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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IT산업의 상징은 누구인가?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facebook의 마크 주커버그 등이 ‘포스트 잡스 시대’ 주인공이란 전망도


“그는 밥 딜런 같은 인물이었다.”
인기 록밴드 U2의 보노는 스티브 잡스 사망 직후 <롤링 스톤>이란 잡지와 인터뷰에서 스티브 잡스를 밥 딜런에 비유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밥 딜런은 1960년대 미국 저항 정신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놨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밥 딜런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경지를 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보노의 이런 평가는 스티브 잡스의 삶을 한 마디로 잘 요약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 10월 5일(미국 현지 시간) 56세를 일기로 사망한 스티브 잡스의 삶을 이야기할 때 ‘혁신’이란 단어를 빼놓을 순 없다. 밥 딜런이 미국 대중음악계 뿐 아니라 그 시대 많은 사람들의 삶에 짙은 흔적을 남긴 것처럼 스티브 잡스 역시 20세기 세계인의 삶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1975년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애플컴퓨터를 창업한 스티브 잡스가 처음 혁신의 바람을 몰고 온 것은 1984년이었다.

그 해 1월 말 잡스는 매킨토시란 컴퓨터를 내놨다. 매킨토시 이전까지만 해도 컴퓨터를 이용할 땐 복잡한 명령어를 입력해야만 했다. 하지만 매킨토시를 계기로 요즘 우리가 익숙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방식이 대세로 자리 잡게 됐다. 지금도 대부분의 PC에 갈려 있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가 처음 나왔을 때 매킨토시를 표절했다는 혐의를 받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의 젊은 시절은 순탄한 편은 못 됐다. 매킨토시를 내놓은 이듬해인 1985년 애플에서 쫓겨난 것. 독불장군식 밀어붙이기로 원성을 산데다 지나치게 고급 전략을 고수하면서 대중의 정서를 읽는 데 실패한 것 때문이었다.

그는 1997년 다시 애플 최고경영자(CEO)로 복귀할 때까지 12년 동안 시련의 시간을 보냈다. 그 기간 동안 픽사란 애니메이션 회사를 운영하면서 ‘토이스토리’ ‘벅스 라이프’ 같은 히트작들을 내놓긴 했지만, 적어도 IT 시장에선 잡스의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1997년 애플 CEO로 복귀한 잡스의 이후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복귀 첫 작품으로 내놓은 아이맥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디자인으로 컴퓨터에 대한 통념을 깨뜨렸다.

하지만 잡스의 진짜 혁신은 2001년부터 시작됐다. 혁신의 대상은 엉뚱하게도 디지털 음악이었다. 당시 디지털 음악 시장은 ‘불법 복제의 온상’이었다. 파일 공유 사이트인 냅스터 때문이었다. 그 시장에서 돈을 버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대체적인 인식이었다.

잡스는 그런 상식에 도전했다. CD음악을 간단하게 MP3 파일로 변환해주는 아이튠스를 선보인 데 이어 2001년엔 아이팟이란 MP3 플레이어를 내놨다. 애플은 다른 회사와 달라 소프트웨어(아이튠스)를 먼저 내놓은 뒤 하드웨어(아이팟)를 출시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 전략은 이후 아이폰, 아이패드를 아우르는 애플 생태계의 밑거름이 됐다.

아이팟과 아이튠스는 합법적인 디지털 음악 시장을 만들어내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1년 만에 누적 판매량 1억 곡을 돌파한 아이튠스는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판매량을 늘려나갔다. 지난 6월 현재 아이튠스 누적 판매량은 150억 곡을 넘어섰다. 잡스의 혁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7년 6월 아이폰을 선보인 것이다. 아이폰은 깔끔하고 단순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제품이었다.

