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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가작(1) - 궁지

  • 작성자 : gokmu
  • 작성일 : 2016-05-30 12:32:40

● 제36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가작(1) - 궁지 

궁지

윤화룡(명지대학교·문예창작학·4)

 

궁지

 

산비탈은 젖어 있었다. 진흙은 걸음마다 들러붙었고 몸이 부딪힐 적마다 머리 위 나무들은 물을 털어내었다. 돌연 눈앞에 나타난 가지가 날 선 손톱으로 얼굴을 낚아채며 생채기를 남겼다. 뺨을 쓸어낸 손바닥을 들여다보았지만 피는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밭은 숨이 목을 긁어댔고 서툰 곡예사가 불덩이를 입에 머금은 듯 목이 타들어 갔다. 그럼에도 다리는 쉬지 않았으나 그마저도 돌부리가 진창에 무릎을 꿇게 했다. 주저앉은 동안 벌어진 입안으로 각다귀가 날아들었다. 악다귀를 쓰는 벌레의 날개가 입천장을 문질러댔다. 침에 엉긴 벌레를 뱉어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움켜쥐었다. 썩은 가지가 분질러지며 다시 한 번 몸이 휘청였다. 발을 디딜 때마다 무릎이 먼저, 그리고 허리와 등이 차례로 신음했다. 흙탕물이 채 묻지 않은 곳은 이제 몸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인가였다. 이웃이라고는 없이 외따로 떨어진 산기슭에 자리한 인가였다. 불빛은 없었다. 남자는 가슴까지 오는 그리 높지 않은 담을 짚고 안을 들여다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담장을 따라 솟은 깨진 병 조각들이 남자의 접근을 가로막았다. 개가 짖기 시작했다. 남자는 개소리에 놀라 담장 너머로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해 보였다. 개가 짖기를 멈출 리 없었다. 그 소리에 마당이 딸린 벽돌집의 창문에 불이 들어왔다. 이어 현관문이 열리고 집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뒤세우고 노인이 서 있었다. 남자는 담을 사이에 두고 노인과 마주했다. 개가 짖기를 멈추었다.

누구요?

남자는 다급한 마음에 손으로 담을 짚을 뻔했다. 노인의 음성이 유리 조각만큼이나 날 서 있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노인의 뒤를 따라 구부정한 자세의 노파가 서 있었다. 무릎께에 닿아있는 노파의 손에 구형 무선전화기가 들려있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오?

남자는 길을 잃었다고, 잠시 안으로 들어가 전화를 쓸 수 있겠느냐고 사정을 했다. 노인은 진흙투성이인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길을 잃었소?

남자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고, 노인은 현관문 손잡이를 쥔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목에 쇠줄을 매단 개만이 낮게 그르렁거리며 줄이 팽팽해지도록 날뛰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경찰을 불러주겠소.

노인은 노파의 손에서 전화기를 잡아채 버튼을 눌렀다. 남자가 담벼락 너머로 손을 뻗자 입고 있던 재킷의 소매가 유리 조각에 쓸리며 안감을 드러내었다.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노인을 향해 내달렸다.

경찰은 됐습니다.

전화기를 손에 쥔 채 남자를 노려보던 노인이 노파를 집 안으로 들어서게 했다.

 

남자는 검은 세단 안에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운전석에는 김 실장이, 뒷좌석에는 김 실장의 고향 후배란 사내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줄곧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남자가 차에 오른 뒤 저물기 시작한 태양은 이제 야산에 가려 그 끄트머리만을 내보이고 있었다.

태양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남자는 고개를 돌려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스치듯 올려다본 백미러에 후배의 두 눈이 비쳐있었다. 후배는 며칠간 잠을 못 잔 사람처럼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노인네가 보자고 했다고?

남자의 물음에 김 실장은 입꼬리를 비틀어 반응했다. 남자는 수년간 의원님이라 부르던 호칭을 근래 들어 내키는 대로 바꿔 부르고 있었다. 지난날에는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백 의원님이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전해드릴 것도 있다고 하시고요. 그동안 많이 애쓰셨잖아요?

