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을 뽑습니다./ 휘어진 못을 뽑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못을 뽑습니다./ 못이 뽑혀져 나온 자리는/ 여간 흉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성당에서/ 아내와 함께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 못 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 아내는 못 본 체 하였습니다./ 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뽑아내지 못한 못 하나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숨겨둔 못대가리 하나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 김종철의 「고백성사」 아침 식탁 위에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쌀밥 한 그릇이 놓여 있습니다. 오늘은 정말 그 밥을 보기가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밥도 아마 잠시 후에 나 같은 놈의 입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자기 자신의 운명 앞에서 슬프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해서 속으로 흑흑 흐느껴 울고 있을 테지요. 저의 가슴에는 오래도록 남모르게 숨겨둔 여러 개의 대못이 있었습니다. 수시로 삐쭉이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을 윤리와 도덕이란 이름의 장도리로 탕탕 박아둔 대못들이지요. 어제 저녁 술김에 저는 그 대못들을, 그렇지 않아도 빠질까 말까를 망설이면서 흔들리고 있던 대못들을 못빼기로 죄다 뽑아 형의 가슴에다 탕탕 박았습니다. 상처가 날 줄 알면서도 박은 대못이기에, 들어갈
여보게 자네. 내가 살펴보건대 요즈음 자네의 하루하루는 고한조(苦寒鳥)라는 상상 속의 새와 꼭 같구나. 밤이 오면 둥지가 없어 온몸을 파들파들 떨고 지새우면서, 내일 낮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둥지를 짓겠다고 굳게굳게 다짐하는 새. 그러나 낮이 되어 날이 따스해지면, 지난 밤 추위에 오들오들 떨던 일을 아주 까맣게 잊어버리고 모든 정열을 노는 일에 쏟다가, 밤이 오면 다시 파들파들 떨면서 내일에는 반드시 둥지를 짓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새.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둥지를 가져보지 못하고 안타까운 생애를 마감하는 고한조라는 불쌍한 새와 꼭 같구나, 요즈음 자네의 하루하루는.... 뭐라고? 전과(轉科)를 하겠다고?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 물론 재빨리 전과를 해야 되겠지. 그러나 전과를 한다는 것은 자네의 생애를 확, 바꾸는 것을 뜻하는 것이므로 신중히 생각해서 결정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남의 밥에 있는 콩이 훨씬 더 굵게 보이는 심리현상의 소산이 아닌지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혹시 그럴지도 모르므로 내 나이가 자네와 비슷하던 젊은 날에 어디선가 읽었던 옛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고 싶구나. 모쪼록 최종적인 결정에 참고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1> 어제 몇몇 친구들과 함께 10년 전에 돌아가신 선생님의 산소에 11번째로 참배를 했습니다. 돌아오다가 팔공산 뒤에 꽁꽁 숨어있는 어느 아름다운 산골에 들렀는데, 산에 들판에 꽃이 하도나 곱게 피었기에 십년 전에 지은 시를 거듭 읊으면서 삼년 만에 대취(大醉)를 했습니다. 이 봄에 가신 님께 여쭈옵노니/ 당신이 가시고도 봄이 옵니까/ 아니면 가셨기에 봄이 옵니까/ 눈부시게 푸르런 산과 들판에/ 들꽃은 또 속절없이 곱기만 한데/ 당신이 가시고도 그러합니까/ 아니면 가셨기에 그러합니까.// 이 봄에 가신 님께 여쭈옵노니/ 당신이 가셨기에 그러하다면/ 당신이 봄이 되는 것이겠지요/ 눈부시게 푸르런 산과 들판에/ 들꽃은 또 야속케도 곱기만 한데/ 당신이 가시고도 그러하다면/ 슬픔이 봄이 되는 것이겠지요. 취하고 읊을 때는 정말 좋았으나, 취하고 난 다음 날은 숟가락도 까딱, 하기가 싫어서 밥도 못 먹고 오월 하늘만 망연자실(茫然自失) 쳐다보고 있는데, 바로 그 시퍼런 하늘 속에서 쯧, 쯧,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 선생님이 굽어보고 계시다가 한심해서 혀 차는 소리입니다. <2> 99년 봄에 자네를 처음 만나 물었을 때,
