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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유도계를 석권한 김재엽 동문

“주변 경쟁자보다는 내면의 경쟁자를 이기는 자세가 필요”


●개교 60주년 기념 동문 특집·비사人- 3

<김재엽 동문 약력>
1983년 계명대학교 상업교육과 입학
1983년 세계 청소년 선수권 금메달
1984년 LA올림픽 은메달
1985년 세계 유도 월드컵 선수권 금메달
1986년 제 10회 서울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86년 세계대학선수권대회 금메달
1987년 세계 선수권 대회 금메달
1987년 계명대학교 상업교육과 졸업
1988년 서울 올림픽 금메달
1989년 ~ 92년 국가 대표 코치 (바로셀로나 올림픽국가대표 코치)
1993년 ~ 1998년 한국 마사회 유도 감독
현. 동서울대학교 (경호스포츠과) 교수
대통령 훈장(체육훈장) : 청룡장, 맹호장, 거상장, 기린장


우리학교 60주년을 기념해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문을 만나고 있다. 그 중 1980년대 우리나라 유도계를 주름잡으며 세계 대회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바 있는 김재엽(상업교육·83학번) 동문을 만나 유도선수로서의 삶과 모교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 초등학교 때 만난 유도
처음 만난 김재엽 동문은 과묵한 경상도 남자였다. “유도선수가 되지 않았으면 현재의 김재엽도 없을 것”이라며 “유도는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대구 남산초등학교 2학년 때 축구부 활동을 했다가 예산 문제로 축구부가 해체되자 유도인의 길을 걷고 있었던 축구부 코치를 따라 대구시청 옆 경북유도체육관에 간 것이 유도와의 첫만남이었다.

“흰 도복을 입은 선수들이 서로 던지고 날아다니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김재엽 동문에게는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그 후 유도를 시작했다. 집안이 대대로 운동을 하는 집안이었는데, 할아버지는 씨름선수를, 아버지는 권투선수를 하셨다. 이런 이력을 가지고 태어나 운동이라면 자신이 있었고, 근성 또한 남달랐다.

■ 청소년기의 방황, 유도로 이겨내다
중학교 입학 후 잠시 질풍노도의 시기에 잠시 엇나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생활도 잠시, 유도 사범님께 호되게 야단맞은 후 정신을 차렸다고 털어놓았다.

그 후 방황을 끝내고 다시 흰 도복을 입으며 유도인의 꿈을 키워갔지만, 1년 반의 공백을 채우기는 부족했다. “당시 체육계에는 에이스 선수를 스카우트한 학교에 진학이 어려운 후보 선수 한두 명을 덤으로 보내는 관례가 있어 저는 그 덤으로 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어요.” 고등학교에 입학해 후보선수로서 선수 활동을 시작 했지만, 고등학교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결국 선배들의 폭력과 늘상 도맡아야 했던 궂은 일에 지쳐, 다시 방황을 했다.

방황 중에 친구가 손을 내밀었다. 2학년 때부터 황광훈 동기와 밤늦게까지 운동을 같이하며 다시 운동에 집중한 결과, 엑스트라 라이트급(60kg이하)에서 판판이 우승을 차지했다. 그 때부터 협회장기, 전국체전 등의 전국대회를 석권했으며, 16연승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 지역발전에 보탬이 되고자 우리학교선택
1983년 지역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우리학교에 입학했다. “계명대학교 캠퍼스가 정말 아름다웠다”, “대학 재학 때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태릉선수촌에서 생활하는 바람에 캠퍼스의 낭만을 만이 느낄 수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당시 태릉선수촌으로 학교 소식 및 행사를 편지로 전해주던 상업교육과 학생회장이었던 전현희 학생이 기억이 난다며, “꼭 만나서 당시에 못 전했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국가대표 선발되었을 때는 국가를 위해 꼭 정상에 서야겠다는 일념으로 달렸다. “유도의 경우 체급이 중요한 만큼 감량으로 체급 맞추는 일이 정말 어려웠다”고 회상하며 “메달을 딴 순간,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는 것 같아 기뻤다. 지금도 그 기분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금메달리스트라는 이름표...
승승장구하던 금메달리스트 김재엽 동문은 또 다시 방황을 시작했다. 사업실패로 어려운 시기를 겪었던 것이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금메달리스트라는 이름표였다. 다들 금메달리스트 김재엽만 기억할 뿐, 인간 김재엽은 생각 해주지 않았다.” 몇 번의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두 자녀와 어머니 덕분에 다시 생각을 고치고 새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지금은 동서울대학교 경호스포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변 사람들이 내가 교수로 재직한다고 하면 의외라고 생각들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어릴 적부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육성하는 교수가 꿈이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이 걸려 자신의 꿈을 이룬 지금 현재 생활에 만족하며 제자와 체육계를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세 필요
우리학교 60주년을 축하하며, “전통과 역사를 바탕으로 전국 최고의 대학으로 발전했으면 한다”고 축하메시지를 전했다. 이어자신도 “제자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스승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앞으로 우리나라 체육계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끝으로 후배들에게 “주변에 있는 경쟁자보다는 내면의 경쟁자를 이기는 사람이 되어 학교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로 성장했으면 한다”는 말을 전했다.

우리의 삶은 종종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울 때가 많다. 거기서 포기하면 결국 삶의 낙오자가 되지만,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는 사람은 성공의 길로 한걸음 다가가게 된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오늘 만난 김재엽 동문에게서 포기를 모르는 근성과 에너지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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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가해자들의 도피처, ‘심신미약’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선 잔인한 사건들이 보도된다. 서울 강서구 한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청년이 잔인하게 살해됐다는 보도, 오피스텔 관리사무소에서 경비원 2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20대 남성, 2011년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여성의 몸속에 손을 넣어 숨지게 했지만 상해치사로 종결된 사건 등이 그러하다. 이 잔혹한 사건들의 처리과정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가해자가 ‘심신미약’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실제 경비원 2명을 살해한 20대 남성은 검찰이 사형을 구형했지만 심신미약 주장이 인정돼 일부 감형되었고,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여성을 살해한 가해자는 피해자에 입힌 상해 정도가 심각하지만 술에 취해 심신미약이었다는 이유로 4년형을 받았다.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심신미약을 이유로 처벌은 가벼운 수준에 그쳤다. 잔혹한 살인을 했음에도 ‘심신미약’으로 감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형법 제10조를 살펴보면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을 하지 않거나 형을 감경한다.’고 명시돼 있다. 여기서 심신장애란 인지·지능·언어·정서·행위 등의 심신기능 면에 장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