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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城西) 기적을 이룩한 계명대학교의 54년


성서(城西) 기적을 이룩한 계명대의 54년

이 글은 계명대신문 지령 1000호를 기념하여 성서(城西) 기적을 이룩한 계명대학교의 54년 역사 가운데 계명대학교의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위주로 하여 글쓴이 나름대로 간략히 요약한 것이다.

계명대학교는 현재 미술대학과 패션대학, 미디어아트대학 등이 남아있는 대구시 남구 대명동캠퍼스(약 72,000㎡)와 의과대학, 간호대학, 의과대학 부속동산병원 즉 동산의료원이 있는 대구시 중구 동산동캠퍼스(89,000㎡), 그리고 새로 조성한 대구시 달서구 신당동 일대 성서 캠퍼스(1,658,000㎡)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명대학교는 2008년 8월 현재 13개 대학원, 18개 단과대학, 94개 전공 및 학과에 33,000여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고, 그동안 졸업생이 112,000여명에 이른다.
규모면에서는 국내 10위권 안의 큰 대학교다.
- 글쓴이 주 -

1. 대구의 기독교(개신교) 전파와 동산병원, 계성, 신명학교의 설립
계명대학교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구의 기독교(개신교) 전파는 1893년(고종30년) 4월 22일 배위량(W.M.Baird.) 선교사가 선교를 위해 대구방문을 하면서부터 시작된다.(H.A. Rhodes,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Vol.1,서울,1934.177쪽)
2년 뒤 배위량 목사는 1895년 현재 대구 약전골목에 미국 북장로회 대구 선교지부(Teagu station)를 마련하고 선교활동을 펼치다가 그로부터 2년뒤 평양으로 전근을 가면서 1897년 그의 처남인 안의와(James E. Adams) 선교사에게 대구 선교업무를 맡기게 되는데 안의와 목사는 1897년 11월 1일 대구에 처음 도착하자마자 바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날이 바로 영남최초의 교회인 대구 제일교회의 창립일이 된다.(경북노회, 경북노회100회사, 1977. 41~42쪽, 초창기의 계명인, 계명대학교출판부, 대구, 2004. 64쪽)

1897년 11월에 대구에 도착한 안의와 선교사는 1895년 미국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을 졸업한 장인차(Woodbridge Odilin Johnson) 의료선교사가 동년 12월에 대구에 도착하자 선교동지로서 협력하여 2년간 준비끝에 1899년 10월 대구·경북 최초의 현대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이 제중원은 현재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전신이 된 것이다.

한편 안의와 선교사는 1906년 10월 중등교육기관인 계성학교를 설립하였고, 1907년 10월에는
부해리(H.M.Bruen) 선교사의 부인 부마대(Mrs. Martha Scott Bruen) 여사가 여학생 중등교육기관인 신명학교를 설립하였다. (계성 80년사, 대구, 1989. 681쪽, 신명 90년사, 대구, 1998. 41쪽, 519쪽)

2. 계명대 설립을 위한 기성회 준비 위원회 모임
영남의 중심지인 대구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중등교육기관으로 1906년 계성학교와 1907년 신명학교를 창설한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는 평양의 숭실대(1897년 10월 배위량 (W.M.Baird)
선교사 설립)와 서울의 연세대(원두우(Horace G. Underwood) 선교사 연희전문 1915년 설립)와 같이 대구에도 기독교 대학의 설립을 희망하며 기다리고 있던 차에 안두화(Edward Adams) 선교사가 한국 주재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대표를 맡음으로써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대구에 기독교 대학설립을 누구보다도 열망하고 있던 안두화 목사는 드디어 1953년 6월 11일 오전 11시 계성학교 교장실(신태식 교장)에서 계명대 설립을 위한 기성회 준비위원회를 가졌다.

이날 모임에는 안두화, 최재화, 김광수, 박병훈, 오병기, 신후식, 주덕근, 차태화, 정일영, 신태식 교장 등이 참석하여 대학설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안두화 목사, 서기에 신태식 계성학교 교장을 선임하였다.

1953년 6월 12일 복음전도관에서 회집된 기성회 전체 모임에는 안두화, 김광수, 최재화, 강인구, 신후식, 신태식, 고병간, 정일영, 박래승 등 10명이 참석하였고 그 후 1953년 7월 7일, 동년 9월 8일, 10월 8일, 10월 28일, 11월 24일, 12월 4일, 1954년 1월 8월까지 모임을 갖고 대학재단 설립과 이사선임 등을 의결하고 동 이사회는 이날자로 해체하였다.
(「계명대학 기성회 회의록」, 학교법인 계명대학교 보관)

3. 계성(啓聖)의 ‘계(啓)’와 신명(信明)의 ‘명(明)’을 합한 계명(啓明)으로 교명 명명(命名)
계명대의 설립을 위한 기성회 조직이나 재단설립, 이사 선임 등의 주도자이자 대표자는
어디까지나 안두화 선교사였고 한국인으로서 실질적인 자문과 보좌는 교육행정의 경험이 많은 신태식 당시 계성학교 교장이 맡아하게 되었다.

