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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평론] 사이비 사형수의 진짜 사형이야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사형수는 턱없이 아름다웠고, 상처 많은 여주인공은 너무 쉽게 그 사형수를 사랑해 버렸다. 잔악한 사형수인 줄 알았던 윤수(강동원 분)는 알고 보니 상황 때문에 죄인이 된 가엾은 인생이었고, 남부러울 것 없는데도 자살 시도가 ‘취미’인 유정(이나영 분)에게는 영원히 열다섯 살을 맴돌게 하는 씻지 못할 상처가 있었다. 상처는 사형수와 여교수라는 현격한 사회적 신분차를 넘어 그 둘을 단단히 묶어 놓았다.

그러나 초반부터 두 사람이 ‘닮았다’고 강조한 것은 억지였다. 모든 것을 가졌으나 어느 하루의 상처가 나머지 삶을 망가뜨렸다는 유정의 관념적 불행과, 온갖 불행이란 불행은 죄다 모아놓은 불행의 전시장 같은 윤수의 삶이 어찌 ‘닮은 꼴’일 수 있으랴.

유정이 죽음까지 가져가고 싶어하는 비밀과 상처, 일본 만화영화 ‘반딧불의 묘’를 방불케 하는 슬픈 윤수 형제의 성장기와 애국가에 얽힌 비밀은 그러나 슬픈 동화일 뿐 현실성이 결여돼 있다. 심지어 살인 현장마저 절제된 영상미로 인해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들의 과거는 지독하게 비극적이지만 상투적이다. 두 사람이 마음을 열고 호감을 갖기까지의 감정 선은 미세한 떨림까지 놓치지 않았지만, 과거를 포함한 나머지 삶과 관계들은 그저 굵직굵직한 결과로만 남았을 뿐이다. 관객은 오직 그들의 현재, 목요일 10시부터 1시까지의 ‘행복한 시간’에만 감정이입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최대치의 눈물을 끌어내기 위해 감독은 잔인하게도 사형장의 집행 장면을 끝까지 상세히 보여준다. 윤수의 최후를 함께 목도한 관객들은 울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형제도의 모순과 문제점마저 윤수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묻혀버린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고 책임질 수 없는 그 사랑 고백처럼, 허망하고 허망한 눈물들만 극장을 채울 뿐이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다만 로맨스를 위해, ‘사이비 사형수’ 윤수를 죄도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교정 사목의 목적이 사형수로 하여금 마지막에 ‘살고 싶다’고 절규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면, 이 영화를 통해 사형수의 인권과 사형제도 폐지론을 펴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형수를 굳이 ‘천사’의 모습으로 죽게 만드는 우리 영화의 뻔한 결론 또한 결국은 감옥 밖 사람들을 안심시키려는 알량한 조치로 보인다.

우리 영화 속의 사형수들은 사제보다 승려보다 더 거룩한 얼굴로 평화로이 죽음을 맞을 의무에 시달린다. 지금처럼 극중의 사형수가 있는 그대로의 죄인이 아니고 대속(代贖)하는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한, 사형제 존폐에 대한 어떤 논의도 불가능하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그저 두 사람의 시한부 사랑을 위해 사형대라는 설정이 필요했던 멜로드라마였다. 관객은 만천하에 공개된 사법 살인의 목격자가 아닌, 영원한 사랑의 증인으로 불려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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