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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모를 위한 변명


‘카사노비스트’라는 사람들이 있다. 18세기 유럽을 종횡하며 수없이 많은 여성들을 행복(?!) 하게 했던 자코모 카사노바(1725-1798)를 공부하는 학자들이다. 그는 초인적 여성편력의 기록을 원고지 3천6백 쪽에 달하는 자서전에 담았다. 어느 공상모험 소설도 무색케 하는 이 미완의 대하 자서전은, 당시 유럽의 사회상을 꾸밈없이 기록한 소중한 사료가 되어 그 전문 연구가가 나타나기에 이른 것이다.

몇 개의 이삭을 주어보면 자코모는 보통의 지식인이 아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 볼테르를 제네바로 찾아가 문학과 예술, 정치에 대하여 큰 논쟁을 벌인다. 볼테르는 그를 자신과 대등한 지성인으로서 대접했다고 썼는데 나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 심오한 사상이 아니라 섬광처럼 번득이는 기지와 재치 있는 말재주가 판을 치던 세상에서, 천하의 딜레탕트 카사노바가 볼테르를 놀라게 했을 가능성은 크다.

볼테르는 민중을 미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카사노바는 반박하여, 이것은 민중더러 철학자가 되라는 것인데 철학자가 국가권력에 복종하기를 즐겨하겠는가 묻는다. 민중을 쇠사슬에 묶어 놓아야 행복할 수 있으므로 미신이 쓸모가 있다고 우긴다. 계몽군주들이 베푼 관용의 덕을 입어 멋대로 살았던 그가 민중에 대하여 적대감과 경멸을 표하고 반혁명을 두둔한 것은 배은망덕도 유분수다.

그러나 런던에 가서는 딴소리다. 왕을 배알할 때 입는 정장을 하고 거리에 나섰다가 부두노동자 뱃사람 패거리한테 두들겨 맞고 진흙탕에 처박히기 일쑤다. 지체 높은 사람들이 한사코 마차를 타야하는 이유다. 그는 프랑스인을 능가하는 영국인의 완강하고도 격렬한 민주주의적 기상과 패기를 보고 감탄한다.

프러시아에 간 그는 프레데릭 대왕을 만나 조세정책을 토론하고 복권에 대한 정책을 헌책하여 신임을 얻는다. 내친 김에 자코모는 페테르부르그에 가서 에카테리나 여제(女帝)를 만난다. 천문학자를 무색케 하는 달력의 지식을 며칠 만에 마스터한 그는 그녀에게 러시아의 달력을 바꿀 것을 건의한다.

그러나 여제는 이것이 불가함을 초근초근 타이른다. 그녀의 심오한 지혜와, 무지하고 힘없는 백성에 대한 어머니와 같은 사랑에 그는 깊은 감동을 받는다. 35년이나 이 방대한 제국을 평형과 중용으로 다스린 이 위대한 여성에게 카사노바는 최고의 찬사를 바친다.

그는 당시의 언론에 대하여 날카롭게 칼날을 댔다. 언론인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사실보도에서 일탈하는 것을 꼬집었다. 자신들이 무슨 스타인 양 착각하고 거들먹거리는 미국의 TV 앵커들을 그가 보았다면 사정없이 쳤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사에게는 밉게 보여 비엔나에서 쫓겨났다. 그녀의 조카와 결투하여 중상을 입힌 때문이라지만, 청정비구니를 무색케 하는 도덕의 화신(化身)이었던 그녀에게 자코모가 이미 미운 털이 박혀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드리드로 도망친 그는 스페인어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어(詩語)라고 찬양하면서, 이것은 이 나라를 8백 년이나 지배한 무어인의 아랍어 영향 때문이라고 했다.

왕과 장군들의 얘기에 식상한 학생, 아날르 학파의 통계수치에 골치가 아픈 사학자는 베니스 감옥에서 탈출한 자코모의 모험담에서 웃음과 휴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짧은 글이지만 자코모를 말하면서 그의 사랑의 얘기를 외면하고 지나칠 수는 없다. 그의 지적, 예술적 자질보다도 그의 사람됨을 나는 좋아한다. 부귀와 영화를 초개처럼 버린 이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사나이는 모든 여성을 오직 여성이라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무차별적으로 사랑했으니 이것은 득도(得道)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속물들의 관점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여성들조차 그는 뜨거운 정열로 사랑했다. 우르페 후작부인은 70대 중반의 노파였으니 그녀의 성적 매력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간다. 그는 수녀를 사랑했고 신기료 장수의 딸을 사랑했다.
닥치는 대로 살신(殺身)의 정열로 사랑한 그는 네 번이나 매독에 걸렸고, 두 번 독살의 희생물이 될 뻔했다. 결투에서 칼에 맞아 사경을 헤매기를 열두 번. 이것이 모두 여성을 위한 죽음의 가시밭길 고행이었다.

유럽 제일의 사기 도박꾼이었던 이 악한은 여성에게만은 진솔하고 의리를 지켰다. 전설 속의 호색한 돈 환은 여성을 유혹하고 파괴하고 버리는 여성 혐오자였으니, 자코모의 관점에서는 최저질의 인간이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유혹하여 버려놓은, 그래서 죽음에 이르게 한 그레첸은 14세의 소녀였다. 독일문학의 교황 괴테를 자코모가 만났다면 그를 어떻게 봤을까? 아마도 매우 수상쩍은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멸시했을 것이다.

자코모는 공작부인을 말할 때나 거리의 여인을 말할 때나 그 어조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그의 자서전이 읽히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것은 말이 안 된다. 그는 회고록을 모국어 이탈리아어로 쓰지 않고 불어로 쓰면서, 이는 널리 읽히기 위함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스스로 백작의 칭호를 자신에게 주고도 태연할 만큼 사회계급과 인습의 피안(彼岸)에 서 있었던 거인이다.

이해타산과 위선에 함몰되어 있는 오늘의 세상이 슬프다.




[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