이 때 계명대의 교명도 정해지게 되는데 교명을 계성학교(啓聖學校)의 ‘계(啓)’와 신명학교(信明學校)의 ‘명(明)’을 따서 ‘계명(啓明)’이라고 하자는 신태식 교장의 제안을 안두화 목사가 받아들여 그대로 “계명(啓明)”으로 확정짓게 되었다.

당시 계명(啓明)의 뜻은 크게 ‘확장하는 빛(expanding light)’으로 해석하며 참으로 멋지고 훌륭한 이름이라고 후에 초대 학장을 역임한 감부열(Archibald Campbell) 박사는 기록하고 있다.(계명대신문 제739호(1994.5.17.) 3면, 초창기의 계명인, 계명대학교출판부, 대구, 2004. 69쪽)

4. 계명대 설립자와 초대이사, 그리고 아담스관, 아담스채플, 백은관(白恩館), 영암관(榮巖館)의 유래

1954년 2월 5일부터 모이기 시작한 임시 이사회는 학교 설립인가를 얻을 때까지 우선 “계명기독학관”이란 이름으로 사설 학술강습회를 개교하기로 결정하고 1954년 3월 20일자로 경상북도 지사의 인가를 받아 동년 4월 19일자로 대구시 대신동(大新同) 283번지(현 계성중, 고등학교 부지 내) 소재 2,500평의 교지와 안두화 목사의 사택과 1953년 가을 서울로 이전한 신학교의 강의실 및 교사를 이용하여 철학과 58명, 영문학과 60명 총 118명의 학생으로 개관을 하므로서 사실상 계명대는 이 때부터 개교가 된 것이다.

계명기독학관은 대학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육법 중 대학에 관한 조항에 따라 운영되었다. 1954년(단기 4287년) 11월 8일 마침내 문교부에 재단법인 계명기독대학 설립허가신청서를 제출하였고 1955년 2월 5일 리선근 문교부 장관 명의로 법인 설립 인가서(문교 제 530호)를 받았다. 당시 신청서와 인가서에 명시된 설립자와 초대 이사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설 립 자 : 안두화(安斗華), 강인구(姜仁求), 최재화(崔載華)
□ 초대이사 : 이사장 안두화
이사 곽가전, 최재화, 정천영, 주덕근, 박래승, 김진호, 황병혁, 김광수, 박병훈
신후식, 명신홍, 정태성, 강인구, 이원영, 사미화, 감부열(이상 이사 16명)
□ 초대감사 : 오병기, 송대현

이어 재단법인 계명기독대학에서는 1955년 8월 8일자로 문교부에 계명기독대학 설립신청을 하였고 1956년 2월 18일 대학설립 허가를 받았다.

계명대는 계명대의 설립자이자 제 2대 학장을 역임하면서 오늘의 계명대학교를 있게 한 안두화 박사의 지대한 업적을 기념하여 대명동캠퍼스 미술대학 건물(1971년 준공)을 아담스 기념관(Edward Adams Memorial Hall), 성서캠퍼스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예배당(chapel)을 아담스 채플(Adams Chapel)이라 명명했고, 또 3인의 설립자중 백은(白恩) 최재화 목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성서캠퍼스 최초 건물인 자연대학 건물을 1993년 5월에 백은관(白恩館)으로 명명하여 봉정하였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설립자인 영암(榮巖) 강인구 목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성서캠퍼스 인문대학 건물을 강인구 목사의 아호를 따서 영암관(榮巖館)이라 명명했다.

5. 초대 법인 이사장 안두화 박사와 초대 학장 감부열(Archibald Campbell) 박사, 그리고
대명동캠퍼스 본관 설계자 조자룡씨
계명대 법인의 초대 이사장과 제2대 학장을 지낸 안두화 박사는 1895년 2월 28일 미국
캔사스 주의 토피카에서 안의와(James E. Adams)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난지 3개월 만에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와서 한국에서 자랐고 42년 동안 한국과 함께 헌신, 봉사하다가 1963년 은퇴하여 미국 오레건주 메드포드에서 1965년 9월 7일 향년 70세로 소천하였다.

안두화 목사는 1951년 그의 모교 멕코믹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학위와 1963년 경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58년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한국에 공헌한 업적으로 표창을, 그리고 1963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은 바 있다.

한편 계명대 초대 학장 감부열(Archibald Campbell) 박사는 1890년 2월 28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의 조지타운에서 태어나서 워싱턴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고 다시 1916년 뉴저지주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12월 9일 한국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감부열 박사는 초창기에는 평안북도 강계 지방에서 24년간 선교활동을 하다가 1946년 초에 대구로 선교지역을 옮기게 되었다.

