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해 서산 너머 꿀꺼덕, 넘어가고황하는 바다 향해 꿈틀꿈틀 흘러가네. 천리의 그 끝까지 모조리 다 보고 싶어다시금 한 층 더 누각 높이 오른다네.白日依山盡(백일의산진) 黃河入海流(황하입해류)欲窮千里目(욕궁천리목) 更上一層樓(갱상일층루) *원제: [登鸛雀樓(등관작루)] *관작루: 산서성(山西省) 황하 가에 있었던 3층 누각. 이 누각에 관작, 즉 황새가 서식했으므로 이런 이름을 붙인 것임. *왕지환(王之渙: 688-742):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白日: 흰 해. 대낮. 지는 해.예로부터 중국의 정치가들은 자기나라 고전들을 직접 인용하여 자신의 뜻을 전달하곤 한다. 현재 중국의 주석인 시진핑도 국가 간의 외교활동에서 걸핏하면 고전을 들고 나온다. 그 바람에 다음과 같은 중국의 명구(名句)들이 국제적인 유명세를 탔다. ‘석 자나 되는 얼음은 하루만의 추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氷凍三尺 非一日之寒)’.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 ‘과거를 잊지 말고, 미래의 스승으로 삼자(前事不忘 後事之師)’. ‘이익을 따지려면 온 천하의 이익을 따지라(計利當計天下利)’. 시진핑은 명구뿐만 아니라 중국의 명시들도 심
호미 들고 들판 갈 때 술병도 꼭 챙겨가라호미질 열심히 했으니 술 마실 자격 있다한 해의 살림살이가 호미질에 달렸으니 호미질 하는 그 일을 어찌 게으르게 하랴 提鋤莫忘提酒鍾(제서막망제주종)提酒元是提鋤功(제주원시제서공)一年饑飽在提鋤(일년기포재제서)提鋤安敢 (제서안감용)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로 유명한 화가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의 친동생이다. 그는 유교의 나라 조선의 관인(官人)으로 살아가면서 중요한 관찬(官撰) 사업에 두루 참여했다. 하지만 같은 시대의 여느 관인들과는 달리 여러모로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근엄한, 아니면 최소한 근엄해야 마땅할 사대부였던 강희맹이 「촌담해이(村談解 )」라는 야담집을 저술한 것부터가 그렇다. ‘촌담’은 마을에 떠도는 이야기, ‘해이’는 턱이 빠지도록 껄껄 낄낄 웃는다는 뜻. 「촌담해이」는 마을에 떠도는 아주 노골적인 음담패설들을 모아놓은 책이니, 책장을 넘길 때마다 턱이 빠지도록 낄낄 웃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농촌 사회에 전승되어오는 민요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대부로서는 파격적이라면 파격적이다.위의 작품도 당시 농민들이 부르던 민요를
강변에 꽃이 덮여 걱정이 태산이니 꽃 소식 전할 데 없어 나 정말 미치겠네. 내달려가 남쪽 이웃 술꾼 친구 찾아가니술 마시러 나간 지가 열흘이 지났다네. 江上被花惱不徹(강상피화뇌불철) 無處告訴只顚狂(무처고소지전광) 走覓南隣愛酒伴(주멱남린애주반) 經旬出飮獨空床(경순출음독공상) * 원제 : [강가를 홀로 걸으며 꽃을 찾다: 江畔獨步尋花(강반독보심화)]“내 성격 좋은 시구 찾는데 미쳐/ 사람을 놀라게 할 시어를 못 찾으면, 죽어서도 찾는 걸 그만 두지 못하겠네(爲人性癖耽佳句위인성벽탐가구/ 語不驚人死不休어불경인사불휴).” 이백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712-770)의 시구다. 그는 이처럼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시적 표현을 찾기 위하여 목숨 걸고 처절하게 노력했다. 그래서 그런지 두보 시의 언어 속에는 귀신이 펄쩍펄쩍 살아 뛸 때가 더러 있는데, 이 시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경칩이 되면 봄이 왔나 하고,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가 세상 밖을 향하여 대가리를 내민다. 시인도 역시 기나긴 겨울잠을 자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기지개를 켜고 부스스 일어났던가 보다. 별 생각 없이 사립문을 밀고 강가로 나가 보았더니, 세상에, 정말 놀랍기도
봄바람 좋은 풍경 예로부터 큰 볼거리달 아래 거문고도 그 운치가 어떠하랴 술 마시면 근심 잊고 마음 확 트이는데그대는 어찌하여 책벌레만 되려 하오 春風佳景古來觀(춘풍가경고래관)月下彈琴亦一閑(월하탄금역일한) 酒又忘憂情浩浩(주우망우정호호)君何偏癖簡編間(군하편벽간편간) 예의와 법도가 펄펄 살아 뛰던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도 진정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오순도순 살았던 부부들이 있었다. {미암일기(眉巖日記)}의 저자로 유명한 미암 유희춘(柳希春: 1513-1577)과 그의 아내 송덕봉(宋德峰: 1521-1578)이 바로 그런 경우다. 그들은 서로 시를 지어 보여주기도 하고, 보여준 시에다 맞장구질 치는 화답시를 지으며 놀기도 했다. 한번은 유희춘이 [지락음(至樂吟)]이라는 한시를 지어 아내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작품을 번역하면 대강 이렇다. 꽃이 흐드러져도 꼭 볼 것 까진 없고음악이 좋다 해도 내게는 시들하네좋은 술 예쁜 여자 모두 다 흥미 없고진짜로 즐거운 것은 책 읽는 일 뿐이라네 이 시에 의하면 유희춘은 봄날의 몽환적인 꽃구경이나 아름다운 음악, 맛있는 술과 어여쁜 여자들에 대해서는 영 흥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는 인생의 지극한 즐거움이 오로지 책 읽는 데
