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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역경딛고 변호사가 된 윤태원 동문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개교 60주년 기념 동문 특집·비사人- 2

<윤태원 동문 약력>
1980년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 합격
1981년 계명대학교 법학과 입학
1985년 계명대학교 법학과 졸업
1996년 제38회 사법시험 합격-연수원 28기
1999년 대구지방변호사회 변호사 개업
2004년 대구지방교정청 교정연합회 운영위원
2005년 대구지방교정청 행정심판위원
현, 대성보육원 운영위원
현, 동산장학재단 이사
현, 학교법인 계명대학교 이사
현, 경상북도경찰청 수사이의 심사위원
현, 경상북도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



우리학교 60주년을 기념해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문을 만나 보았다. 그 가운데 늦깍이로 사법시험에 도전해 현재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인 윤태원(법학·81학번) 동문을 만나 50여년 동안의 삶과 모교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았다.

●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
윤태원 동문의 첫인상은 밝았다. “솔직히 나보다 더 훌륭한 동문들도 많은데 나를 인터뷰한다니 약간 쑥스럽네요”라는 윤태원 동문의 첫마디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구에 있는 여러 공장에서 일을 했고 그 때 공장에서 일하면서 난 얼굴의 상처가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흔적처럼 남아 있다.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학업을 놓지 않고 틈틈이 남는 시간에 공부를 해오다, 결국 1980년도에 검정고시를 합격했다. 합격 당시를 떠올리며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고 회상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포기 하지 않고 계속 학업의 끈을 이어간 내 자신이 대견스러웠다”는 말에서 당시의 고단했던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하다.

● 우리학교의 붉은 벽돌에 끌리다
그 당시 대구·경북권에 많은 대학이 있었지만 우리학교를 택한 이유가 독특했다. “친구 집이 우리학교 대명캠퍼스 근처 있는데, 한 번씩 놀러 갈 때마다 붉은 벽돌로 된 캠퍼스담벼락을 보면서 그 담 너머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까?”하는 호기심 때문에 1981년도에 우리학교 법학과를 지원하게 되었단다.

“그 당시 두 분의 교수님이 기억에 남는데, 김기선 교수님과 이명환 교수님입니다”며 “두 분 교수님은 항상 자상하시면서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이야기 하셨고 희망이 되는 말을 많이 해주었다”고 말했다. 재학 시절을 생각하며 당시 대명캠퍼스에서 자주 어울린 친구 5명이 있는데, 다들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가끔씩 연락해 옛 추억을 안주삼아 소주 한 잔을 기울이기도 한다고.

● ‘가난한 나에게 시집와 고생한 아내’
윤태원 동문은 군대를 전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다. “막걸리 집에서 처음 만났던 집사람은 정말 미인이었고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었는데, 가난한 나에게 시집와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결혼 후에는 구미에 위치한 영유아 놀이방에서 일하던 아내를 도와 몇 년간 보조 선생으로 일했는데, 하루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자문하던 중에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때 고민을 엄청 했죠. 생계를 책임을 져야하는 가장이 공부를 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죠. 그러나 집사람이 흔쾌히 승낙을 해줘서 저는 1991년도에 사법시험에 도전하게 되었어요”

● 36세에 사법시험에 합격하다
그 후 31세의 그는 충청북도 보은군 작은 마을에서 홀로 공부를 시작했다. 1차 시험에만 4번의 고배를 마시며, 많이 괴로웠지만 아내와 태어난 첫 아이를 생각하면서 악착같이 공부해 결국 1996년 36세 때 사법시험에 합격을 할 수 있었다. “지금 기억해보면 아내와 제가 엄청나게 울었던 것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사법연수를 마친 후 1999년도에 대구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변호사 일을 시작 했다. 대구에서 개업한 윤태원 동문는 “제 고향인 만큼 지역 사회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했고, 또한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구에서 변호사 일을 하면서 그동안 못 다한 효도를 하고 싶어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했다.

지금은 사무실에 출근해 그날 있을 재판 준비와 사실관계 확인을 위한 의뢰인과의 만남, 그리고 법과 관련된 논문과 판례를 매일 검토하면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의뢰인을 돕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30여년을 법과 함께한 윤태원 동문은 법에 대해, ‘사람 간에 이루어지는 최후의 수단이며, 사회의 건전한 상식’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50여년을 살아오면서 인생에 후회할 일이 많았지만, 그 중 대학교 다닐 때 절박한 마음으로 공부를 하지 않은 것과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던 점이 가장 후회 스럽다고 했다.

검정고시로 대학을 입학해 학적 기록이 있는 것은 비산초등학교와 우리학교뿐이다. “그래서 더욱 우리학교에 애착이 간다”며 “내가 졸업한 학교가 올해 개교 60주년을 맞이해 큰 자부심을 가지게 되고 앞으로도 학교에서 희망하는 모든 것들이 잘 이루어져 60년을 넘어 1백년이 갈 수 있는 학교가 되었으면 한다”고 축하메시지를 전했다. “앞으로 우리학교에 부끄럽지 않는 동문이 되도록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끝으로 모교 후배들을 위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며 영국 희극작가 조지 버나드쇼의 묘비명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를 이야기 했다.

“젊음은 그 때에 누릴 수 있는 하나의 특권이며, 후배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주저하지 않는 자세로 도전하면서 앞으로의 미래를 잘 설계해 멋진 사회인으로 성장했으면 한다”는 말로 윤태원 동문과의 짧았지만 긴 대화가 끝났다.

세상에는 언제나 시련과 그것을 극복하는 인간의 의지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오늘 만난 윤태원 동문은 그 시련 속에서 자기의식과 방향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나라에 꼭 있어야 할 사람, 윤태원 동문을 만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더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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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가해자들의 도피처, ‘심신미약’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선 잔인한 사건들이 보도된다. 서울 강서구 한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청년이 잔인하게 살해됐다는 보도, 오피스텔 관리사무소에서 경비원 2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20대 남성, 2011년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여성의 몸속에 손을 넣어 숨지게 했지만 상해치사로 종결된 사건 등이 그러하다. 이 잔혹한 사건들의 처리과정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가해자가 ‘심신미약’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실제 경비원 2명을 살해한 20대 남성은 검찰이 사형을 구형했지만 심신미약 주장이 인정돼 일부 감형되었고,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여성을 살해한 가해자는 피해자에 입힌 상해 정도가 심각하지만 술에 취해 심신미약이었다는 이유로 4년형을 받았다.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심신미약을 이유로 처벌은 가벼운 수준에 그쳤다. 잔혹한 살인을 했음에도 ‘심신미약’으로 감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형법 제10조를 살펴보면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을 하지 않거나 형을 감경한다.’고 명시돼 있다. 여기서 심신장애란 인지·지능·언어·정서·행위 등의 심신기능 면에 장애가