대구에서 안두화 목사와 합심하여 대명동캠퍼스 부지 물색과 확보에 크게 공헌하였고
대명동캠퍼스 본관 건축시에는 목재, 벽돌, 기와 등 6만 달러 상당의 건축자재를 당시 미국 육군 대한국지원단(AFAK, Armed Forces Aid to Korea)으로부터 얻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55년 12월 5일 마침내 대명동캠퍼스 본관 헌당식이 열렸다. 이 때 미국장로교 총회 의장인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폴 라이트(Paul S. Wright) 박사가 참석하여 더욱 헌당식을 빛나게 했다. 감부열 학장은 1959년 은퇴하여 바로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한편 1955년 2월 8일 기공하여 12월 5일에 헌당식을 올린 대명캠퍼스 본관의 설계는 당시 미국 하버드대학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한국인 건축가 조자룡(趙子龍)씨가 맡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조자룡씨는 계명대 대명캠퍼스 본관 외에도 경북대 본관과 동산병원 구 본관도 설계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계명대에서는 초대 학장을 역임한 감부열박사를 기념하여 대명동캠퍼스 구음악대학 건물을 감부열관(Campbell Memorial Music Hall)이라 명명하고 봉헌하였다.

6. 계명대 탄생의 산파, 스미스(John. C. Smith) 박사
1950년대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한국담당 간사였던 스미스(John Coventry Smith) 박사가 1950년에 이어 1954년에 다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안두화 목사와 감부열 박사는 그에게 계명대 설립자금지원을 요청하였다. 스미스 박사는 이에 동의를 하였고 결국 뉴욕 당국의 승인을 얻어 초기 대학설립기금 12만 5천 달러가 책정이 되고 1954년 11월 최종 승인을 받았으나 부대조건이 하나 붙게 되었다. 그 내용은 이 기금의 일부 즉 3만 5천 달러를 평양의 숭실대학(당시 연합기독대학)을 서울에 재건립하는데 쓰기를 원할 경우 이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12만 5천 달러 가운데 3만 5천 달러는 숭실대를 위해 사용되고 9만 달러는 계명대 대명동캠퍼스 부지매입 자금 등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스미스 박사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확보된 이 기금은 그 뒤로 미국으로부터 이어진 수많은 재정적 지원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에 계명대에서는 스미스박사의 이러한 공로를 생각하여 성서캠퍼스 국제학대학 건물을 스미스기념관(Smith Hall)이라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7. 바우어(Bauer)관 뱁칵(Babcock) 교수촌
대명동캠퍼스 본관을 완공한 다음 한동안 재원이 없어 캠퍼스 조성이 주춤하다가 1958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필라델피아에 사는 그리스천 바우어(Christian Bauer)씨의 미화 2만 5천달러 기부금과 미군부대의 원조 건축자재로 연건평 720평 규모의 도서관이 준공되고 그해 7월 18일 봉헌식을 가졌다.

학교 당국은 당시 이 도서관(대명동캠퍼스 감부열 기념관과 동서문화간 사이 건물)을 바우어기념도서관(Bauer Menoriall library)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현재 성서캠퍼스 학생회관도 바우어관(Bauer Hall)으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대명동캠퍼스에 1970년대까지 본관과 남문(후문)사이에 22개동의 뱁칵마을(Babcock village)이라는 교수촌이 있었다. 해외에서 공부하고 금방 귀국한 교수나 타지방에서 계명대로 오신 교수나 주요보직을 하고 있는 교수들을 위해 학교가 마련한 교내 교수사택으로 전국적으로 소문난, 훌륭한 교수촌이었다. 이 뱁칵마을은 미국 위스콘신(Wisconsin)주 니나(Neenah)에 사는 뱁칵가문의 엘리자베스 뱁칵(Miss Elizabeth Babcock)과 헬렌 뱁칵(Miss Helen Babcock) 두 자매가 기증한 기금으로 건립한 것으로 이런 연유에서 뱁칵마을(Babcock village)이라고 명명했다.

뱁칵가문과 계명대와의 인연은 안두와 목사의 선친인 안의와 선교사의 부인 넬리 딕(Nellie
Dick)이 1909년 10월 31일 갑자기 소천하자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외국인 묘지에 안장) 1912년 위스콘신주 니나 출신의 캐롤라인 뱁칵(Caroline Babcock)과 재혼하게 되었다. 그녀는 Kimberly-Clark Kleenex 종이회사의 상속인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니나 장로교회와 계명대는 깊은 관계를 맺게 되고 안두화 목사의 이모인 두 분으로부터 거액의 교수촌 건립기금을 지원받게 되었다.

8. 영원한 계명인 동산(童山) 신태식(申泰植) 박사
8.1. 오로지 계성(啓聖)과 계명(啓明)을 위한 일생
대구 제일교회와 계성학교, 계명대를 설립한 아담스(안의와, 안두화 목사)가문과 계성학교 졸업, 교사, 교장, 법인이사, 이사장, 계명대 부학장, 제 3대 학장, 법인이사, 명예총장을 역임한 신태식 박사 일가와의 신앙과 인간적 만남의 인연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거니와 양대 가문은 외국인 선교사 가문과 한국인 가문으로서 대를 이어가며 오로지 계성과 계명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게 되었다.

