연 한 번으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재찬이 ‘시맨틱 에러’에서 대학생 추상우 역을 맡았을 때 소속사도 그룹 이미지에 악영향을 줄 것을 걱정했지만, “들어오는 섭외를 가릴 위치가 아니”라던 재찬은 그야말로 DKZ를 살려냈다. DKZ는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활동기가 아님에도 과거 음원들이 차트에서 역주행하는 이변을 낳았다. 최근 재정비를 마친 DKZ는 지난 12일 발매한 ‘사랑도둑’으로 음악 방송에서 처음으로 1위 후보에 올랐다. 

 

‘시맨틱 에러’와 ‘겨울 지나 벚꽃’ 등의 성공 이후 BL드라마 신작이 쏟아지고 있다. 넷플릭스는 ‘나의 별에게’ ‘너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컬러 러쉬’ 등의 국내 BL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나의 별에게'는 시즌2 방영을 앞두고 있다. 영화투자배급사 NEW는 지난달 31일 '블루밍'을 시작으로 '따라바람', '본아페티', '트랙터는 사랑을 싣고'를 순차적으로 공개한다고 발표했다. BL소설 '신입사원', '을의 연애'도 영상화 예정이다. 국내에서 BL은 과거 10대 아이돌그룹 팬들이 멤버를 짝지어 만들던 팬픽(팬 창작물) 문화와 얽혀 있다. 팬들이 소셜미디어에서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생산하고 관여한다. 포토에세이, OST, 굿즈 등 2차 부가 시장도 있다. ‘블루밍’을 포함해 NEW가 올해 순차적으로 공개할 BL 드라마 5편은 해외에서 모두 완판됐다. 적은 제작비로 단기간에 찍을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그래서, 무엇을 선택할 텐가?

코로나가 1년 넘게 이어지던 무렵, 코로나19가 성인남녀의 연애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지를 연구한 발표가 있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한국인구학회가 공동 주최한 제24회 인구포럼에서 최슬기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대학원 교수와 계봉오 국민대 교수가 발표한 ‘코로나19 시기의 연애·결혼·출산 변동’이었다. 연구팀은 여론조사기관 엠브레인에 의뢰해 지난해 2월 5~10일 25~49세 한국인 성인남녀 1천9백45명을 대상으로 했다. 조사 결과, 미혼이며 애인이 없다고 밝힌 602명 중 ‘결혼하고 싶다’는 남성은 60.7%, 여성은 33.6%였다. 특히 여성들은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면서 ‘결혼을 더 하기 싫어졌다’는 답이 20.7%로 긍정(5.9%)을 크게 앞섰다. 미혼이며 애인이 없는 이들 가운데 지난 1년 동안 새로운 이성을 만나거나 소개받았다는 사람은 열 명 중 두 명(22%)뿐이었다. “배우자가 있거나, 연애 중인 응답자들의 다수는 코로나19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싱글들은 새로운 만남 자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며 ‘연쇄적인 악영향’을 우려한 것이 결론이었다.

 

수많은 연애지침서와 동영상도 단언한다. 지금 연애 중인 사람은 콘텐츠를 볼 시간이 없다, 나가서 사람을 만나라! 물론 여건이 허락되지 않거나 상황이 복잡해지긴 했다. 그러나 대리만족의 세계에만 익숙해지다 보면 점차 실감의 세계가 엄두조차 나지 않을 수 있다. 팬데믹 상황은 마치 격리와도 같은 여가 시간 상당량을 콘텐츠에 의존하게 했다. 그렇게 많은 것이 온라인으로 대체된 지 2년이 넘었다.

 

BL이 각광받는 데는 지금껏 흥행한 많은 이야기와 장르물이 BL 형태로 ‘재가공’이 가능하다는 점도 있다. 남녀가 주인공이던 자리에 남남을 넣어 변형시키는 것이, 남녀가 등장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고안해내는 것보다 상업적 성공률도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 감정에 확신이 없을 청춘들에게, 이성은 어렵고 두렵고 동성이 ‘우정’인지 ‘사랑’인지 모를 대상으로 그려지는 콘텐츠는 매력적일 수도 있다. 사람 만나는 일이 낯설고 ‘위험천만’해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감정은 콘텐츠와 나누는 것이 되어버렸다. 갈등과 고통이 배제된 채 감정이입조차 요구하지 않는 로맨스 감상에 유일한 걸림돌은, 현실의 경험치일 것이다. 지나치게 안전한 로맨스가 식상해지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럼에도 의혹은 짙어진다. 온라인 콘텐츠로 감각을 어디까지 대체할 텐가? 실패 없는 로맨스란 오직 화면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마저 전원을 끄고 현실로 돌아오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코로나19로 인한 제한도 점차 풀리고 있다. 다시 관계망 속으로 들어가야 할 차례다. 우리의 감각은 과연 이전과 같으며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지 진지한 점검이 절실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