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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상화계 거장 ‘극재 정점식 화백’의 예술혼을 엿보다

부덕을 위한 비, 카리아티드 등 대표작에 드러난 끝없는 자기 쇄신

 
 
인생에는 ‘터닝 포인트’가 있다. 스승의 말 한마디가 잠재력을 깨우는 빛이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극재(克哉) 정점식(1917~2009) 선생(이하 ‘극재’로 약칭)에게도 그런 스승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해방 무렵에 만난 쓰다 세이슈(律田正周, 1907~1955)가 바로 ‘삶을 바꾼 스승’이었다. 쓰다는 일본 문화학원의 교수로 우리나라 유학생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이중섭, 유영국, 송혜수 등이 그의 문하생이었다. 1941년 일본의 억압을 피해 간 하얼빈에서 쓰다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극재는 쓰다와 3개월간 함께 생활한다. 그때 극재의 스케치북을 몰래본 쓰다는, “극재는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고 있다.”며, “어쩌면 스페인적인 풍토나 문화적 배경 밑에서 나올 법한 그림”이라는 칭찬을 한다. 그것은 하얼빈의 이국적인 풍경을 그린 드로잉을 보고 한 말이었고, 그 드로잉에는 남들이 주목하지 않은 건물의 낡은 모습이나 흠집 등이 묘사되어 있었다. 쓰다는 극재가 무의식적으로 묘사한 요소들의 미적인 효과를 지적한 것이다. 이로써 극재는 자신의 그림에 나타난 자잘한 요소들을 인식하게 되고, 대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이런 지적과 더불어 쓰다와 나눈 당시 미술계의 동향과 예술이야기 등은 극재가 한사람의 작가로 성장하는데 든든한 밑거름이 된다. 
 
극재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6세 때 대구 약전골목에서 고모부가 운영하던 한의원에서 한문과 서예를 배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성학원 문과를 수학한 뒤,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에 입학한다. 1941년 졸업과 동시에 만주 하얼빈으로 가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광복을 맞은 그 이듬해인 1946년에 귀국하지만 기쁨도 잠시, 1950년 6·25전쟁으로 다시 암울한 시대를 맞이했다. 1953년 제1회 개인전을 개최하고, 1955년 대구미술가협회를 발족하며 추상화가로 입지를 다졌다. 1964년에는 계명대학교 미술대학을 창설하여, 1983년까지 교육에 전념한다. 그리고 2001년까지 명예교수로 후학들을 지도하고, 평생 대구화단을 지키며 추상미술의 번창에 혼신을 다했다. 
 
평론가 오광수는 “화가 정점식은 대구 출신의 많은 예술가들이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몰려온 후에도 그는 홀로 남아 지방 화단을 다시 세우고 이끌어 왔다.”며, 서울이 아닌 대구지역을 또 다른 미술의 중심으로 만든 극재의 활동에 박수를 보냈다. 
 
극재는 평론가이기도 했다. 비평의 불모지였던 대구화단에서 적극적으로 미술에 관한 글을 썼다. 동료 화가들이나 제자들의 전시회에 글을 써주며, 같은 작가로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자신이 쓰다의 말에 용기를 얻었듯이, 극재 또한 공감하는 마음으로 응원의 평을 더했다. 대구의 현대미술이 1970년대의 역동적인 추상미술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극재의 비평 기능이 큰 역할을 하였다. 
 
극재는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엄격했다. 실기 수업을 할 때는 학생들에게 모험 걸기를 주문했다. “자기 작품에 자신이 놀라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감동을 줄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의도를 초월하려는 모험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 모험이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고 도약을 위한 계기를 만드는 행위이며, 스스로 능력의 한계를 넘어 끊임없는 집념의 도전이 있어야 한다”며, 그것이 학생의 특권이라고 가르쳤다. 바로 ‘파괴에서 얻은 가산(加算)’의 덕목을 가르친 것이다. 
 
이는 극재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도 증명한 것이자 교육현장에서 실천한 것이기도 하다. 극재의 작업은 매순간이 ‘자기의 틀을 깨고 자기를 쇄신하는 과정’이었고, 작품은 바로 ‘파괴에서 얻은 가산’의 결정체였다. 그는 끊임없이 캔버스 위에서 모험을 걸며 작품을 했다.
 
‘부덕을 위한 비’(1968)는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있는 형상을 추상화한 작품이다. 단순한 두 사람의 형상이 아니다. 두 사람의 형상을 통해 그 이상의 비가시적인 세계를 창출한다. 마치 사각형의 화강암을 층층이 쌓은 것만 같은데, 거친 마티에르가 작품의 의미를 깊이 우려낸다. 사각의 덩어리는 일그러지고 무거운 느낌을 주지만 그 내면은 체온을 나누는 희망의 열기로 뜨겁다. 

 

극재는 자신이 체험한 아픈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외면하지 않되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카리아티드’(1971)는 6.25전쟁의 고통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은 카리아 지역에서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에서 남자들의 패배로 끝나자 그 고통을 카리아의 여인들이 감내해야 했던 일화를 토대로 하고 있다. 비록 소재는 이국에서 취했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비춰준다. 극재는 여인의 고통에 주목하며, 한동안 지속적으로 ‘카리아티드’ 작품을 제작하였다. 마치 석판으로 찍어낸 듯한, 이 작품은 극재의 작품에 흐르는 모뉴멘탈한 의도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PIFF) 공식 포스터의 이미지로 사용되었던 ‘밤의 노래’(1991)는 극재가 추구한 서체적인 충동이 가장 자유롭게 드러난 작품이다. 모필의 거친 느낌이 화폭에 돌풍을 일으킨다. 언뜻 붉은 색이 빠르게 점처럼 이어진다. 격렬한 운필과 크고 작은 색의 향연은 극재의 예술세계를 웅변하듯이 보여준다. 1990년대 이후 작품들은 필선이 조형하는 구성이 두드러지고, 화폭을 유영하는 거침없는 정신의 자유가 느껴진다. ‘캘리그래피’(1993)는 극재의 내면에 잠재해 있던 서체충동이 유감없이 표출된 작품이다. 어릴 때 배운 서예의 자유로운 필치가 자연스럽게 ‘서체적 운필’로 나타난 것으로, 후반기의 작품 스타일을 대변한다. 
 
 
극재는 한 개인전에서 “내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남들이 모르는 그림을 그린다는 말들을 수없이 들으면서 평생을 살아왔다. 예술은 다른 경지에서 영위되는 세계이기에 비실용적인 것의 필요성과 종교나 예술이 우리들의 생활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평생 ‘남들이 모르는 그림’, 즉 자신의 추상화에 대한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피력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틀을 깨지 않고는 자기를 쇄신할 수 없다.”는 신념을 실천하며 위대한 스승이자 작가로 큰 빛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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