동산 신태식 박사는 1909년 1월 21일 경북 청송 복동마을에서 신경한(申經漢)장로의 둘째 아들
로 태어났다. 1915년경 안의와 선교사에 의해 청송 수락(水落)마을에 청송 최초 교회가 설립되고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신태식 박사 가족은 후에 신경한 장로가 청송 복동 마을에 복동교회를 설립하고 초대 장로가 되었다.

이런 전차로 신태식 박사는 형인 신후식 목사와 함께 일찍 계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일본 동북제국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1939년 모교인 계성학교 영어교사로 부임을 하게 됐다. 신태식 박사가 모교 교사로 오게된 것은 본인의 일본유학을 주선해 준 헨더슨 교장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이미 이 학교에는 형인 신후식 목사가 1937년에 교사로 부임해 있었다. 그리고 8월 15일 해방과 함께 계성학교 재단은 신태식 박사를 교장으로 선임했다. 교장으로 취임한 신태식 박사는 계성초등학교와 유치원을 설립했고 교정의 풀 한 포기, 돌 하나 까지도 온 정성을 들여 돌보며 계성을 오늘의 명문사학으로 발전시켰다.

그 같은 공로로 1961년 미국 엠포리아 대학은 신태식 교장에게 명예교육학박사학위를, 캐롤대학은 명예법학박사학위를 각각 수여했다.

한편 1953년 6월 계명대 설립을 위한 기성회 준비 위원회를 본인의 집무실인 계성학교 교장실에서 개최하게 된 신태식 박사는 본인이 이 모임의 서기가 되어 회장인 안두화 목사와 함께 계명대 설립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계명대 설립 당시 신태식 교장은 대구시와 경상북도 교육위원인 동시에 경북을 대표한 중앙교육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중앙교육위원회 조동식 위원장의 도움을 얻어, 계명대의 설립인가를 얻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대학설립인가는 “대학설치 기준령”(1955.8.)에 따라 반드시 중앙교육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인가토록 되어 있었다.

8.2. 부학장 겸임
1958년 8월 정년으로 퇴임한 감부열 초대학장의 후임으로 1957년 10월 이사회에서 안두화 목사를 제2대 학장으로 임명했다.

1958년 11월 25일 제 2대 학장으로 취임한 안두화 박사는 바로 계성학교 신태식 교장을 겸임 조건으로 부학장으로 임명하여 여러 가지 학사운영을 협의하면서 점차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두화 학장과 신태식 부학장은 취임과 동시에 계명대의 발전과 위상정립을 위해 정말 어려운 대학개혁을 단행하게 됐다.
그것을 첫째 교회가 대학에 협력은 하여도 대학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교회와의 협력관계를 분명히 하는 정관변경이었다.

8.3. 제 3대 학장 취임
1961년 5.16군사혁명이 일어나고 그 해 9월에 “교육에 관한 임시 특례법(법률제708호)”이 공포되자 외국인은 교육기관의 장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안두화 학장이 부득이 퇴임하고 그 후임에 계명대 사상 최초 한국인으로 신태식 박사가 임명이 되었다. 그러나 안두화 목사는 1963년 선교사 정년으로 한국을 떠날 때까지 협동학장, 즉 명예학장으로 남아 계명대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8.4. “이런 바위산을 깎아 오늘을 마련했다”
계명대 대명동캠퍼스 아담스 기념관과 쉐턱기념관 사이의 언덕길 옆의 청석 바위 위에는 “ 이런 바위산을 깎아 오늘을 마련했다” (글씨:극재 정점식교수)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는 신태식 학장이 황무지 돌산을 깎아 건물을 세우고 나무를 심고 잔디밭을 가꾸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표로 남겨 놓은 것이다.

신태식 학장의 기질, 야망, 자존심이 아니었다면 결코 오늘의 이 아름다운 대명동 캠퍼스는 불가능했다는 것이 그 동안 계명대를 지켜 본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평가다. 헐벗은 바위산을 깎아 오늘의 아름다운 캠퍼스를 마련하는데 수많은 사연들이 남아 있다. 신태식 학장은 날이면 날마다 캠퍼스 곳곳을 자신의 안방같이 다니며 가꾸고 다듬었다. 그러니 신태식 박사가 이 캠퍼스에 대해 그토록 애착과 사랑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대명동캠퍼스 시절 캠퍼스 조성과 조경사업에 공헌한 사람들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김도엽 총무처장과 추성엽 과장이다.

특히 김도엽 처장은 일년에 양복과 넥타이를 한두 번 맬 정도로 캠퍼스 청소와 수목, 잔디관리에 온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8.5. 대학발전 모금운동을 위한 해외 나들이
신태식 학장이 특별히 높이 평가받아야 할 기관장으로서의 비상한 능력과 커다란 공헌은 대학 재정확보를 위한 모금운동이었다. 그토록 자존심 강하고 위풍이 당당한 신태식 학장이었지만 대학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해도 할 만한 사람이었다.