차량은 국도로 들어서 있었다. 정체구간을 빠져나와 이제 막 제 속도를 찾기 시작했다. 남자는 차간거리만큼 멀어진 앞 차량의 후미등 불빛을 마주 보며 그 붉은 빛 위로 지난 시간의 장면들을 영사해보았다. 설탕에 꼬여 든 개미떼이든 오물에 꼬여 든 파리떼이든 백 의원의 주위엔 항상 많은 이들이 몰려있었다. 한정된 먹이를 놓고 남자는 끊임없이 그들과 다투어야 했다.

왜 서울에서 보지 않고?

남자가 대시보드에 달린 시거잭을 누르며 김 실장을 향해 물었다. 재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가 달궈지기를 기다렸다.

지난주부터 지역구에 내려가 계세요. 아시다시피 요즘 한창 바쁠 때니까요.

바쁠 때라는 김 실장의 말에 남자는 여전히 자신의 차 트렁크에 실려 있을 고가의 골프채를 떠올렸다. 언젠가 백 의원이 지역건설사 사장에게서 받은 것을 필요 없다며 남자에게 건넨 것이었다. 백 의원의 트렁크에는 이미 골프채가 차고 넘쳤다. 램프가 켜진 시거잭 라이터가 딸각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피워?

남자가 백미러를 통해 후배에게 물었다. 후배는 아까부터 백미러만 보고 있었는지 남자보다 앞서 백미러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한 대 주시겠습니까.

남자는 몸을 돌려 담배를 건넸다. 그러면서 그날 처음으로 후배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았다. 웃는 얼굴이나 성난 얼굴이 잘 그려지지 않는 하나의 표정으로 굳어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남자는 라이터를 내밀어 불을 붙여주었다. 담배를 받아 쥔 후배의 손이 눈에 띄게 떨고 있었다.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다시 생각해보세요.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요.

아니, 이미 결정한 일이야.

남자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차창을 내리기 무섭게 담배 연기가 창밖으로 빨려 나갔다. 김 실장은 라디오를 틀었다. 그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후배가 채 몇 모금 피우지 않은 담배를 기침과 함께 창밖으로 던졌다. 남자는 사이드미러를 통해 작은 불꽃이 어둠 속으로 사그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차량이 뜸해진 국도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남자는 노인을 피해 내빼었다. 노인이 그사이 신고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의 악재를 더 떠안았음에도 남자는 더 큰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이미 남자에게 악재는 백 의원의 골프채만큼이나 차고 넘쳤다.

다시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남자를 질타했다. 남자는 재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몸을 웅숭그렸다. 불빛을 따라 한참을 이동했지만 불빛은 여전히 성냥불만 한 작은 점에 지나지 않았다. 점퍼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배터리가 없는지 망가진 것인지 여전히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반대편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었지만 라이터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의 얼굴로 빗물이 달려들었다. 입에 문 담배의 종이가 빗물에 젖어들어 갔다.

남자는 허리 높이의 바위에 올라 빗줄기 너머를 바라보았다. 빗물에 번진 붉은빛은 심해어의 눈알처럼 끔뻑거리고 있었다. 도무지 거리를 가늠할 수 없었다. 앞으로 한 시간 또는 밤새 걸어야 닿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남자의 사리판단은 퓨즈가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길이 열린 곳으로 불빛이 손짓하는 곳으로 발을 옮길 뿐이었다.

 

국도의 풍경은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같은 구간을 여러 장 복사해놓은 듯 도로 한쪽에는 야산이, 다른 한쪽에는 벌거숭이 땅만이 연이어졌다. 이따금 건물들이 불쑥 나타나곤 했지만 그마저도 불이 꺼져 있기 일쑤였다. 깊이 들어서면 들어설수록 도로는 그 무엇도 내보이려 들지 않았다.

