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싱그러운 오월, 이번엔 남문을 통해 학교로 들어가 보자. 고개를 들면 왼쪽엔 자연대, 정면엔 인문대, 오른쪽에는 KAC가 보인다. 나무에 둘러싸여 건물의 윤각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는가. 헤겔은 한걸음 더 나아가, 잘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되레 잘 인식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무에 둘러싸인 세 건물의 주인공들이 추구하는 인식의 영역을 과학이라 하든 인문학이라 하든, 혹은 국제교류라 하든, 그 모든 성취가 나무의 보편적인 은덕을 넘지는 못할 것이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지향하며 옆으로 두루 덕을 끼치는 나무, 자고로 훌륭한 인격은 나무와 닮았다. 저 세 건물은 그러한 인물을 기념하고 있다.
백은관, 1982년 성서 캠퍼스에 처음으로 들어선 건물로 자연대의 이름이다. 백은(白恩)은 선산 출신의 최재화 목사의 호이다. 최재화는 법학을 공부했지만 일제의 침탈에 맞서 독립투사로 무장투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 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목회의 길로 접어들어 지역 교계의 지도자로 크게 활약했다. 목사(牧師)란 양을 기르는 사람, 같은 논리로 최 목사는 교육에 뜨거운 사명감을 발휘했다. 계명대 설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는가 하면 제2대 재단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러한 공로를 기려 자연대의 이름을 백은관이라 명명한 것은 1993년이었다. 계명대가 성서 캠퍼스로 확장 이전하면서 첫 번째로 자연대 건물을 세웠다는 것은, 먼저 출발한 인문 예술의 기반 위에 새로운 차원의 도약을 감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계명대는 19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명실상부하게 종합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자연대가 준공된 다음 해 바로 옆에 영암관이 완공되었다.
영암관, 1983년 인문대가 들어선 건물로 영암(榮巖)은 계명대 설립자 3인 중의 한 사람인 강인구 목사의 호이다. 영주 출신의 영암은 선교뿐만 아니라 근대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바, 특히 계명대 초창기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건축 구조상으로, 영암관은 가파른 산비탈을 그대로 살려 지은 두 개의 건물을 연결한 방대한 면적의 학당이다. 문이 6개나 되는 입체적인 모양이지만 그 안은 진리의 미로처럼 지성을 유혹한다. 건물 밖의 풍경도 눈이 부신다.
일단 적벽돌을 감싸고 있는 담쟁이덩굴의 운치와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흙 한 줌 없는 수직의 벽에 녹색의 잎을 무성하게 지어냈다가 가을엔 핏빛처럼 붉게 물들인다. 건물 주변은 다시 이중 삼중으로 나무가 둘러싸고 있다. 그 나무 중에 따로 사람의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이 있다. 한문학자 이원주, 신학자 최성찬, 철학자 백승균, 교육학자 정만득, 한글학자 서재극, 국문학자 조동일,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 등등. 이들이 누구인지 자세히 말하는 것은 내 필설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가는 일이지만 모두 인문·교육의 대가들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의 인격과 학문이 또 나무와 닮았으니, 지상에 뿌리를 두고 높은 데를 우러르며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나무의 생태를 구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