이 시를 지은 남이(1441-1468) 장군은 담대한 무인 기질의 호쾌하기 짝이 없는 쾌남아였다. 그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이시애의 난과 여진족 토벌에서 큰 공을 세워 이름을 떨쳤다. 이러한 공과 세조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남이는 27세 때 공조판서, 28세 때는 오늘날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되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3일 뒤에 세조가 세상을 떠났고, 사이가 좋지 않던 예종이 즉위했다. 예종은 즉위하던 그날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번개같이 해임해버렸다. 남이의 급격한 부상을 몹시 시기하고 질투해 왔던 조정의 신하들이 ‘이 때다’하고 본격적으로 그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달포 뒤에는 간신 유자광에 의하여 역모 혐의가 씌워졌고, 그로부터 불과 3일 뒤에 저잣거리에서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처참하기 짝이 없는 죽음을 당했다. 위의 작품은 혜성처럼 찬란하게 등장했다가 별똥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던 비극적 풍운아 남이가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뒤 백두산에 올라가서 지었다는 시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모두 다 없애’버리다니, 그 시어의 스케일부터가 독자들의 입을 딱 벌리게 한다
집으로 돌아갈 꿈 10년 동안 안 꾼 채로 十年無夢得還家(십년무몽득환가) 푸른 산에 홀로 서서 물가를 바라보네 獨立靑峰野水涯(독립청봉야수애) 산 비 뚝, 그치고 나니 온 천지가 적막한데 天地寂寥山雨歇(천지적요산우헐) 몇 생애를 더 닦아야 매화가 될까 몰라 幾生修得到梅花(기생수득도매화)* 원래 제목 : 「무이산중(武夷山中)」사방득(1226-1289)은 옛날 우리나라 선비들이 『고문진보(古文眞寶)』 다음으로 많이 읽었던 『문장궤범(文章軌範)』이란 책을 편찬한 남송(南宋)의 저명 문인이다. 하지만 그는 원(元)나라의 침략으로 남송이 마지막 숨을 헐떡거릴 때, 끝의 끝까지 저항을 했던 만고의 충신으로 더욱 유명하다. 결국 나라가 멸망하자, 그는 무이산 속에 숨어살면서 망한 나라의 신하로서의 지조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원나라는 사방득이 숨어사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 번 불러도 나오지 않자, 마침내 강제로 서울로 끌고 가서 그의 마음을 바꾸어 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원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음식을 딱 끊어 굶어죽고 말았다. 경술국치를 맞아 24일 간의 단식 끝에 절명한 한말의 의병장 향산 이만도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인
내가 대학 2학년 때인 1975년 3월 어느 날, 대명동 캠퍼스의 어느 강의실에서 중재 스승을 처음 만났을 때, 정말 부끄럽게도 스승에게 드렸던 첫 번째 질문은 ‘어디서 무엇을 하시다가 우리 학교에 부임했느냐’는 것이었다. ‘상주농전(尙州農專)에 근무하다 왔다’는 스승의 대답을 들었을 때, 나는 크게 실망하였다. 진솔하게 말해서 오고 싶지 않았던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학교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던 그 당시의 나로서는, 새로 부임하신 스승이라도 내가 가고 싶었던 저명한 대학을 졸업하고 학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소장학자이기를 은근히 바라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첫 수업이 시작되자 실망은 희망으로 바뀌었고, 희망은 점차 환호작약의 가슴 벅찬 기쁨으로 바뀌었다. 스승께서 칠판 왼쪽에다 아름드리 한자(漢字) 한 자를 쓰셨을 때, 나는 칠판의 무게 중심이 왼쪽으로 확, 기울어지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에 칠판의 오른쪽에 똑같은 크기의 한자 한 자를 다시 쓰셨을 때, 칠판이 바야흐로 균형을 되찾는 기이한 풍경도 지켜보았다. 이윽고 스승께서 한문을 낭송하기 시작하시자 특유의 남저음 목청이 강의실에 장중하게 메아리쳤고, 전체적인 수업의 흐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
언젠가 산길을 걷다가 바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 그 자체로서 그를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길섶에 우뚝 선 나뭇잎이 살랑대거나 목이 긴 원추리가 흔들거리는 것을 통해 비로소 바람을 보았던 것이지요. 땀으로 젖은 내 살갗에 바람이 닿았을 때 이윽고 그가 바람이 되었듯이 사람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나 이외의 또 다른 사람이 있어야만 그제야 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겠지요. - 이지누의 금주야! 오늘 나는 이 아름다운 시를 모두 스무 번도 넘게 읽었다. 나에게 아침마다 뜻깊은 편지를 보내주는 분이 이른 아침 보낸 편지에 이 시가 실려 있어서 너댓 번을 되풀이해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 끄덕이곤 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오후에 도착한 너의 편지가 바로 이 시로 시작되더구나. 너댓 번에 너댓 번, 다시 너댓 번 이 시를 읽으면서 혹시 나에게 편지를 보내는 그 분이 너에게도 같은 편지를 보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아니라면 그 분께 연락하여 여기 마음씨가 고운 처녀가 있으니, 그 처녀에게도 편지를 보내주라고 말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날마다 같은 편지를 읽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정말로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