신태식 학장은 미국정부나 특정 단체의 지원을 받은 해외여행에도 계명대 발전모금운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또 그 밖에도 여러 차례 미국 나들이를 했다. 그 때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여비였다.

당시는 본인의 돈이나 대학의 경비로 미국에 간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도 못할 정도로 나라 전체의 경제사정이 어려웠다. 그래서 신태식 학장은 그때마다 홀트 아동복지회 주선 입양 고아들을 수송하는 일을 맡아 무료로 비행기를 타게 됐다. 마침 홀트재단의 해외 입양아 수송 업무를 안두화 목사 아들이 맡았기 때문에 그러한 편의를 수시로 보게 된 것이다.

1961년 학장으로 취임한 후 1971년까지 10년 사이에 신태식 학장은 무려 15회 이상의 해외 나들이를 하면서 수십만 달러의 기금을 모와 오늘의 대명동캠퍼스 조성에 사용하였다.

8.6. 종합대학 승격
1961년 신태식 학장 취임이후 계명대는 발전과 성장을 거듭 반복하면서 1967년 대학원이 설치되고 1970년 대학입학 예비고사제도에 따라 1962년 병설한 초급대학을 1970년 전문대학으로 개편하고 1973년 박사과정 설치와 1974년 문교부 지정 실험대학이 되었다.

전국 6개 실험대학 가운데 가장 우수한 실험대학으로 평가받았던 계명대는 드디어 1978년 3월 1일자로 종합대학이 되었다.(1997년 9월 22일 문교부 확장발표)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 많은 대학들이 “대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고 학과 신설이나 학생모집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종합대학이 되기를 한결같이 바라고 있었지만 정부의 종합대학 억제 정책에 따라 좀처럼 허가받기가 어려웠다.

8.7. “새 술은 새 부대에”, 신태식 학장 은퇴
그토록 모든 계명인들이 갈망하던 종합대학이 되고 1978년 1월 20일 개최된 법인 이사회는 한결같이 신태식 박사가 초대 총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그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며 한사코 사양하고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계명대를 홀연히 떠나게 되었다.

계명대는 영원한 계명인 동산 신태식 박사가 평생 계명대에 쏟아 부은 많은 땀과 정성과 그의 공적을 오래토록 기리기 위해 그를 명예총장으로 추대했고 대명동캠퍼스에 1980년 11월에 준공한 중앙도서관과 1993년 3월에 준공한 성서캠퍼스 중앙도서관을 신태식 학장의 아호를 따사 “ 동산(童山) 도서관 ” 이라 명명하였다.

9. 1962년 10만달러 기증한 쉐턱 부부 (Ruth and Frank Shattuck)
미국 워스콘신주 니나(Neenah)시의 쉐턱 부부(Ruth and Sidney Framk Shattuck)는 안의와 목사 부인 캐롤라인(Caroline Babock)과 1954년 이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었다. 안두화 목사가 한국의 대구 땅에 대학을 설립하고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쉐턱 부부는 1962년 2월 당시 거금 10만달러를 기증하였고 이에 힘입은 계명대는 당시 학교재정확보에 필요한 20만 달러 모금에 성공을 하게 되었다.

특히 그 20만달러 중에는 쉐턱부부외에 세계적인 정신분석학자 메닝거 박사(Dr. Karl A. Menninger)도 있었고 한국인들이 낸 3만 1천 달러 가운데 3만 달러는 박명교(의양정재호 박사 부인)여사가 기부하였다.

이렇게 모금한 20만달러가 운데 10만 달러는 학교기본재산으로 삼고 3만 5천 달러는 여학생 기숙사, 2만 5천 달러는 사무실, 1만 5천 달러는 음악관 건축 보조비, 2만 달러는 캠퍼스 정지비, 5천 달러는 도서구입비로 사용했다.

이 때 안두화 박사는 사재를 헌납하여 1963년 4월 1,800석 규모의 대명동캠퍼스 노천강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노천강당은 그 이후 대구에 명물이 되었다.

계명대에서는 쉐턱 부부의 공로를 기념하여 대명동캠퍼스 옛 가정관과 옛 남자 기숙사, 전문관과 성서캠퍼스의 법과대학 건물을 쉐턱(기념)관(Ruth and Frank Shattuck Memorial Hall, The Ruth Shattuck Hall) 이라 명명하였고 대명동캠퍼스 여학생 기숙사와 성서캠퍼스 남·여학생 기숙사 모두를 박명교 여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명교생활관”이라 명명하였다.

10. 윌슨관(Stanton Wilson Memorial Hall)
우열성(Stanton R. Wilson) 목사는 1923년 9월 21일 미국 뉴욕 포트-코밍톤에서 출생하여 1943년 코넬대학, 1948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주로 경북 안동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경북안동의 경안고등성경학교 이사, 교사, 영광학원 이사, 경안학원 설립이사, 1954년 경안고등학교 제2대 교장을 역임하였고, 1959년 4월부터 계명대 법인이사로 취임하여 1980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20여 년간 계명대 법인 이사, 혹은 이사장으로 봉사를 하였다.

