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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불라 라사 115 (계명교양총서 115선)] '문명의 충돌'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은 냉전의 종식 직후 프랜시스 후쿠야마(Yoshihiro Francis Fukuyama)의 ‘역사의 종언’으로 대표되는 서방 세계의 낙관적인 주장들을 비판하고 세계정세의 변화를 해석하는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문명의 충돌’을 집필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중심논지는 ‘탈냉전 시대에 사상 최초로 세계정치가 다극화·다문명화 되었으며, 문명 정체성이 탈냉전 세계에서 전개되는 결집, 분열, 갈등의 양상을 규정한다.’는 주장이다. 헌팅턴은 종교가 문명을 규정하는 핵심적 특성이라는 전제 하에 탈냉전 세계의 주요 문명을 중화 문명(중국 문명), 일본 문명, 힌두 문명, 이슬람 문명, 정교 문명, 서구 문명, 라틴아메리카 문명, 아프리카 문명으로 나눈다. 경제 성장에 힘입은 아시아와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이슬람이 서구 주도의 세계 질서에 대해 도전하게 됨에 따라, 서구 문명은 이슬람 문명 및 중화 문명과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 헌팅턴은 전망한다. 탈냉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분쟁의 원인을 상이한 문명 사이의 충돌로 보는 헌팅턴의 이러한 해석은, 한편으로는 경제적 갈등과 그에 따른 정치적 역학 관계를 간과했거나 호도했다는 비판을 받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냉전 이후 세계정세의 변화를 진단하고 분석하려는 학자들과 정치가들 그리고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서 21세기 초반인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특히 2001년 9.11 테러로 더욱 각광을 받았으며, 최근 이슬람 세력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폭력 사태(IS테러 포함)를 해석하는 틀로 작용하고 있다.

헌팅턴 자신이 밝힌 이 책의 집필 동기와 주장은 일견 가치중립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계정세의 변화를 해석하는 패러다임을 제시하겠다는 것은 이미 세계관과 가치관을 내포한 정치적 기획이다. 헌팅턴은 문명 패러다임이 한시적 수명의 유용함을 가진다고 했지만, 그 정치적 기획이 가진 실제 의도에 대해서는 명시적인 답변을 회피한다. 우리는 문명 패러다임이 ‘누구에게 유용한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책의 또 다른 집필 의도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미국 패권주의의 안정적인 유지’이다. 냉전의 종식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 서방세계의 완승인 것 같지만, 이데올로기 갈등이 사라진 자리를 종교에 기초한 문명의 충돌이 대신할 것이라는 경고성 주장을 함으로써 헌팅턴은 서구의 핵심국인 미국의 낙관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질타한다. 다문명적 세계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문명이 유지되고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서구적 정체성을 견지, 수호, 쇄신해야 하며 특히 미국이 서구 문명의 지도국으로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헌팅턴은 주장한다.
이렇듯 헌팅턴은 자신이 끼고 있는 렌즈가 한시적 수명을 가진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했으나 그 렌즈의 색깔에 대해서는 함구하였다. ‘문명의 충돌’은 우리가 한시적 수명과 색깔을 가진 각각의 렌즈를 끼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성찰하게 하는 타산지석과 같은 책이다. 9.11 테러와 최근 폭력 사태의 원인에 대한 균형 잡힌 분석을 하기도 전에, 이 책의 내용과 개념을 이해하기도 전에, 헌팅턴의 주장에 대한 찬반 입장을 표명하기도 전에, 이미 ‘문명의 충돌’이라는 말이 정치시사용어가 되어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가 끼고 있는 렌즈의 색깔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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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추천해주세요] 지금, 굳이 ‘삼국지’를 읽는 이유 영화, 책, 예술작품 가운데 하나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민에 빠졌다. 괜히 실제 내 삶보다 더 있어 보이는 선택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읽어본 적 없지만 의미 있어 보이는 철학책을 고를지, 그럴듯한 예술영화를 추천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오래전 읽었던 ‘해변의 카프카‘를 떠올렸다.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이고,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여운이 남는 작품이라 추천하기에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결국 마지막에 고른 책은 이문열 작가의 ‘삼국지’다. 삼국지는 워낙 유명해서 오히려 추천하기 조심스러워지는 책이기도 하다. ‘굳이 지금 삼국지?’ 라는 반응도 있을 테고, 이미 내용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면 알고 있던 이야기와는 느낌이 꽤 다르다. 단순한 영웅 서사가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선택, 타이밍과 판단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읽다 보면 어떤 날은 조조가 가장 쿨해 보이고, 어떤 날은 유비의 끝까지 사람을 믿는 태도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삼국지는 책 ‘읽는 재미’를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고전이라고 하면 시작하기 전에 부담부터 느끼기 쉬운데, 삼국지는 일단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