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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불라 라사 115 (계명교양총서 115선)-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의 저자 카(E. H. Carr)는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정치학자이자 역사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책은 1961년에 출판되었는데, 이때는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이 시작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식민 지배를 받던 나라들이 독립을 하여 세계사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는 역사에서 역사가의 임무와 책임을 제외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에 대해 맹렬하게 비판하였으며, 그 비판을 1961년 1월부터 3월까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강연으로 6회에 걸쳐 행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묶어서 같은 해에 책으로 출판하였다.

카는 “1830년대에 역사의 도덕화에 대해 정당한 항의를 제기하면서, 사가의 과업은 ‘단지 사실을 본래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 실증주의 역사학의 대표자인 랑케를 비판하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하였다. 랑케의 견해는 역사학에서 마땅히 전제되어야하는 지극히 올바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동일한 모습으로 수용되고 인식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며, 더구나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여러 가지 정신적·심리적 등의 상황에 따라서 하나의 사료가 다르게 보여 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카는 역사학에서 사료의 객관성 확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료마저 이미 누군가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많은 것들 가운데에서 선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나 자료든지, 역사가에 의해서 선택되지 않으면 아직은 사료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료라는 것은 이미 선택되었다는 것이며, 선택에는 주관성이 어떤 식으로든지 개입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카는 역사적 사실과 역사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역사 사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으므로, 우리에게 ‘순수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 사실은 언제나 기록자의 마음을 통해 굴절된다. 사가는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행위의 배후에 작용하는 사상을 상상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카는 역사란 “사가와 사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 과정, 즉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한다.

실증주의 역사학을 비판하는 카는 2장에서 역사가도 한 개인으로서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사가도 하나의 개인이다. 다른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며, 그가 속해 있는 사회의 산물이며, 그 사회의 대변인이다. 우리들은 때때로 역사 과정을 ‘움직이는 행렬’이라고 말한다. 사가도 행렬의 한 구석에 끼어 터덜터덜 걸어가는 보잘것없는 또 하나의 존재일 뿐이다. 그 행렬에서의 그의 위치가 과거에 대한 그의 시각을 결정한다.”카는 실증주의 역사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역사가도 역사의 산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어서 카는 3장에서 과학, 도덕과 관련해서 역사를 다룬다. 실증주의자들은 역사학의 방법론을 자연과학과 유사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또한 카도 역사학이 경험적 자료를 바탕으로 귀납적 방법을 통해서 역사적 법칙 등에 대한 가설을 설정한다는 측면에서 과학과의 유사성을 인정하기는 한다. 하지만 역사학이 다루는 것은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보다는 특수한 사실이며, 역사학의 내용에 도덕과 종교적 문제도 포함된다는 측면에서 카는 과학과 역사학의 다름을 강조한다.

“사가는, 무한한 사실의 바다로부터 자신의 목적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사실들을 선택하듯이, 원인과 결과의 무한한 연쇄로부터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것들, 오직 의미 있는 것들만을 뽑아낸다.” 카에 따르면 이런 의미 있는 사실들에는 우연적인 사건들이나 비합리적인 사건들은 포함 될 수가 없다. 즉, 카는 역사가가 해야 할 일은 여러 사건들의 원인을 분석하여 우연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합리적인 해석이나 설명이 가능한 원인들을 찾아내어 현재와 미래의 인간의 역사를 이끌고 나갈 목적 개념을 설정해야 한다고 4장에서 주장한다.

그렇다면 역사의 목적에는 ‘진보’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을까? 즉 역사는 진보하는 것일까? 5장에서 카는 “역사는 지상에서의 인간성의 완성이라는 목표로 향해 가는 진보의 과정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지난 세대의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에 있다.” 이처럼 카는 역사의 진보를 주장하지만, 인간의 정신적 측면의 결과물들에 대해서만 적용한다.

마지막으로 6장에서 카는 대학의 의무―엄밀하게 말해서 역사가의 의무겠지만―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지난 400년 동안의 영어권 세계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이 역사상의 위대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것을 세계사의 중심으로 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그것의 주변적 역사로 다루는 것은 불행하게도 왜곡된 견해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왜곡을 바로잡는 것이 대학의 의무다.” 역사의 무대인 세계의 지평은 그만큼 넓어지고 있는데, 세계가 변화하고 있음으로써 세계의 중심이 이미 서유럽을 벗어났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카는 세계가 더 이상 유럽의 확대도 아니고 역사에는 중심과 주변도 없으며, 역사는 다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하나의 과정”이며 “사가 또한 그것과 함께 움직인다.”는 견해를 다시 한 번 피력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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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추천해주세요] 지금, 굳이 ‘삼국지’를 읽는 이유 영화, 책, 예술작품 가운데 하나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민에 빠졌다. 괜히 실제 내 삶보다 더 있어 보이는 선택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읽어본 적 없지만 의미 있어 보이는 철학책을 고를지, 그럴듯한 예술영화를 추천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오래전 읽었던 ‘해변의 카프카‘를 떠올렸다.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이고,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여운이 남는 작품이라 추천하기에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결국 마지막에 고른 책은 이문열 작가의 ‘삼국지’다. 삼국지는 워낙 유명해서 오히려 추천하기 조심스러워지는 책이기도 하다. ‘굳이 지금 삼국지?’ 라는 반응도 있을 테고, 이미 내용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면 알고 있던 이야기와는 느낌이 꽤 다르다. 단순한 영웅 서사가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선택, 타이밍과 판단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읽다 보면 어떤 날은 조조가 가장 쿨해 보이고, 어떤 날은 유비의 끝까지 사람을 믿는 태도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삼국지는 책 ‘읽는 재미’를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고전이라고 하면 시작하기 전에 부담부터 느끼기 쉬운데, 삼국지는 일단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