심야시간대 라디오 디제이의 음성이 남자를 졸음으로 밀어붙였다. 남자는 백시트에 몸을 묻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잠들지 않으려 애를 썼다. 캄캄한 창밖을 내다보며 적당한 곳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짧은 터널을 통과하자 헐벗은 땅 위로 불 켜진 건물이 솟아났다. 국도로부터 건물로 들어서는 진입로에는 ‘24시간 편의점이라 쓰인 입갑판이 세워져 있었다. 남자가 앞 유리창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잠깐 세웠다 가지.

김 실장은 대꾸하는 대신 남자를 힐끗 돌아보았다. 남자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두 번 얘기하지 않았다.

남자의 기대와 달리 세단은 멈추지 않고 편의점을 지나쳐 내달렸다. 남자가 김 실장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김 실장과 후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편의점은 금세 멀어져 이제 사이드미러에도 비치지 않았다. 남자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 하자 김 실장이 그제야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금방 도착할 텐데, 조금만 참으시죠.

남자의 판단에 목적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더구나 말과 다르게 김 실장은 속력을 내지 않고 있었다.

 

불빛은 건물 옥상에 매달린 구조물에서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얼마간 다가간 뒤에야 그것이 십자가에 켜진 불빛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교회는 새로운 신도들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려는 듯 마을과 담을 쌓고 외따로 서 있었다. 다리의 힘이 쇠할 대로 쇠한 남자는 교회로 발을 디뎌 예배당의 문부터 열어젖혔다. 미처 문 위에 걸려있던 왕국회관이라 적힌 현판은 보지 못했다.

외관으론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예배당의 천장은 유난히 높아 보였다. 어디에도 창문은 보이지 않았고 출입문은 남자가 들어선 곳 하나뿐인 듯했다.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곧장 앉을 곳을 찾아 비트적거렸다. 실내로 들어선 남자의 몸에선 비와 땀이 섞인 진창 냄새가 풍겼다. 불결한 냄새와 수상쩍은 발소리가 예배당의 침묵을 금세 흩트려 놓았다.

이 열 종대로 놓인 신도석의 맨 뒷줄에 당도한 남자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 번 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예배당 안에서 움직임을 띄는 거라곤 남자와 누군가 켜놓은 촛불뿐이었다. 높낮이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촛불은 벽에 걸린 십자가상을 비추고 있었다. 남자는 종교를 믿지 않았으나 그 순간만큼은 여느 죄인들처럼 그의 두 눈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남자가 기다란 신도석을 차지하고 몸을 뉘었다.

 

후배는 양손에 쥔 쇠줄을 남자의 머리 위에 드리웠다. 쇠줄은 남자의 얼굴을 지나 곧장 목으로 향했다. 남자는 불쑥 들이닥친 폭력에 목을 바짝 잡아당기며 반응했다. 후배는 성급하게 남자를 옭아매었고, 그 탓에 쇠줄이 재갈을 물리듯 남자의 입술 새로 걸쳐졌다. 뒷좌석의 후배가 있는 힘껏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남자의 입술이 금세 푸르게 변색되었다. 침에 섞인 신음이 쇠줄을 적시며 흘러나왔다. 남자가 두 팔을 뒤로 뻗어 후배의 머리채를 낚아채려 안간힘을 썼다. 김 실장이 후배를 보고 소리쳤다.

이 새끼야 목이야, .

후배가 쇠줄을 느슨하게 풀어 곧바로 남자의 목을 공략했다. 그 짧은 틈에 남자는 손바닥을 밀어 넣어 쇠줄을 움켜쥐었다. 후배와 남자의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김 실장이 한 손으로 운전대를 쥔 채 나머지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후려쳤다. 남자의 입술이 쉽게 찢어졌다. 클랙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고, 비틀대는 세단의 옆을 SUV 차량 한 대가 추월해 지나쳤다. 후배는 이제 조수석을 끌어안다시피 하며 아귀힘을 쥐어짜 냈다. 김 실장이 운전대를 양손에 부여잡고 차를 진정시키는 사이, 남자가 한쪽 다리를 빼 들어 운전대 위에 놓인 김 실장의 손목을 내리찍었다. 손이 꺾인 김 실장이 고통을 호소했다. 고삐 풀린 남자의 발이 운전대를 쥔 김 실장의 나머지 손마저 짓이겼다. 세단이 기어코 중앙선을 넘어섰다. 맞은편 차선의 심야 운행 덤프트럭의 헤드라이트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경적을 내질렀다. 김 실장이 급히 핸들을 꺾었고 후배는 몸이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쇠줄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남자의 발이 운전대며 김 실장의 얼굴이며 앞 유리창을 걷어차 댔다. 덤프트럭의 성난 헤드라이트가 차 안의 세 사람의 눈을 멀게 했다.

