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전도사로 불리던 분이 얼마 전 충격적인 방법으로 동반자살을 했다. 남편대신 가장 노릇한 사생활을 유머러스하게 이야깃거리로 삼았던 터라 ‘동반여행’은 더 충격적이었다. 아마 그들의 실제 부부관계는 세상의 추측과 많이 달랐을 듯하다. 유쾌한 아마조네스처럼 보였던 아내는 실은 남편 없이는 못 살 사람이었다. 그분의 죽음은 중요한 깨달음을 남겼다. 『행복, 그거 얼마예요?』라는 책으로 행복의 아이콘이 된 그분은, 극심한 병마와 싸우면서도 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척 살아야 했다. 정작 자신의 속내는 털어놓을 곳이 없었을 게다. 스캇 펙 박사는 『아직도 가야할 길』3부작에서 ‘행복하라’는 것은 자본주의가 주는 강박이고 주술임을 지적한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그냥 살면 된다. 행복의 이미지로 각인된 것들은 사실 자본주의가 주입하는 상품소비자의 모습일 뿐이다. 거짓 이미지다. 한국인들은 유난히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개인적 사회적으로 그간 얼마나 불행을 겪었으면 이렇게 됐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결말만 행복하면 된다는 관행은 드라마 내용을 간단없는 패륜과 파행으로 치닫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가족관계를 주
SBS 드라마 <대물>은 현재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지켜보는 시청자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하다. 1, 2회 방영 때의 감동은 고사하고, 벌써부터 개연성이 없어졌다는 비판이 들린다. 이 드라마는 초기부터 내부진통이 심했다. 방영 4회만에 황은경 작가에서 유동윤 작가로 교체되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6회까지 드라마를 연출했던 오종록PD가 ‘대본작업’에 치중하려 현장을 떠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현재는 나중에 투입된 김철규 PD-유동윤 작가 체제로 가고 있지만, 이마저 26부까지 안착할 수 있는 체제인지 의구심이 든다. 유동윤 작가는 사실 온전한 <대물> 집필자로 보기도 어렵다. 초반 설정은 황은경 작가가 길을 닦아놓았고, 현재 대본은 공식적으로는 오종록 PD와의 공동작업이다. 시청자는 묻고 싶다. 드라마 <대물>의 진짜 조타수는 누구인가? 이 드라마에 ‘작가’는 있는가? 전체 틀을 짜고 스토리라인을 회당 분량으로 나눠 풀어낼 사람은 누구인가? 전체 배우들이 촬영을 거부할 정도의 파행적 진행은, 당장은 몰라도 작품에 큰 후유증을 남길 게 분명하다. 만일 이 드라마가 시청률 면에서 성공한다면,
표절은 한 마디로 남의 창작물을 훔치는 행위이다. 그럼에도 자주 논란이 되는 건 누구나 유혹에 시달린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산다는 건 곧 도둑질 (Life is robbery)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 생명은 자연의 에너지를,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도둑질 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어쩌면 생각하고 표현하는 그 모든 행위 또한 다른 이들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대한 모방이나 반추일 수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명제는 태고로부터 유효하다. 그럼에도 서구에서는 표절을 범죄로 엄격히 단죄한다. 개인의 양심에만 맡기기엔 공동체에 끼치는 해악이 치명적이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비슷해진 것도 표절 판정을 받는다. 보고 들었을 법한 경로가 추정되면 혐의를 피할 수 없다. 그 유명한 헬렌 켈러도 젊은 시절 이런 판정을 받은 적 있다. 어쨌든 사회적 단죄가 엄격하면 개개인이 늘 조심하고 경계하는 풍토가 자리잡을 수 있다. 적어도 대놓고 베끼는 일은 시도할 수 없다. 최근 한국방송작가협회가 <구미호-여우누이뎐> 1회에 대해 표절판정을 내리고 작가를 1년간 자격정지시켰다. 이 작품은 KBS 드라마공모 당선작으로 고전의 재해석과 현
최근 이혼을 전면에 다룬 SBS 드라마 두 편이 있다. <나는 전설이다>와 <이웃집 웬수>다. 종영한 <나는 전설이다>는 이혼소송이 중심이었다. 거대 로펌 대표로 이혼전문변호사인 남편 차지욱(김승수 분)을 상대로 나홀로 소송을 하는 전설희(김정은 분)의 이혼 사유는 감정학대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던 소송은 남편의 외도와 악행의 증거들이 속속 나오면서 아내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중요한 판례가 될 이 소송은 전설희가 “내가 원한 건 미안하다는 한마디였다”며 상대방의 죄의식만 건드리고 취하함으로써 공염불이 된다. 드라마는 이들 부부의 불화를 뱃속 아이를 잃은 슬픔 때문이라고 하며, 배우자를 학대한 지욱에게도 면죄부를 준다. 초반에는 전설희가 이혼소송을 통쾌하게 마무리하고, ‘컴백 마돈나 밴드’를 멋지게 이어갈 것 같았다. 그러나 소송은 취하하고 밴드는 한때의 추억으로 남고 만다. 빈털터리지만 씩씩하고 ‘쿨한’ 이혼녀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드라마로 너무 당연한 권리인 재산분할 청구에 대해 자칫 시청자에게 거부감만 줄 공산이 크다. 주말극 <이웃집 웬수>는 이혼한 부부가 ‘우연히’ 옆집에 살게 된다는 설정
