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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불라 라사 115 (계명교양총서 115선)-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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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라는 책이름은 ‘맹선생님’이라는 의미로, 성이 ‘맹孟’이고 이름이 ‘가軻’, 곧 ‘맹가’를 부르던 호칭에서 따왔다. 고대의 인물 대부분이 그렇듯, 이 책의 주인공인 맹자 역시 정확한 생졸연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여러 설 가운데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각에 따르면, 맹자는 주나라 열왕 4년(기원전 372)에 태어나 난왕 26년(기원전 289) 84세를 일기로 죽었다. 이 생졸연대에서 볼 때,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럽고 전쟁이 되풀이 되던 전국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렇게 혼란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본성대로, 곧 본래의 자기 모습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꿈꿨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맹자의 꿈과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맹자』라는 책이다.

맹자는 공자의 모국인 노나라의 곡부 남쪽에 이웃해 있던 추나라 출신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그는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진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아들의 좋은 교육환경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孟母三遷]거나, 중도에 공부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자신이 짜던 베를 칼로 잘라 보여주었다[孟母斷機]는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온다.

특히 맹자는 40대 중반부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공자처럼 여러 제후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당시의 제후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맹자가 주장하는 이상적인 왕도정치의 실시가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은 부국강병의 방법이나, 다른 제후국을 합병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힘에 있었다. 이처럼 제후들의 관심과 거리가 멀었던 맹자의 주장은 어떤 제후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시작했던 여행을 공자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성과 없이 마무리하고, 60대 초반 결국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사망하기까지 20여 년 동안 그는 제자들과 함께 학문에 힘썼는데, 그때 『맹자』의 일부가 완성되었다.

『논어』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짧은 문장구조에서 보자면, 일정한 시간 동안 구전된 뒤에 비로소 문자로 기록되었고, 그렇게 기록된 것들이 훗날 다시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맹자』는 그것이 일부라 하더라도 맹자 본인이 직접 자신의 생각을 문장으로 서술했을 가능성이 높다. 내용에서 그만큼 맹자의 생각을 직접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는 셈이다.

『맹자』에서 제시하고 있는 맹자사상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이 처하고 있던 전국시대의 현실문제에 대한 진단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제시이다. 맹자가 당시의 현실에 대해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라보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어떤 것이었는지 단순화해서 본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구분하는 그의 시각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왕도와 패도, 의로움과 이로움, 사람과 짐승을 구분한다. 그가 볼 때, 현실의 문제는 곧 ‘패도’와 ‘이로움’의 추구 그리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것에서 발생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곧 ‘왕도’와 ‘의로움’의 추구 그리고 ‘사람다움’의 회복에서 찾는다. 맹자가 볼 때 힘에 의지한 패도정치,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태 그리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상황, 그것이 바로 현실의 혼란을 가져온 원인이자 문제 상황 자체였던 것이다.

반면에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제시한 방법은 ‘왕도’정치의 실시, ‘의로움’의 추구, ‘사람다움’의 실현이다. 특히 세 가지 모두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도 더욱 근원적인 것이 바로 ‘사람다움’의 실현이다. 이 ‘사람다움’의 실현은 그가 전제한 ‘선한 인간본성’의 회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동시에 이것은 ‘왕도정치’와 ‘의로움’이 실현되는 가능근거이자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맹자』는 『한서』 「예문지」에서 ‘개인 사상서[子書]’로 분류한 이래, 송대 이전까지는 유교의 ‘경전’으로 인정되거나,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지도 못하였다. 『맹자』가 이런 취급을 받았던 것은 특정한 조건에서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등 전제왕권시대에 용인되기 어려운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맹자』에 대해 새로운 평가가 시작된 것은 송대에 와서다. 남송시대에 주희는 『예기』에서 「대학」과 「중용」 2편을 독립시켜, 『논어』·『맹자』와 함께 사서로 묶고, 이 사서에 해설을 붙인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했다. 이후 주자학뿐만 아니라 상산학이나 양명학 등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맹자』를 이론적 근거로 활용하였다. 이때부터 『맹자』는 유교의 중심 경전으로 존중되었고, 과거시험의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었다.

특히 송명대의 유학자들이 『맹자』를 중시했던 것은 그들의 이론을 전개하는데 중심축을 이루었던 것이 바로 『맹자』의 성선설이었기 때문이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모두 ‘인간 본성은 선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맹자의 성선설에 대한 자기식의 해석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전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이나 인심도심人心道心논쟁 역시 근본적으로는 『맹자』의 사유와 닿아있다. 이처럼 『맹자』는 그 내용으로 볼 때 유교의 사상을 대표할 만한 책이며, 역사적으로도 송대 이후 유교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자리 잡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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