하지만 디자인 못지않게 중요한 건 생태계였다. 앱스토어를 통해 각종 앱들을 거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시장의 무게 중심을 통신사에서 이용자들 쪽으로 옮겨 놨다. 시장 점유율을 살펴보면 이런 변화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스마트폰 시장에 첫 발을 내디딘 애플은 2007년말 미국 시장 점유율을 14.8%까지 끌어 올렸다. 이 수치는 3년 뒤인 지난 해 말엔 25.1%로 껑충 뛰어오른다. 지난 해 선보인 아이패드 역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제품이다. 아이폰을 통해 위력이 입증된 앱스토어 생태계를 등에 업은 아이패드는 출시되자마자 유명무실했던 태블릿 시장을 살려냈다. 덕분에 태블릿 출하량은 내년엔 1억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16년이면 태블릿 판매량이 PC를 넘어설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덕분에 잡스는 “PC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포스트PC 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잡스가 얼마나 대단한 경영자인지는 수치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잡스가 복귀하던 1997년 6월 분기에 애플은 5천600만 달러 손실을 기록했다. 하지만 최근 분기인 지난 6월엔 73억 달러의 분기 순익을 기록했다. 순익 규모가 복귀 당시 분기 매출(17억3천만 달러)의 4배에 이른다. 5달러 수준에 머물렀던 주가는 370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덕분에 애플은 엑손 모빌을 제치고 세계 시가총액 1위에 등극하기도 했다. 하지만 잡스가 IT 시장에 던진 메시지는 숫자보다 훨씬 더 크다.

그는 늘 기존 상식에 도전했고, 그 도전에 성공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냈다. 스티브 잡스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애플=잡스’란 등식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세계 최고 기업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애플의 위세가 계속될 수 있을 지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해 전문가들은 1, 2년 내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현재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아이폰, 아이패드 같은 제품 판매는 여전히 강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조만간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애플TV 역시 기대되는 제품 중 하나다.

게다가 열성적인 팬들로 넘쳐나는 애플 생태계 역시 탄탄하다. 잡스가 향후 4년간의 제품 로드맵을 만들어놨다는 소식 역시 애플에겐 큰 힘이다. 하지만 혁신 이미지를 계속 간직할 수 있을 것이냐는 쪽으로 눈을 돌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잡스의 뒤를 이은 팀 쿡이 ‘드림팀’으로 불리는 애플 경영진의 능력을 극대화하면서 혁신을 주도할 수 있을 지에도 의문부호가 달려 있다. 팀 쿡이 애플호 선장으로 탄탄한 입지를 확보하려면 그 시험을 잘 통과해야 한다. 잡스 사망 하루 전 열린 아이폰4S 출시 행사에서 많은 사람들은 ‘잡스의 부재’를 얘기했다. 팀 쿡이 무난하게 잘 이끌긴 했지만 다이내믹한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에 익숙했던 많은 사람들은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포레스터 리서치의 찰스 골빈은 “1년 반에서 2년 정도는 잡스 퇴진의 공백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면서 “결국 관건은 최종 결정을 해줬던 (잡스란) 한 인물이 없는 상태에서 공동 작업을 통해 얼마나 효과적으로 운영하느냐는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데이비드 요피 교수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잡스가 남긴 그림자가 힘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요피 교수 역시 팀 쿡이 ‘잡스 이후 시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팀 쿡이 직원들에게 애플의 심장은 변치 않을 것이란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할 경우엔 재능 있는 직원들을 잃게 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외부로 눈을 돌리면 상황은 더 긴박하게 돌아간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세계 IT 시장의 중심축은 ‘포스트 PC’와 모바일 쪽으로 급격하게 이동했다. 물론 이런 흐름은 잡스가 이끄는 애플이 주도해 왔다. 하지만 중심 역할을 했던 잡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당장 ‘킨들 파이어’란 저가형 태블릿을 내놓은 아마존이나 전 세계 8억 명의 이용자를 보유하고 있는 facebook 같은 신흥 세력들의 공세가 만만치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벌써부터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나 facebook의 마크 주커버그 같은 인물들이 ‘포스트 잡스 시대’의 주인공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숨 가쁘게 전개될 패권전쟁이 IT 시장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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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