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밖에 나가 사는 사람이 해외여행을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유랑민이 새삼 유랑한다는 얘기가 우습지 않은가? 그러나 여권을 챙겨들고 바다를 건너는 것은 역시 누구에게나 큰 산보이다.
먼 나라 마을의 길목에서 만나는 동포의 모습에서 고향살림의 맥박을 짚는다. 70년대 하이델베르그에서 만난 가냘픈 간호사. 함부르그 조선소에서 중노동에 지친 용접공. 80년대 샹젤리제를 활개 치며 고가 명품을 사재던 마님과 낭자들.
일반 시민의 해외여행도 점점 그 수가 늘어나는 추세다. 단체로 소풍 나온 소박한 차림의 아낙네들을 보면 반갑고도 대견하다. 이제 나라가 커져 고향사람의 마음도 넉넉해지고 있음을 이들의 모습에서 본다.
나이 탓인지 노인들의 효도관광도 관심을 끈다. 방콕에서 비취빛 옥돌로 만든 불상 앞에서 외조모를 꼭 닮은 노인이 합장하고 연신 절을 하고 있어, 어릴 때 일이 떠올랐다. 외조모는 극락왕생을 하려면 자주 나다니면서 구경을 많이 해야 한다는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계셨다. 불가의 말씀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가는 고행을 수도의 한 가지 방법으로 하라는 뜻이었다. 이것이 왜곡되고 와전되어 이 절 저 절 찾아다니며 유람하라는 얘기로 둔갑한 듯하다.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의 첫 질문이 ‘구경 많이 다녔는가’라는 것이라고도 했다.
속절없이 할머니를 모시고 대구 근교의 절들을 찾아가 내키지 않는 구경을 했다. 파계사, 동화사 등을 비 맞은 중처럼 툴툴거리며 둘러봤다. 이 분이 극락왕생을 했는지 알 길 없으나, 나를 100% 채식주의자로 만드신 공로는 약소하나마 인정받았을 것 같다.
아무 것에도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고 구름처럼 떠다니며 노는 것이 좋다는 조모의 인생관을 나름으로 이해하는 데에 긴 세월이 걸렸다. 죽도록 생업에 헌신하여 돈을 모으고, 다시 투자하여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나님이 죄를 사하신다는 청교도들의 믿음은 답답하고 숨 막힌다. 번 돈을 모두 길에 뿌리고 다니라는 조모의 왕생론이 내 성미에 훨씬 더 잘 맞다.
절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의 파르테논 신전, 부석사(浮石寺)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40년 전, 한 사진작가와 함께 눈 속에 묻혀 있는 부석사를 찾았다. 승가(僧伽)는 모두 어디 갔는지 인기척 하나 없고 찾아오는 발길은 우리밖에 없었다. 병풍처럼 둘러선 소백산 자락에 비스듬히 걸쳐진 절의 경내 이곳저곳을 오르내리며 수백 장의 사진을 찍는 친구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마치 저승에 간 듯 적멸의 경지에 끝없이 빠져 들어가는 체험을 가졌다.
무량수전에 다가 오르니 나지막하고 기다란 석축들이 그 앞에 펼쳐져 있다. 마치 자연 그대로 아무렇게나 빚어 놓은 듯 큼직한 돌들이 수수하게 쌓여 있다. 무심한 모습의 이 석축은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다시 볼 수 없었던 구조미의 정상이다. 그 자유스러움과 넉넉함은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은 작위적인 것이라 했는데, 그것을 넘어서면 더 큰 포박(抱樸)의 예술이 있음을 그는 알지 못했다.
무량수전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의 정화다. 처마 끝에 나무기둥을 받쳐놓아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게 한 것은 고딕성당의 부벽을 연상시킨다. 완만한 지붕의 곡선과 직교하는 건물의 섬세한 선들이 이루는 프로포션은 안정감을 준다. 웅장한 것이 아니면서, 크나큰 공간을 느끼게 하는 특이한 모뉴먼트다. 법당 안에 들어서면 자연석으로 깔아놓은 바닥 또한 아름답다.
그러나 정작 본존불은 안티클라이맥스로 보였다. 도대체 부처님이 어울리지 않게 토실토실 살이 쪄 있어 절 전체의 영적 분위기와 잘 어울리지 않았다. 신라의 반가상(半跏像)처럼 되기 위해 이 불상은 다이어트를 좀 했으면 좋을 뻔했다. 광배(光背)도 매우 크고 화려했다. 왕권의 비호와 지원을 독차지하려는 승려들의 특권의식이 나타난 게 아니었을까.
그 후 부석사를 다시 찾을 기회가 없었다. 아마도 지금은 큰 관광명소가 되어 승용차와 사람들로 그 주변이 붐비고 있으리라. 젊은 시절 가본 부석사는 아직도 마음의 성지로 아련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