윌슨 목사는 1965년 계명대의 교명을 “계명기독대학”에서 “계명대학”으로 변경할 때와 1971년 계명대 법인 정관 일부를 변경할 때 교회와 대학행정의 분리라는 원칙을 고수하며 보수적인 일부 교계 인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명변경과 정관변경을 단행하는 등 계명대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학교 당국에서는 대명동캠퍼스 예능관 즉 현 미술대학 건물을 월슨관(Stanton Wilson Memorial Hall)이라 명명하였다.

11. 계명의 은인, 의양 정재호(義洋 鄭載頀) 박사
1913년 10월 19일 경북 예천 풍양의 삼강마을에서 출생한 의양 정재호 박사는 일본 동경 유학 후 대구 서문시장에서 가내공업인 양말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 때 담장 하나 사이로 계성학교 신태식 교장 사택과 인접해 있는 연유로 자연스레 서로 존경하며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근면, 성실함으로 크게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1960, 1970년대 우리나라 재계 1위의 삼호그룹을 이끌게 된 정재호 박사에게 신태식 학장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계명대를 위해 정재호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1967년 정재호 박사는 교수연구관(대명동캠퍼스)건축비 전액을 희사하였고 각 교수 연구실마다 당시 처음 보급된 후지카 난로를 모두 기증하여 추운 겨울에도 밤늦도록 많은 교수들이 학문연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에 학교당국에서는 이 연구관을 의양관이라 명명하였다.

한편 1978년 종합대학이 되고 성서 55만평 부지매입과 건축비용 충당문제로 재정난에 허덕이던 계명대에 1992년 정재호 박사는 본인이 평생 애써 모은 재산(부산광역시 남구 문현동 401번지 일대 부동산 10필지 시가 120억원)을 서슴없이 희사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자금은 오늘의 계명대 성서캠퍼스 조성에 결정적인 큰 도움을 주었다.

이에 계명대는 다시 의양 정재호 박사의 이 같은 계명대에 대한 사랑을 오래토록 기리기
위해 2003년에 준공한 성서캠퍼스 경영대학 건물을 의양관이라 명명하였다.

정재호 박사 가문의 계명대에 대한 사랑은 1962년 부인 박명교 여사의 3만 달러 기증으로 건축한 여학생 기숙사, 정재호 박사의 대명동캠퍼스 교수연구관 건립기금 전액 희사, 1992년 성서캠퍼스 조성을 위한 120억원 상당의 부동산 희사 외에도 장남 정규직 제주축산개발(주) 회장이 지난 2008년 5월에 5억원을 계명대에 발전기금으로 희사하여 양대에 걸친 계명대 사랑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정재호 박사 부인 박명교 여사는 1964년부터 1978년까지 계명대 법인 이사와 이사장을 역임한 바 있고 정재호 박사는 1968년부터 1978년까지 법인이사를 역임하였으며 우리나라 금탑산업훈장 수상 제 1호인 정재호 회장에게 학교당국은 1990년 2월 명예경영학박사학위를 수여했고 1992년에는 계명대 법인이사회에서 명예이사장으로 추대하였다.

한편 학교 당국에서는 해담(海淡) 정규진 제주축산개발(주) 회장의 아호를 따서 2008년 1월에 준공한 계명아트센터를 “해담콘서트홀”이라 명명하였다.

12. 성서 기적의 주인공 행소(行素) 신일희(申一熙) 박사
12.1. 초대 총장 취임
신일희 박사는 신태식 학장의 장남으로 1954년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켄트(Kent)
고등학교와 트리니티(Trinity)대학교를 거쳐 1966년 프린스턴(Princenton)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전공하여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뉴욕시립대(1966년)와 독일 Kiel대(1971년), 연세대(1972년) 교수를 거쳐 1974년
계명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이 때 계명대는 문교부가 선정한 전국 6개 실험대학 중의 하나로 대구·경북일원에서는 물론 전국적으로 가장 내실 있는 실험대학이었다.

당시 실험대학은 문교부 대학개혁정책의 하나로 그 때까지 전공별로 모집하던 학생을 계열별 모집을 하여 일정기간이 지난 후 전공학과를 선택토록 하고 부전공제를 실시하며 교양과목을 늘리고 졸업학점을 160여 학점에서 140학점으로 조정하는 내용을 위주로 하여 시범적으로 실시하는 대학이었다.

이 같은 실험대학의 가장 모범적인 성공은 계명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고 이 같은 일은 1974년부터 기획실장, 학감, 부학장 보직을 맡은 신일희 박사가 주도하였다.
드디어 1978년 계명대는 종합대학이 되었고 1978년 1월 20일 법인 이사회는 설립초기부터 계명대를 이끌어 온 신태식 학장을 초대 총장으로 선임하였으나 신태식 박사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다며 끝내 사양하고 홀연히 계명대를 떠나자 당시 부학장이던 신일희 박사를 초대총장으로 선임했다.