 

남자는 목 안에 갇혀있던 숨을 토해내며 잠에서 깨었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자신의 목을 조르는 이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 채 짧은 꿈에서 깼다. 그와 함께 남자의 몸에 깃든 통증도 깨어났다. 발목에서 시작해 무릎, 허리, 척추, 어깨, 그리고 목을 타고 찢어진 입술로 터져 나온 고통이 남자를 꿈보다 더한 악몽의 현장으로 되돌려놓았다.

몸을 일으켰을 때에는 신도석 맨 앞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소리 없이 예배당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나무 의자는 삐걱거리며 이단자의 존재를 알렸다. 신도석에 앉아 기도하던 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남자는 겁부터 집어먹어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이 남자를 향해 다가왔다. 노인의 손에 표지가 떨어져 나간 성경이 쥐어져 있었다.

누구요?

남자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노인은 남자의 행색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길을 잃었소?

황급히 신도석을 빠져나가려던 남자의 몸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마음과 달리 성큼성큼 걸음을 떼지 못했다. 유독 남자에게만 가중된 중력이 남자의 두 다리를 자꾸만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도망 다닌다고 벌을 피할 순 없소.

걸음을 멈춘 남자가 노인을 돌아다보았다. 노한 듯한 노인의 얼굴 뒤로 십자가에 박힌 예수상이 올려다보였다. 누군가 발밑의 촛불을 꺼놓은 탓에 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있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소.

남자는 지체 없이 예배당 문을 열어젖혔다. 닫히는 문 사이로 노인의 음성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지옥뿐이오. 유황불이 들끓는 지옥 말이오.

남자는 교회 입구를 나서며 미처 깨지 못한 잠을 쫓듯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방금 본 노인이 산비탈의 인가에서 마주친 노인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차 문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남자는 수차례 발로 걷어찬 끝에 차 문을 열어젖혔고 곧장 가드레일을 넘어 도망쳤다. 눈썹 살이 벌어진 김 실장이 소매로 피를 닦아내며 운전석을 빠져나왔다. 트렁크를 열어 공구 더미 사이에서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여전히 머리를 감싸 쥔 채 뒷좌석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후배를 향해 소리쳤다.

이 새끼야, 빨리 가서 잡아.

후배의 입술이 피범벅이었다. 후배는 연신 바닥에 침을 뱉어댔지만 피 섞인 침은 가늘게 늘어져 그대로 턱에 엉겨 붙었다. 김 실장이 유리 조각이 박힌 후배의 손에 삽을 건넸다. 트렁크를 내려 닫는 하는 소리가 차량이 끊긴 도로에 메아리쳤다. 그것이 출발신호였다. 둘은 단 한 번뿐인 게임의 술래가 되어 앞서간 남자를 뒤쫓기 시작했다. 후배가 먼저, 뒤이어 김 실장이 가드레일을 차례로 뛰어넘었다.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야산을 뛰어올랐다. 버려진 산은 길이라 할 것이 없었다. 남자는 나무 사이로 덤불 위로 바위 너머로 흔적을 남기며 내달렸다. 기우에 사로잡힌 새들이 퍼드덕거리며 남자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밤이슬에 젖은 야생화와 미처 숨지 못한 작은 곤충들이 남자의 발에 짓이겨졌다. 숨은 금세 차올랐고 남자는 검은 고목 뒤에 웅크리고 앉아 첫 번째 휴식을 취했다. 우듬지 너머 보이는 시커먼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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