숙종과 그 아내들이야말로 조선왕조에서 가장 유명한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장희빈과의 운명적 사랑과 극단적인 ‘부부싸움’은 물론, 사랑했던 여인에게 손수 사약을 내린 비정함까지 참으로 극적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장희빈-최숙빈에 대한 이야기는 수차례 장편 드라마로 만들어진 바 있다. 그런데 이번 MBC의 <동이>는 몹시 낯설다. 숙종이 조금도 희빈 장씨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희빈(이소연 분)을 만나기 훨씬 전에 궐 밖에서 동이(한효주 분)를 만났고 둘은 소울메이트였다는 게 드라마 <동이>의 설정이다. 숙종이 마음을 준 여자는 동이뿐이다. 장희빈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숙종을 다룬 드라마에서 이처럼 장희빈을 무용지물로 만든 사례는 없었다. 극중 장희빈은 사랑받지 못하여 악마로 변해간다. 그런데 그 ‘사랑’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장희빈은 낙동강 오리알이었다가 제거 대상이 된다. 숙종의 유일한 사랑인 동이는 따라서 내명부 유일의 ‘조강지처’인 셈이다. 다른 모든 여인들은 파편화? 대상화를 면할 수 없다. 오직 동이만이 선(善)이고 참이다. 동이 측 사람들만이 선한 의지로 역사의 중심이 된다. 동이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은 들러리인데,
마이클 센델의 책『정의란 무엇인가』가 신드롬을 일으키며 화제가 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정의에 목말라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겠다. ‘정의’가 사라진 듯이 보이는 건 드라마 속 세상도 마찬가지다. 현재 인기인 KBS <제빵왕 김탁구>와 SBS <자이언트>만 봐도 남을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내가 죽는 살벌한 경쟁뿐이다. 문제는 이 비극이 전부 악녀들 때문에 비롯됐다는 설정이다. 주인공들의 엄마이거나 혹은 엄마의 경쟁자들이 자식세대까지 불행하게 만든다. <제빵왕 김탁구>의 서인숙(전인화 분)은 악의 화신 그 자체다. 그러나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 가부장제는 털끝만치도 손상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몰랐다”는 알리바이 하나로 무조건 결백하다. 죄는 전부 아버지의 조강지처가 뒤집어쓴다. 서인숙은 악녀의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불륜을 넘어 남편의 심복인 한승재(정성모 분)와 아이까지 낳은 사이다. 동정의 여지가 없다. 구일중(전광렬 분)에게 탁구는 진짜 아들이고 구마준은 수치다. 아버지의 피와 재능을 물려받은 탁구는 빵 만드는 실력도 탁월하더니 경영능력도 타고 났다. 부계의 피만 인정하는 <제빵왕 김탁구>의 구도에
강물이 묻는다. 너는 다 견뎌낼 수 있느냐고, 얼마나 더 견딜 수 있겠냐고. 미자(윤정희 분)는 아무 답도 내지 못한다. 다만 눈물처럼 핏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詩를 찾아 절박하게 헤맨다. 그럼에도 시는 좀체 써지지 않는다. 삶은 막다른 골목까지 왔다. 자존심은 물론 쓸개까지 다 버렸다. 그런데 휘청대는 마음은 주책없이 점점 꽃들의 화려함 같은 예쁜 것에만 홀린다. 소도시와 농촌마을을 누비는 미자의 흰 모자와 하늘하늘한 꽃무늬 옷들은 너무 곱고 화사해 두드러지게 비현실적이다. 삶은 비루하고 오직 詩만이 아름답다. 그러나 비극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급물살을 탄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유일한 음악은 강물소리뿐이다. 모든 울음을 속으로 삼키며 감내한 예순여섯의 양미자와 닮았다. 미자의 인생에 오직 하나의 아름다운 것인 만가(輓歌) ‘아녜스의 노래’는 피로 쓴 시다. 시와 몸을 바꾸는 순간 아녜스의 슬픔은 곧 미자의 것이 된다.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배우 윤정희는 온몸으로 보여준다. 시는 곧 삶이다. 그토록 시를 쓰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삶을 진짜로 잘 살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묻는다. 당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는 지독한 성장통을 다룬다. 그 성장은 사느냐 죽느냐를 가를 정도로 절박한 것이다. 따라서 타협의 여지는 없다.