일 없는 그 일 말고는 다시는 더 일 없는 날 “아무리 살아봤자 나는 20년을 더 살 수 없고, 아무리 살아봤자 이 선생도 또한 50년 이상을 더 살 수는 없을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이 그리도 바쁘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봄날이 다 가도록 놀러도 한번 오지 않느냐? 이런 속도로 만나다가는 앞으로 열 번인들 더 만나겠느냐?” 구름 형! 며칠 전 저는 이런 내용의 전화를 받고 가슴이 꿈틀, 북받쳐서 북쪽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촉급한 논문 때문에, 세계와 인간에게 이렇다할 도움이 되지도 않는 각종 세미나와 소모적인 행사 때문에, 재우쳐 달려가지 못하고 있는 터에, 이번에는 격진령(隔塵嶺) 너머 눌운재(訥雲齋)로부터 구름 형의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봄날도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 호연정(浩然亭) 대청마루를 자질하면서 건너가는 날엔, 배낭 속에 떡밥 한 덩이 넣은 뒤에 낚싯대 하나 메고 어은동(魚隱洞) 뒷산으로 올라가서 붕어 낚시라도 한다면 아마도 저물녘엔 일찍 뜬 초승달이라도 하나 걸려들 것 같습니다....” 구름 형과 함께 낚싯대를 들고 어은동 뒷산으로 올라가서 각시붕어 대신에 일찍 뜬 초승달을
언젠가 산길을 걷다가/ 바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 그 자체로서 그를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길섶에 우뚝 선 나뭇잎이 살랑대거나/ 목이 긴 원추리가 흔들거리는 것을 통해 비로소 바람을/ 보았던 것이지요. 땀으로 젖은 내 살갗에 바람이/ 닿았을 때 이윽고 그가 바람이 되었듯이/ 사람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나 이외의 또 다른/ 사람이 있어야만 그제야 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겠지요. - 이지누의 「바람을 보았지요」 정아! 어제 나는 이 아름다운 시를 모두 스무 번도 넘게 읽었다. 날마다 나에게 사연 깊은 편지를 보내오는 어느 분이 어제 아침 보낸 편지에 이 시가 실려 있어 서너 번에다, 다시 네댓 번 되풀이해 읽으며, 그래, 맞아, 그렇고 말고, 하며 고개를 끄덕, 끄덕이곤 했다. 편지를 덮고 나자, 아아 정말로 반가워라! 바로 그 사이에 너의 편지가 배달되어 있어 화들짝, 봉투를 뜯어보았더니, 세상에 어찌 이럴 수가, 너의 편지가 바로 이 시로 시작되더구나.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네댓 번에 네댓 번을 다시 네댓 번 더 읽으면서 정말로 기분이 좋았단다. 정아! 작년 12월 졸업을 앞두고 자네가 보낸 편지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 편지를 읽으면서
적어도 나에게 남해도는 거제도나 강화도와는 크게 구별되는 각별한 섬이지. 왜 그러냐고? 그것이 도대체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 몰라도 공부라는 것을 하기 위하여 내가 고향 떠나 이리저리 떠돌다가, 역시 바로 그 공부라는 것을 하기 위하여 환상적인 섬 남해도를 떠나왔던 한 사내를 만났기 때문이지. 솟구치는 젊음을 돌로 눌러 죽이며 ‘no more than’과 ‘not more than’, ‘no less than’과 ‘not less than’의 그 미묘하고도 심각한 차이를 함께 외우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설사 자네를 버려두고 혼자서 훌쩍 찾아간다 하더라도 내가 남해도에 가는 것은 자네의 고향으로 달려가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자네도 모르게 자네의 고향엘 다녀왔었네. 심지어는 신혼여행 때도 변변한 여인숙조차 하나도 없었던 남해도로 달려가 집채같이 불어오는 바람, 길길이 날뛰는 파도 앞에서 아무런 대책 없이 오래도록 오들오들 떨었다네. 오들, 오들, 오들오들, 오들오들오들오들, 오들오들 떨다가, 남해 금산 앞 상주 해수욕장에 단 하나 있던 구멍가게 아저씨께 특별히 부탁하여 라면을 끓여 먹고 돌아왔다네. 오오, 그리하여
1. 마시던 차 다 떨어져서 옆방에 가서 마시고 오던 날, 바로 그날에 자네가 부쳐온 우전(雨前)이란 차의 향기를 마신다. 차는 우리나라 지리산 야생차, 그 가운데서도 곡우(穀雨) 전에 갓 돋은 참새 혓바닥 같이 연하디 연한 잎새들을 따 모은 우전의 향기를 마실 때마다, 나는 자네에게 조금 미안하고 세상에 대해서도 다소 쑥스럽다. 내 비록 차를 좋아 하긴 하지만, 그리고 우전이 세상에서 제일로 맛있는 차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만, 나는 아직도 우전을 마실 가정 형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야 비로소 교단에 섰으므로, 형편으로 말하자면 자네가 나보다도 훨씬 더 못할 터! 그런 자네가 보낸 차를, 곡우가 되려면 아직도 많은 날이 남아 있는 시점에서, 나 혼자 이렇게 홀짝홀짝 마시게 되다니, 향기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또한 어찌 미안하고 쑥스럽지 않겠느냐. 2. 지난 토요일, 갑자기 휴대폰이 지리리리 울리더니, 금방 찬물에 세수를 한 것 같은 자네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더라.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시골에 내려와서 정구지 지짐을 굽고 있어요. 내일이 할아버지 생신이거든요. 그런데 선생님, 뜨거운 철판 위에 드러누워 있는 보름달 같은 지짐 넙디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