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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평론] 악녀들이 유린하는 드라마 속 대한민국

- 악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마이클 센델의 책『정의란 무엇인가』가 신드롬을 일으키며 화제가 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정의에 목말라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겠다. ‘정의’가 사라진 듯이 보이는 건 드라마 속 세상도 마찬가지다. 현재 인기인 KBS <제빵왕 김탁구>와 SBS <자이언트>만 봐도 남을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내가 죽는 살벌한 경쟁뿐이다.

문제는 이 비극이 전부 악녀들 때문에 비롯됐다는 설정이다. 주인공들의 엄마이거나 혹은 엄마의 경쟁자들이 자식세대까지 불행하게 만든다. <제빵왕 김탁구>의 서인숙(전인화 분)은 악의 화신 그 자체다. 그러나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 가부장제는 털끝만치도 손상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몰랐다”는 알리바이 하나로 무조건 결백하다. 죄는 전부 아버지의 조강지처가 뒤집어쓴다. 서인숙은 악녀의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불륜을 넘어 남편의 심복인 한승재(정성모 분)와 아이까지 낳은 사이다. 동정의 여지가 없다. 구일중(전광렬 분)에게 탁구는 진짜 아들이고 구마준은 수치다. 아버지의 피와 재능을 물려받은 탁구는 빵 만드는 실력도 탁월하더니 경영능력도 타고 났다. 부계의 피만 인정하는 <제빵왕 김탁구>의 구도에서 거성그룹 정실부인의 아들인 마준은 다만 죄의 씨앗일 뿐이고 후레자식이다. 게다가 엄마를 닮아 악독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팔봉선생(장항선 분)께 배우는 과정에서도 깊은 속정은 탁구가 독차지했다. ‘착한 천성’은 부계의 유전이기 때문이다. 잔혹한 모성과 자애로운 부성의 대결구도가 바로 드라마의 요체다.

탁구를 돌보지 않은 아버지의 죄 갚음까지 대신한 스승 팔봉은, 가부장제의 모든 허물을 덮는 역할을 해냈다. 드라마가 배신과 음모로 치달아갈수록, 팔봉의 도덕 군자 같은 언행들은 더욱 더 감동적으로 펼쳐졌다. 팔봉선생의 빵과 말씀이 가장 잔혹한 가부장제 드라마를 휴머니즘으로 포장한 셈이다. 팔봉은 배우 장항선의 명연으로 거의 김구 선생에 비견될 현자가 됐지만, <제빵왕 김탁구>는 지금 재벌2세 1인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는 데 올인 하고 있다.

<자이언트> 또한 이강모(이범수 분)와 황정연(박진희 분)을 둘러싼 온갖 치정과 복수극을 배필 잘못 만나 ‘사랑 없는 결혼’을 한 대가로 치부한다. 남자에겐 한 번의 실수였고, 여자들에겐 평생에 걸친 악행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최근 여성 캐릭터는 남자에게 이용당하고 버림 받는 동시에 유혹하고 위협하는 고전적인 팜므파탈로 퇴행했다. MBC <동이>는 한술 더 뜬다. 인현왕후-장희빈-동이라는 세 여자 속에서 숙종은 우유부단의 극치다.

피터팬 혹은 마마보이같은 숙종(지진희 분)의 마음에 드는 이는 오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팅커벨 같은 동이(한효주 분)뿐이다. 착한 여자는 욕망 없는 존재여야 하고, 자의식도 없는 동이같은 투명인간이 돼야 한다. 극히 단순화된 표독스런 여자들의 악행도 ‘착한’ 여자들의 속없음도 넌더리가 난다. 아마 악녀 몇 ‘제거’하는 것으로 드라마는 ‘정의’를 구현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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