총장으로 취임하게 된 신일희 박사에게 당시 계명대의 현실은 크게 두 가지 아주 무거운 짐을 부과하게 되었다.

그 첫째는 당시 예산규모가 계명대보다 더 큰 동산병원을 통합하여 의과대학, 간호대학을 신설하는 것이고 둘째는 캠퍼스 확장의 한계에 도달한 대명동캠퍼스를 떠나 제2의 캠퍼스를 조성하는 일이었다. 그것도 두 가지 일을 거의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참으로 어려운 일들이었다.

12.2. 동산병원과 통합, 그리고 의과대학 신설
1972년 2월 계명대 법인정관변경으로 서로 갈등과 법정소송을 계속하며 둘로 갈라졌던 경북노회는 1977년 제100회 노회를 앞두고 그동안 대구노회(회장 정순모목사, 이른바 계명대측 노회)와 경북노회(회장 백준기 장로, 동산병원장) 로 갈라진 두 노회를 무조건 재통합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리하여 1977년 3월 10일 대구노회와 경북노회는 합동으로 제일교회당에서 함께 참석하여 경북노회 제100회 정기노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북노회(회장 최창영목사)가 1974년 12월에 계명대 법인(이사장 김석진)을 상대로 제기한 이사회결의 무효 확인 소송이 대법원에서 최종 경북노회의 승소(1978.3.28.)로 종결되었으나 결과적으로 1975년 11월 23일 사립학교법의 개정으로 경북노회의 실익이 없는 승소판결이 되어 버렸다.

또 1977년 9월 22일 계명대는 종합대학으로 승격이 되었고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의과대학의 설치를 위해 1978년 5월 26일 계명대와 동산병원 양측 이사회가 두 기관의 통합을 정식으로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 까지 동산병원은 사실상 경북노회가 장악하고 있었고 노회장인 백준기 장로가 동산병원장을 맡고 있었다.

1980년 10월 계명대에 의과대학이 신설되고 동산간호전문대학은 폐교와 동시에 1989년 계명대에 간호학과가 신설되게 되었다. 그러나 두 기관의 완전통합을 위해서는 동산병원 유지재단을 해산하고 계명대 학교법인으로 통합해야만 하며 또한 보사부, 문교부의 승인절차도 남아 있었다.

1978년 12월 5일 양측 동수(각7명)의 이사로 이사회가 구성되었다. 1980년 5월 23일, 우여곡절 끝에 통합된 법인 이사장으로 동산병원 측의 마펫(Moffett)씨가 선임되었는데 이사장으로 취임한 마펫은 그 후 이사회가 열릴 때마다 중요한 안건처리에 있어서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으면 회의진행을 지연하거나 중단시키고 표결에 부쳐야 할 안건에 대해서는 가부를 묻지 않는 수법으로 이사회를 파행으로 끌고 갔다.

종국에는 이사진의 퇴진이 종용되고 1981년 10월 13일 이사전원의 사퇴와 함께 관선이사회가 구성됐다.

마침내 1982년 5월 4일 관선이사회의 사퇴종용과 압력에 의해 신일희 총장도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2.3. 탁월한 성서캠퍼스 부지 선정
1974년부터 주요보직을 수행하면서 사실상 계명대 종합대학의 기본 틀을 계획하고 준비했던 장본인이 신일희 박사다.

그 중 가장 고심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제 2의 창학정신으로 물색한 성서캠퍼스 부지 선정이었다.

대구인근의 여러 지역 가운데 경산 하양 이른바 물띠미 지역과 현 성서캠퍼스를 두고 최종 결정단계에 먼저 하양 물띠미는 캠퍼스 예정지 앞으로 금호강이 흐르고 기존 대구선 철도가 개설 돼 있어 좋은 점도 있었으나 이미 대구의 많은 대학들이 그 지역으로 이전계획을 하고 있어 한 지역에 대학이 밀집하면 교통문제가 유발하고 대구의 균형적인 발전이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또 하양 물띠미는 대구 도심에서 동쪽방향으로 위치해 있어 아침 등교길에는 햇빛을 정면으로 보게 되고 저녁 귀가 길에는 석양의 햇빛을 정면으로 보게 되는 어려움이 있고 성서캠퍼스보다 하양 물띠미는 대명동캠퍼스에서 훨씬 더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 밖에도 부지매입의 어려움 등의 문제가 예상되어 최종 캠퍼스조성 예정지로 성서 신당동 1000번지 일대를 선정하게 되었다.

오늘의 모든 계명인들 뿐만 아니라 많은 대구 시민들조차도 신일희 박사의 성서캠퍼스 부지선정은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1978년 종합대학 승격과 함께 신일희 총장은 성서캠퍼스 부지매입과 동시에 자연관(백은관) 기공식을 갖고 55만평의 성서캠퍼스 시대를 개막하였다.