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는 없으므로 죽도록 열심히 견뎌내야 한다. 중요한 점은 이 ‘성장’에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는 점이다. 성장은 자식세대나 부모세대나 모두 평생에 걸쳐 이루어야 할 과업이다. 이 드라마에서 나이에 비해 가장 자라지 못한 ‘아이’는 은조엄마 강숙(이미숙)이다. 강숙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상태에서 제멋대로 자란 들개 같은 상태였다. 한 번도 ‘지붕’ 있는 집에서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살았던 강숙은, 대성(김갑수)을 만나 처음으로 자신을 어떤 역할 속에 밀어넣는다. 처음에는 효선(서우)의 엄마 노릇이 ‘가면놀이’에 불과한 거짓이었으나, 차츰 연기와 실제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은조(문근영)는 처음부터 애어른이었다. 대성참도가에 처음 발을 들여놓던 순간부터 이 집과 사람들에게 홀딱 반했지만 필사적으로 부정한다. 그것에 마음을 주는 순간 엄마처럼 타락하거나 엄마처럼 버림받을까봐서이다. 효선은 아버지의 죽음 후 비로소 턱없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봄이 오기가 서해에 침몰한 천안함 함미와 함수 인양 작업마냥 더디고 힘들다. 사람들이 너무 슬퍼하면 오던 계절도 되돌리는 것인가. 끔찍한 일이었다. 두 동강 난 천안함이 실종 수병들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아 있는 동안 우리 사회는 그대로 장례식장이 되었다. 정부는 작년부터 이어진 줄초상들에 제대로 변변히 애도하지 못했던지라 과연 이번에도 사태 추이는 아수라장이었다. 엉뚱한 ‘설’들만 난무하고 수많은 음모론이 하늘과 바다와 심지어 ‘땅굴’까지 뒤덮었다. 사건 당일 속보들은 그 ‘배’가 점점 뻥튀기 됐다가 줄었다가 세상에 없는 신화 속의 배가 돼가는 과정에 다름없었다. 사태 수습은 국민의 염원과도 거리가 멀었다. 군은 배에 탔던 사람들을 구조하는 일에 서툴렀다. 생존자를 구한 것은 해경과 민간 어선이었다. 해군은 심지어 실종 장병들을 못 구한 것인가, 안 구한 것인가 하는 의혹마저 낳게 했다. 분단 상황과 관련된 추측들이 초기부터 날개를 달았고, 분단국가의 비상사태는 사람이 최우선이 아님을 깨닫게 했다. ‘69시간 생존론’은 또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었나. 천안함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최첨단 장비는커녕 노후화가 심했다. 침몰 직후 즉사
KBS 드라마 <부자의 탄생>은 제목부터 기대와 반감을 반반 씩 갖게 한다. 열심히 보고 있으면 무슨 부자되는 비법이라도 알려 줄 것 같다. 초반 시청률은 좋지 않았다. 내용도 첫 회부터 식상하고 엉성하다고 비판받았다. PPL(간접광고)이 심해서 때로는 수많은 광고들을 한꺼번에 본 기분도 들고, 엉성한 구성을 코믹 배우들의 개인기로 땜질한다는 인상도 풍겼다. 그런데 굉장히 뻔한 줄 알았던 드라마가 의외로 솔솔 재미를 풍긴다. 극도로 단순화된 구조나 캐릭터 설정은 중간부터 봐도 이해가 되기에 후반에 시청률을 올리는 성과도 거두었다. 재벌들이 매우 허술하고 엉뚱하고 속 들여다보이는 빤한 인물들로 그려져 위화감을 주지 않으며, 재벌 아버지의 버려졌던 아들 최석봉(지현우)은 그냥 자체 발광 캐릭터다. 시청자는 석봉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의 신출귀몰한 재주와 매력적인 연애의 재주까지 즐기게 된다. 석봉의 부자 아버지 찾기라는 기둥 줄거리는 꽤 호기심을 자극한다. 패밀리 스토리의 판타지를 극대화시켰다. 지금은 고생스럽지만 언젠간 부자인 진짜 부모가 나타날 거라는 환상은 아더왕 이야기에서부터 <부자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염원이다. 이 강력한
사랑은 어떻게 지키는 것인가? 야생 호랑이처럼 길들여짐을 거부했던 드라마 <추노>가 그 치열한 여정을 끝냈다. 길에서 만나고 길에서 사랑하다 결국 길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 <추노>는 길거리 사극이었다. 밥도 잠도 저잣거리의 주막에서 해결했다. 주막에서 때우는 밥이 달걀 파묻은 특별식이 되려면 하다못해 작은 주모의 마음이라도 얻어야 했다. 집이 있고 밥이 절로 해결되는 이들은 양반뿐이었다. 양반의 밥은 노비들의 시린 손발과 매운 눈물 없이 마련되지 않았고, 이를 당연히 여긴 대가는 분노한 총구의 과녁이 되는 것이었다. 대길(장혁) 또한 ‘의형제’ 최장군과 왕손이에게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도망노비들의 삶을 박살냈는지 모른다. 시청자는 누구보다 대길의 생존을 바랐겠지만, 손에 피를 묻혀가며 ‘집’을 마련한 대길은 살아남기 어려운 캐릭터였다. <추노>는 야생 호랑이들의 격전지였다. 강하고 외롭고 쓸쓸한 호랑이 같은 사내들은 결국 베고 더 벨 게 없을 때까지 칼부림을 멈추지 못한다. 쫓는 자도 쫓기는 자도 멈추지 못할 수레바퀴다. 그 길의 끝에는 고독한 실존이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살인귀가 된 황철웅(이종혁)은 안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