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는 80년대 6-7년을 대명동 캠퍼스에 살다시피 했다. 학사와 석사를 여기서 마치며 3S(Study,Sport,Sarang)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그 후 타지로, 해외로 돌아다니며 오랫동안 대구를 떠나 있었다. 그리고 2008년에 돌아왔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대명동 캠퍼스였다. 청춘의 고향집 앞에서 만감의 교차를 제어하기 어려웠다. 파란만장한 모험을 겪고 20년 만에 고향땅을 밟은 오디세우스의 감회가 그랬을까? 페넬로페가 수많은 구혼자에게 시달릴 만큼 여전히 아름다웠듯이 대명동 캠퍼스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만큼 여전히 아름다웠다. 사실 멀리 떠나 있는 동안에도 캠퍼스의 전경이 종종 눈에 들어왔다. 영화나 드라마에 심심찮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계명대의 건물이 아름답고 조경이 탁월하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켜켜이 쌓인 선각자들의 정신과 열정의 흔적을 읽어내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계명대 60년의 역사는 대명동 캠퍼스 본관에서 출발한다. 본관은 정문으로 들어가 가장 높은 곳으로 따라가면 나온다. ‘저 높은 곳으로’의 지향성을 한 몸에 느낄 수 있다. 커다란 나무로 둘러싸인 빌라도 광장에 들어서면 2층의 T자형 평면 건물이 저만치 눈앞에 들어온다. 짙은 하늘색 지붕 위로 종탑이 솟아있고 정면 중앙에는 네 개의 대리석 기둥이 받치고 있는 포티코가 있다. 하얀 도리아 식 기둥이 담쟁이 넝쿨이 덮인 적벽돌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건축은 조지안 스타일, 혹은 신조지안 스타일로 설명할 수 있다. 조지안 스타일은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초까지 풍미했던 영미 건축풍으로, 대칭성이 강하고 모임지붕의 중앙에 돔이 솟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건축양식은 미국 동부의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특징이기도 한데, 본관의 설계자 조자룡이 하버드 출신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재는 지붕 위의 돔을 떼어 따로 보관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 본관을 문화재로 등록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문화재로 지정되면 학교 쪽에서도 건물에 손을 댈 수 없어 더 나은 발전계획을 구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월의 풍파를 아름답게도 이겨낸 저 고색창연한 본관은 1955년 5월 5일 아담스(안두화)가 초석을 놓고 그 해 12월 5일에 준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우아하고 장중한 풍모가 빙켈만의 고전미학을 떠올린다. ‘고아한 소박성과 차분한 위엄/edle Einfalt und stille Große’. 이후 건축된 계명대 건물의 대부분은 이 본관을 모델로 삼고 있다. 오래 전부터 지역 사회에 관광명소로 알려져 있고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된 이 건물의 터는 그러나, 원래 그 어떤 용도도 생각할 수 없는 척박한 청석산이었다고 한다. 60년 전에 그 바위산을 깎아 아름다운 배움의 터전을 일군 유명 무명의 개척자들을 생각하니 그저 눈시울이 뜨거워질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