12.4. 전국 최초 “총장 직선제”
1988년 당시 제3대 정길수 총장이 학내사정으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동년 4월 25일 법인 이사회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자 1987년 6.29선언 이 후 사회 각계각층의 민주화 열풍영향으로 계명대학교에서는 전국 최초로 교수들의 직접선거에 의한 총장후보로 독어독문학과 평교수로 있던 신일희 박사를 법인 이사회에 추천하게 되었고 1988년 6월 2일 개최된 제 110회 법인 이사회에서는 신일희 박사를 계명대학교 제4대 총장으로 선임하였다.

이렇게 총장으로 다시 취임한 신일희 박사는 성서캠퍼스 조성에 전력을 추구하며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1992년에도 똑같은 “총장직선제”로 신일희 박사가 제5대 총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1996년 “총장직선제”의 폐해를 우려한 법인이사회는 학내외 원로 중진 인사들로 구성되는 총장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하여 동위원회가 추천하는 후보 가운데 법인 이사회가 총장을 선임하는 이른바 “총장 간선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총장간선제” 채택으로 교수협의회의 상당한 반발이 있었으나 사립학교 법에 따라 총장선임의 고유권한을 가진 법인 이사회의 굳은 의지에 따라 이 같은 총장선임방식은 현재까지 그대로 시행되어 오고 있다.

한편 법인 이사회는 1996년, 2000년 성서캠퍼스 조성완공이라는 큰 과제를 앞에 두고 재정적 어려운 환경과 강력한 리더십으로 당면한 난관을 헤쳐 나갈 제 6대, 제7대 총장으로 신일희 박사를 다시 연임시켰다.

12.5. 기적같이 이룩한 성서캠퍼스
성서캠퍼스 조성계획에 따라 1983년 2월 18일 맨 처음으로 준공된 자연관(현 백은관)에 1983년 3월 1일 이공대학이 이전한 것을 시작으로 1984년 3월 영암관에 인문대와 외국학 대학이 이전하고 1988년 8월 사회관이 준공되면서 사회대와 법대가 이전하고 1989년 노천강당과 학군단이 준공되고 1991년 3월 공학관에 공과대, 체육관 준공과 함께 체육대가 이전하고 1996년 대학본부가 성서로 이전을 하였다.

1997년 3월 가정대, 1998년 3월 대학원, 1999년 5월 아담스채플, 2001년 9월 국제관, 10월 오산관, 2004년 5월 행소박물관, 계명한학촌, 2008년 1월 계명아트센터(음악공연예술대, 해담콘서트홀)등 매년 성서캠퍼스에 한두 개 큰 건물 준공과 동시에 대명동캠퍼스의 단과대학들이 점차적으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2008년 8월 현재 대명동캠퍼스에는 미술대와 패션대학, 미디어아트대학과 정책개발대학원과 여성학대학원이 남아 있고 거의 모든 대학기구와 단과대학이 성서캠퍼스로 이전을 한 상태다.
현재 성서캠퍼스에는 크고 작은 건물 70여동에 약 연건축면적 8만㎡의 아름다운 시설들과 각종 수목에서 푸른 잔디까지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아름다운 캠퍼스가 조성되어 있다.

대명동캠퍼스도 아름답기로 이름이 나서 오래전부터 수십 편의 영화가 그 곳에서 촬영된 바 있고 55만평의 웅장한 성서캠퍼스도 독일 베를린의 Karl Schuke사가 디자인하고 제작한
한강 이남의 최대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된 아름다운 아담스채플, 우리 옛 조성들의 일상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재현한 계명한학촌, 가야고분 발굴 등의 많은 역사적 자료들이 소장돼 있는 행소박물관, 국가문화재 보물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수만 권의 한적이 소장돼 있는 동산도서관, 인조잔디가 깔끔하게 깔려 있는 대운동장, 최신설비로 대형 오페라, 뮤지컬 공연을 할 수 있는 2,000여석의 계명아트센터 외에도 대구의 상징 이팝나무, 철따라 꽃피고 열매 맺는 각종 수목들. 계명대를 방문하는 사람마도 이 같은 성서캠퍼스에 감탄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한국대학신문이 2001년 선정한 우리나라 10대 아름다운 캠퍼스의 하나가 계명대 성서캠퍼스인데 그 중에도 단연코 으뜸이리라.

12.6. 9대 총장 취임
2004년 7월 계명대학교 제7대 총장임기를 마친 신일희 박사는 서슴없이 대학운영의 일선에서 물러나 법인이사와 이사장으로 계명대의 발전을 지원하고 있었다.

한편 계명대는 2004년 5월 준공된 박물관을 신일희 박사의 아호를 따서 행소(行素) 박물관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2008년 5월 27일 계명대 법인 이사회는 제 240회 이사회에 즈음하여 계명대학교의 제 9대 총장으로 신일희 박사를 다시 선임했다.

지난 7월 7일 제9대 총장으로 취임한 신일희 박사는 계명대의 지난 50년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50년의 역사를 다시 계획하고 설계하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손인호(계명대신문사 제 20대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